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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주의 날과 십일조

 

주의 날과 십일조

(말 2:17-3:5)


말라기는 학개와 스가랴의 뒤를 이어 기원 전 460년경에 활동한 이스라엘의 예언자입니다. 말라기서는 한국교회에서 주로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으로 인용될 때가 많습니다. 십일조 제도는 구약의 몇 군데서 거론되는데, 말라기서에서 가장 강한 어조로 강조됩니다.(말 3:8-10)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을 가리켜 도둑질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으므로 저주를 받았다고도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이 복을 내리는지 아닌지 시험해보라고도 했습니다. 아주 노골적인 표현들입니다. 말라기의 이런 표현을 근거로 우리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서를 거꾸로 읽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고 해도 성서를 거꾸로 읽으면서까지 주장하는 건 잘못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말라기 예언자가 십일조를 거론하게 된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주의 날

말라기가 활동하던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패배주의, 또는 냉소주의입니다. 말라기는 그 사실을 말 2:17절에서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여호와를 괴롭게 하는 말을 하면서도 시치미를 뗐습니다. 둘째,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자를 여호와께서 좋게 본다고 주장했습니다. 셋째, 사람들은 정의의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과 생각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을 하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던 당시 사람들을 유별나게 못된 사람들이라거나 불신앙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은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했고, 나름으로 신앙적인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악인들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실제로 악인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런 악인을 비호하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들이 본 세상에는 정의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 분인데, 세상에 악인들이 횡행하고 정의가 실종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말라기 당시의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 겁니다.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이전에 예언자들이 선포하던 그 하나님을 실제로는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악인을 좋게 보고, 하나님이 정의롭지 않다는 주장은 당시의 시대정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시대정신이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에 적당하게 타협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살길만 찾으면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주 당연한 논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언제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말라기 예언자는 말 3:1 이하에서 이들에게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사자(使者)를 보내신다고 말입니다. 그 사자는 하나님의 길을 준비할 것이고, 준비가 끝나면 주가 갑자기 성전에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는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주는 창조자이며 완성자이며 심판자이십니다. 주는 그야말로 세상의 주인이신 분입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라기는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정의입니다. 주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이며,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입니다. 불과 잿물은 제련과 정화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불 앞에서 녹지 않는 금속은 없습니다. 잿물에 담겨서 떼가 씻기지 않는 옷감은 없습니다. 이처럼 주는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고 단련시킬 것입니다. 레위 자손은 이제 ‘정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것입니다. 여기서 레위 자손은 열 두 지파를 대표합니다.

다른 하나는 심판입니다. 심판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앞서 언급한 정의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정의는 곧 심판을 불러오며, 심판은 정의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말라기는 심판의 대상을 다섯 가지로 말합니다. 점치는 자, 간음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품꾼의 삯을 떼먹는 자,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자가 그들입니다. 점술과 간음은 이교도적인 우상숭배와 연결됩니다. 가나안의 바알과 아세라 종교는 풍요를 절대화하는 대표적인 이교도적 우상숭배입니다. 그런 우상숭배는 간음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짓 맹세는 부동산의 소유관계가 명확하지 않던 시대에 일어났던 현상들로 사회의 토대를 허무는 불의한 행위였습니다. 그 뒤로 나오는 두 개 항목은 주로 지배층이 행하는 범죄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말라기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외쳤습니다.

말라기의 예언 선포를 들은 당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귀담아 들은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일 겁니다. 앞에서도 여러 예언자들이 말라기와 비슷한 내용을 선포했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실현되지도 않았고, 그의 심판이 임하지도 않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정의와 심판은 하루의 인생살이를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으로 들리고, 풍족한 사람들에게는 남의 이야기로 들립니다. 물론 정의로운 세상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악인이 오히려 복 받고, 무죄한 사람이 고난당하는 시절에 정의는 아무런 실효성도 없는 추상적인 말로 들립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정의로운 세상은 오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당대의 시대정신이었습니다. 말라기는 이런 시대정신과 투쟁했습니다.

말라기를 비롯해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부패하고 무능력한 왕이나 귀족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투쟁한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신탁을 받았습니다. 그 신탁을 외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신탁을 들을만한 영적인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예언자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적으로 일치하지 못한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하게 신뢰했지만, 백성들은 약속 보다는 실증적인 사실을 더 의지했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정의와 심판으로 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약속에 자신들의 전체 영혼을 걸고 살았지만 백성들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지금 말라기와 백성들 사이에도 이런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둑질 

말라기는 바로 이런 대목에서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뜬금없어 보입니다. 말라기는 왜 갑자기 십일조를 언급한 것일까요? 말 3:5절로 정의와 심판에 대한 신탁은 끝나고 이제 새로운 주제로 넘어온 것일까요? 정의와 심판을 순전히 정치 경제적인 문제라고 보고 반면에 십일조를 순전히 종교적인 문제라고 본다면 일리가 있는 설명입니다.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예언자의 신탁에서 정치와 종교 문제를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속의 영역에 속한 것이 따로 있고 종교의 영역에 속한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총체적인 사건입니다. 앞에서 외친 정의와 심판은 십일조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말라기 예언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규례와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십일조였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었습니다. 말라기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9) 이어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이 축복하는지 않는지 시험해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설교 말머리에서 이런 구절을 근거로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거꾸로 읽는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말라기 예언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십일조라는 돈이나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례와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과 그런 삶의 태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십일조가 아니라 하나님을 참되게 경외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지도 않았습니다. 마음이 떠났으니 일종의 종교세인 십일조를 하지 않는 건 당연했습니다. 성전세가 없어서 성전 관리와 보수는 힘들어졌고, 성전에서 순전히 종교적인 업무에 종사하던 레위 지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말라기는 도둑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라기 예언자가 십일조를 하라고 강조한 것은 분명한 게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도 그 말씀을 따라야 하는 걸까요? 십일조는 이스라엘 역사에 필요했던 종교세입니다. 그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제도였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구약의 모든 구절들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면 우리는 지금 삼겹살도 먹지 말아야 하고, 무당들은 모두 죽여야 합니다. 이러한 고대 이스라엘의 독특한 역사 경험에서 나온 종교 형식을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일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 말씀을 폐기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 말씀이 말하는 근본을 찾아야 합니다. 구약의 형식은 접어두고 본질을 취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 본질은 무엇일까요? 말라기 예언자가 십일조라는 형식을 통해서 말하려는 하나님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정의의 하나님

우리는 이 답을 십일조 개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십일조의 기원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고 근본 취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일조는 두 가지 필요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는 종교적인 일이고, 다른 하나는 구제에 관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 레위 지파는 가나안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인 일만 수행했습니다. 그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다른 지파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또한 과부나 고아, 또는 갑작스런 재난을 당한 이들을 위해서도 십일조가 사용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고대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정의를, 특히 경제정의를 세우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말라기의 예언을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심판의 대상은 다섯 종류였습니다. 모두 사회적인 경제정의를 파괴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품꾼의 삯을 억울하게 하고,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이들이 거론되었습니다. 일용직 노동자들, 과부, 고아, 나그네는 생존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이들입니다.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린다고 했습니다. 품꾼의 삯을 떼어먹는 것은 곧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과 똑같으니까요.

오늘 말라기의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이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지 않는 것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는 것일까요? 개인적으로는 여러분이 각자가 처한 자리에서 경제정의를 바르게 따라가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그게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인건비를 줄이는 방법을 찾으려고 하겠지요. 그러는 과정에서 역시 품꾼의 삯을 억울하게 하는 일이 자의반타의반으로 일어날 겁니다. 이런 일들은 여러분이 신앙 양심에 벗어나지 않도록 매 순간마다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문제는 사회적인 차원입니다. 이게 더 본질적일 수가 있습니다. 사회적인 제도가 바르게 세워지지 않으면 개인은 그 안에서 무기력해질 수 있으니까요. 사회적인 차원에서 경제정의를 세우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세금 징수와 그것의 사용입니다. 세금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수입이 많은 사람에게서 많은 세금을 걷고, 적은 사람에게서 적게 거둬서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하고, 더 나아가서 어려운 사람에게 훨씬 많은 혜택이 돌아가게 하면 됩니다. 복지 정책의 강화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빈부의 격차가 줄여나가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세금이 너무 적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부자들에게서 더 많이 거둬서 대학교육도 무상으로 시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잠시 경험한 독일은 그런 복지 제도에서 모범적이었습니다. 거기서는 돈이 없어서 대학에 못 가는 청년은 하나도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 의료 혜택을 못 받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이 된 뒤로 이런 경제정의 개념이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로 종합부동산세를 폐기했습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에게서 세금을 많이 받게 하는 제도를 없앤 겁니다. 수 조원의 세금이 줄어들었습니다. 그쪽의 주장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닙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들의 세금을 깎아줘야 그 남은 돈으로 기업에 투자한다는 겁니다. 그런 주장은 경제논리로는 일정한 부분에서 옳지만 전체적으로는, 또한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제가 지금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말라기가 처한 상황도 똑같은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정의의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출세하고 복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만연했습니다.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말라기는 목이 터져라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말라기의 시대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뻔뻔해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고 핑계를 둘러댑니다. 어리석어 모르기도 하고, 알면서도 모른 척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 개인이 남보다 조금 더 편안하게 산들, 그렇게 살다가 죽은들 그게 무슨 대수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용산참사를 생각하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기도 하고 절망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망하지 마십시오. 희망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주님이 곧 오십시오. 아니 이미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에서 궁극적인 정의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를 믿음으로 참된 생명을 약속으로 받았는데, 우리가 무엇을 감당할 수 없겠습니까? 힘을 냅시다.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 2009.12.6.)

말라기 2: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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