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살전 4:13-18
재림신앙
데살로니가 서가 집필되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생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기대와 기다림이 다른 식으로 정리
되긴 했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재림 신앙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
습니다. 이런 신앙의 흔적을 우리는 1992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다미선교
회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소위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그들은
성서의 증언을 바탕으로 1992년 10월28일(?) 한국의 모처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그런 주장에 빠져든 많은 사람들이 직장이나 학교 생활도 접어두고 그들이
요구하고 있는 대로 재림하실 주님을 맞기 위한 종교집회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확신을 갖고 선전해대던 그 시간과 그 장소에 예수님은 재림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해프닝을 겪으면서 한국 교회는 종말 신앙을 바르게 가르쳐야겠다는 반성을 했습
니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종말에 대한 강의와 글과 설교가 신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시들해지더니 요즘은 아무도 이런 것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
것보다는 다시 새벽기도회나 청빈론 같은 주제로, 그리고 끊임없이 교회부흥에만 관심
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요즘의 교회가 종말에 대한 흥미를 놓치고 대신 교회 현상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
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기독교 자체가 종말론적 공동체라는
점에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다미선교회가 예수님의 재림을 비성서적이고 비신학적
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많았지만 종말을 교회의 화두로 끌어들였다는 점에
서는 매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앞 단락에 그려져 있는 초기 기독교도 역시
개인 재산을 처분하여 교회가 공동으로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생전에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인 재산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만큼 종말
과 재림에 대한 기다림의 열망이 강했다는 뜻입니다.
재림의 지연
초기 기독교가 그렇게 고대하던 예수님의 재림은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들의 생
전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현실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겠다는 예수님의 말
씀을 초기 기독교인들이 오해했거나 아니면 예수님이 실언을 했거나, 둘 중의 하나입
니다. 속히 재림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가능한 대로 결혼도 하
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도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
던 사람들이 하나 둘 죽게 될 때 교회 안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재림을 맞지 못
하고 죽은 사람들은 결국 구원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
니다. 초기 기독교가 경험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에 대한 기다
림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한 것이었기 때문에 재림이 일어나지 않은 가
운데 자기의 가족과 형제들이 죽어 가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도 이런 배경을 깔고 있습니다. 15절 말씀
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의 강림하실 때까
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재림하
실 때까지 살아있어야만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하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바울은 그
종말의 현실을 좀더 정확하게 해명해주려고 합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스올'이라는 지
하 세계로 떨어져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설
명에 따르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의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경계
선이 무효화됩니다.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앞선다거나 죽었다고 해서 뒤쳐지는 일이 없
습니다. 바울은 16절부터 매우 환상적인 표현방식으로 통해서 이런 사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이 부분을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명령이 떨어지고 대천사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
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고, 다음으로
는 그 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
다."(16,17절).
묵시적 상상력
일종의 묵시록처럼 들리는 바울의 이 서술을 오늘 우리가 구체적으로 파악해내기
는 쉽지 않습니다. 이는 곧 묵시사상에 뿌리를 둔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을 우리가 이
해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합니다. 대천사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곧 재림의 시
작을 알리는 신호라고 합니다. 이런 나팔 소리가 실제로 들리게 될까요? 그리고 예수님
이 승천할 때의 모습 그대로 구름에 둘러싸여 내려 오실까요? 휴거론자들이 주장하듯
이 그 때 우리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들려 올라갈까요? 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결정
론적으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서 기자들의 영적인 경험이 나의 인식
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도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 하늘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옆에 서 계신 예수님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스데반의 그런 경험은 매
우 사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언급하고 있는 하늘, 하늘문, 영광,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오늘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증언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컨대 어떤 시인이 이렇게 시를
썼다고 합시다.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김수영, '꽃잎2' 1연). 이 시인은 시를 꽃으
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서도 상당한 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
님의 나팔 소리가 우리 주변에서 발견되는 그런 나팔 소리이기보다는 훨씬 심원한 영
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바울의 이런 표현의 사실적 내용을 완벽하게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그
가 무엇을 전하려는 지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가장 핵심적으로는 이 마지막이 하나
님에 의해서 시작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된다는 말은 그 재
림을 우리가 예상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5장1절 이하에서 "주님의 날이
마치 밤중의 도둑같이 온다"고 설명합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
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임한다고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
은 늘 이런 긴장감을 갖고 살았습니다. 이게 곧 종말론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그런 삶
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이 땅에 치우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자
기 자신의 노력으로 절대적인 것을 성취하려는 이 세상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추구하
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
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구원을 성취할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가지만 기독교인은 그것이
선물로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의 이런 종말론적인 삶이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형국과 같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역사낙관주의와는 다르지만 역사허무주의도 아닙니
다. 혹 기독교인들 중에서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만 혼자 정직하면 된다거
나 세상은 모두 썩었으니까 포기하는 게 낫다는 식으로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기독
교는 근본적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점에서 세상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세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역사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합
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 형국이 조금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좋은 쪽으로 발
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권위주의 패러다임에서 탈권위주의로 전환하는 과도기이기
때문에 이런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어떤 점에서 이 나라의
역사 앞에서 책임적인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여전히 권위주의와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리도록 방관하거나 때로는 부추기는 태도는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로 믿는 우리로서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즉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우리의 신앙이 역사 허무주의
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인의 삶에 긴장이 따릅니다. 역사 방관주의나 허무주의는 아니
지만 그렇다고 역사낙관주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질서를 우리가 바르게 세
워나가는 일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절대적인 구원의 세계는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비유되고 있는 그 하나님의 절대적인 힘이 발휘되어야 절대적인
세계가 시작한다고 말입니다. 그게 곧 재림신앙입니다.
재림신앙의 왜곡현상
오늘 우리에게는 이 재림신앙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크게 보면 두 가지 극단적 왜
곡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재림 무용론입니다. 약간 과학적인 지식이 있거
나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유치하는 것으로 치부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성서의 증언은 인간의 지식이 미개했던 이들의 종교적 열광이
만들어낸 망상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기독교를 전하다가는 계몽시대를
한참이나 지난 현대인들에게 몰상식하다는 핀잔을 들을 뿐이니까 오히려 예수님의 인
간성과 기독교인의 도덕심을 부각시키는 게 선교적인 면에서도 효과적이라고 말합니
다. 그래서 19세기의 유럽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종교성과 도덕성에서만 해석해보려고
했습니다. 요즘도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도덕성과 복지활동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둘째는 휴거론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공중으로 들림받는다는
성서의 증언을 무조건 문자적 사실로 믿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고지식한 믿음도 사실
재림신앙의 왜곡입니다. 재림신앙은 2천년 전 미숙했던 사람들의 종교적 편견이 아니
라 참된 생명에 대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영적 경험이자 해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재
림론은 곧 생명론입니다.
생명과 부활
바울은 주님의 재림이 일어나면 우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
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같이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합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살아있
던 자들의 휴거는 사실 하나의 사건입니다. 죽은 자나 산 자 모두 공중으로 들림을 받
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적인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공중이 어디인지
를 따지는 것은 별로 생산적이지 못합니다. 공중은 우리가 참된 생명을 얻게 되는 곳을
가리킬 뿐이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14절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기시키면서 재림과 부활이 깊숙하게 연
결되어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14절 말씀은 재림이 있기 전에 죽은 사람
들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언급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
문에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은 죽더라도 부활의 주님의 재림 사건에 동참하게 될 것이
라고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자나 산 자 모두에게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그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재림 이전에 죽든지 그 때까지 살아있든지 상관없이
모두가 재림 사건에 포함됩니다. 이게 곧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라면 이 사실을 모르는 분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신
앙이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재림과 부활이 단지 교리문답의 차원에
서만 다루어질 뿐이지 우리의 삶을 실제로 견인해나가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날 때 우리가 참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이 재림 신앙 및
부활 신앙이 역동적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는 생명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너무 협
소하거나 또는 기계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단 이 땅에서 경험하는 이런 생명형
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건강하게 오
래 살고, 좀더 많은 것을 소유하거나 그런 사회적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우리의 생명이
강화되려니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큰 착각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원하는
것을 완벽하게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는 생명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생각해서 여성들이 그렇게도 갈구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가를 보면
됩니다. 그렇게 불쾌감을 주지 않은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젊은 여성들이 성형수술을
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려는 그런 처절한 몸부림은 순식간에 허무 속으로
빠져듭니다. 몇 십년 만 지나면 그런 노력들이 물거품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
다. 설령 잠시 만족감에 빠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참된 행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여
성분들만이 아니라 남자들도 역시 이런 점에서는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생명의 영
참된 생명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이
자신의 숨(루아흐)을 불어넣으셨다고 하는 바로 그 영이 성령이자 생명의 능력입니다.
그 영은 바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능력입니다. 생명은 이런 점에서 인간
의 소유이거나 인간에 의해서 작동되는 대상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에 속한 것입니
다. 비록 우리가 약간의 의학적 지식으로 인간의 병을 고치고 수명을 늘릴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의학적인 작용까지도 영의 활동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만약 그런 영의
활동에 거스르는 의학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인간을 죽이는 길로 발전될 가능성이 많습
니다. 따라서 생명의 본질을 알려면 성령을 이해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이 곧 생명의 영이고 생명은 반드시 그 영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근본적으로 '바람'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상할 수 없다는
데에 생명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기 힘든 근본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시인들이 노래하
듯이 이런 점에서 생명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내려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런 흔적을 우리의 일상에서도 약간씩이나마 경험하신
분들이 많은 것입니다. 분명히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희망을
경험하는 분들 말입니다. 또는 거꾸로 분명히 행복하게 살만한 조건을 가진 사람인데
도 실제로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곧 구원과 생명은 우리의 계획대로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작은 단서입니다. 우리는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
을 비우는 게 일차적으로 필요합니다. 마음 문을 여는 것이겠지요. 그런 사람에게는 생
명의 영이 들어와서 생명을 일으키십니다.
이런 일이 우주론적으로 발생되는 때가 곧 재림입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예수님
의 재림이 일어날 때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생명이 완성됩니다. 오늘 본문이 묘사하듯
이 우리가 공중으로 들림받는 사건입니다. 참으로 기대됩니다.
죽음의 불안을 넘어
바울은 18절에서 왜 "이런 말로 위로하십시오"라는 말을 할까요? 죽음의 불안이 데
살로니가 교인들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신앙
과 부활신앙을 굳게 붙들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불안할 수 있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이 재림이 현실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견뎌야 할 실존적 불안입니
다. 죽음은 현실이지만 재림은 여전히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재림이 가져올
생명의 완성에 대한 희망이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면 우리는 흡사 술에
취한 듯 전혀 새로운 힘에 취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그런
생명이 완성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기다림은 막연하게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경제, 정치적 사안들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게 아닙니다. 이런 것들
이 오히려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나름대로 중요하긴 하지만 생
명이 완성될 때까지만 잠정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흡사 애벌레의 몸이
나비가 될 때까지만 유효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이 대강절에
우리가 참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기로 약속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마음에 새
겨둡시다. 2003.12.7 영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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