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날을 준비하라.
마 24:36-44, 대림절 첫째 주일, 2016년 11월27일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오늘은 2016-2017년 교회력이 시작되는 날로서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의 시작은 성탄절 전 네 주간에 걸친 대림절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교회력이 대림절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당연합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공생애가 없었다면, 즉 역사적 실존 인물인 예수가 없었다면 기독교 신앙은 아예 성립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온다는 재림 신앙이 없어도 기독교 신앙은 근본이 허물어집니다. 초림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재림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서로 생각이 다를 겁니다. 이미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어 세상을 구원하셨는데, 또 다시 오실 필요가 있냐, 굳이 생명 완성을 위해서 다시 와야만 한다면 초림의 예수는 결국 실패했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다시 오신다면 지금은 어디에 계신 걸까요? 이런 질문들은 아무리 오래 생각해도 딱 떨어지는 대답을 얻을 수 없기도 하고,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세상살이가 바쁘기도 하기에 대다수 신자들은 그냥 지나칩니다.
더 어려운 점은 현대 지성인들이 재림 신앙과 충돌하는 물리학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도신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 승천 후 하나님 우편에 머물다가 이 세상에 다시 온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우주 공간 어딘가에 천국이 있고, 그 천국의 보좌에 하나님이 앉아 계시고 예수님은 그 오른 쪽 보좌에 앉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고대인들의 신화적 세계관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현대 물리학으로 인해서 이런 신화적 세계관은 깨졌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것은 아예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재림 신앙은 아무 의미 없거나 아주 부분적으로만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폐기처분 하는 게 차라리 나을까요?
이런 문제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지금의 우리보다 더 심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가 재림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재림이 지연되면서 생각이 혼란스러워진 겁니다.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벧후 3:9절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제시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더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재림이 늦어질 뿐이라는 겁니다.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이런 대답으로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살전 5:1-3절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주의 재림은 예고 없이 찾아드는 도둑같이 일어난다는 대답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이 문제로 얼마나 고심을 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마 24:36-44절도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마태복음 기자는 주의 재림을 ‘인자의 도래’로 본다는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인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앞에서 인용한 벧후와 살전의 말씀은 오늘 설교 본문인 마태복음과 똑같습니다. 여기서 인자의 도래나 주의 재림은 모두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걸 다른 말로는 종말이라고 합니다. 세상 종말은 단순히 세상이 끝난다는 뜻이 아니라 완성된다는 뜻이라는 점에서 주의 재림이나 인자의 때와 똑같은 뜻입니다. 그것이 곧 ‘주의 날’입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이 명실상부하게 주인으로 통치하게 될 때(카이로스)입니다.
교회 밖의 어떤 사람들은 생명이 완성될 주의 날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 증거를 대라고 말합니다. 증거를 댈 수 없으면 침묵하라는 겁니다. 이런 주장에 맞대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저런다고 무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상 이치에 따르면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주의 날은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소극적으로 대처합니다. 그저 양심적으로 착하게 잘 살기만 하면 기독교인으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명목만의 기독교인이라면 모를까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기독교인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종말에 관한 것에, 인자의 날에, 주의 재림에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전승을 다루고 있는 행 1:6-11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예수 재림에서 찾았습니다. 교회를 재림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그 전통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예수의 재림에 관해서 생각할 때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는 그것이 종말에 일어날 사건의 프로그램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가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오느냐, 그리고 우리 역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의 얼굴 모습이 2천 년 전 나사렛 예수 얼굴과 똑같냐, 하는 논란 역시 무의미합니다. 재림 신앙은 앞에서 짚었듯이 절대적인 생명에 관계된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생명의 근원이 하늘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말했고, 하늘로부터 예수가 재림한다고 표현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재림은 밖에서 안으로 침투하는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이 밖에서 안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여기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절대적인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생명은 우리가 자동차를 만들 듯이 생산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생이며 부활이고 종말에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될 절대적인 생명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재림을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재림은 지난 2천년 동안 일어나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찬송을 부를 때나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걸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삽니다. 재림 신앙이 공허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게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다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니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살던 시대도 다 그런 방식으로 세상이 굴러갔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출세하는 길도 지금과 비슷했습니다. 로마 문명은 매력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낙오자가 되지 말고 권력을 쥐는 것이 인생 성공이라고, 즉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그런 시대정신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습니다. 신앙의 중심이 흔들린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럴 때마다 교회 지도자들은 신앙의 근본을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기억하라고 설교했습니다. 재림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부단히 새롭게 다져나갔습니다. 마 24:44절 말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여기서 인자는 낱말 뜻으로 ‘사람의 아들’입니다. 인자는 유대교의 묵시문학 전통에서 사용된 단어로서, 세상 마지막 때 심판자가 될 분을 가리킵니다. 심판은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판단하는 일입니다. 심판자는 죄인을 벌하고 의인을 구합니다. 이 때 궁극적인 생명이 실체로 드러나게 됩니다. 심판자인 인자가 온다는 게 분명하다면 당연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마태는 노아홍수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창 7-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노아 가족이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면서 일상에 떨어져서 자신들이 다 죽을 운명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주의 날도 부지불식간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노아홍수 당시의 일반 사람들 역시 오늘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매일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돈을 벌어야 하고, 저축도 해야 하고, 자식도 키우고, 노후 준비도 해야 하고, 이웃들과 좋은 관계도 맺어야 했습니다. 모든 것들이 시급합니다. 그들은 노아로부터 홍수 이야기를 들었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홍수로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하던 대로 살았습니다. 노아 가족이 산꼭대기에 방주를 지었으며, 어느 날 그 안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그들은 피할 길 없는 대홍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어릴 때의 만화처럼 들릴지 모르겠군요. 노아 홍수 이야기는 창세기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바벨론 신화에도 나옵니다. 홍수 피해를 자주 받았던 고대 근동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고대인들은 신화의 방식으로 어떤 궁극적인 것을 표현했습니다. 일상의 과잉으로 인해서 자기 운명 앞에 놓인 어떤 결정적인 것을 못보고 놓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상에 숨어 있는 시원적인 것에 대한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원(始原)은 독일어 Anfang(안팡)의 번역입니다. 창 1:1절의 ‘태초’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 이런 시원과 태초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삶의 아득한 차원으로 이끕니다. 마당 한 구석에 소복이 쌓인 낙엽, 촛불, 밤하늘의 별, 커피 향,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 짧은 겨울의 해질녘, 낮에 나온 반달, 어느 봄날의 매화 향에서 우리는 시원과 태초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걸 놓치고 그냥 먹고 사는 데만 정신을 팔고 살아도 그게 한 평생이긴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방식으로 그들을 구원하실 겁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생명의 신비와 아득한 깊이를 경험하지는 못할 겁니다.
마태는 노아홍수 이야기에 이어서 또 하나의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40,41절입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두 사람이 짝을 지어서 각각 밭일과 맷돌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운명은 완전히 갈렸습니다. 주의 날로 표현된 절대 생명이 얼마나 엄중한지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라 해도, 가장 가까운 부부나 가족이라 해도 절대적인 생명 앞에서는 함께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당연합니다. 죽음을 각자 따로 맞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대화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주변에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또는 저녁 해거름을 보면서 시원과 태초를 생각하는 사람은 그걸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과 대화하기 힘듭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희망하는 사람들은 그게 없는 사람과 대화하기 힘듭니다. 대충 세상살이의 대화는 가능하겠지만 영혼의 대화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모든 걸 버리고 각자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와 같은 뜻입니다.
노아홍수 이야기와 두 사람의 운명이 갈린 이야기를 통해서 마태복음 기자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건인 ‘주의 날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준비하지 못하면 홍수에 멸망당할 것이며, 홀로 버림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노아홍수 이야기나 두 친구 이야기 모두 ‘깨어있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절대적인 생명 사건인 ‘주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깨어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 다음 장인 마 25:1절 이하에서 ‘열 처녀의 비유’를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 없이 등만 준비했고, 지혜로운 처녀들은 기름과 등을 함께 준비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한 밤중에 도착해서 잔치가 시작될 때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13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오늘 설교 본문에서 언급된 ‘깨어 있으라.’가 여기서도 강조되었습니다. 달콤한 꿈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정신이 깨어 있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꿈속에는 아무리 열정적인 것도 헛된 겁니다. 꿈속에서 10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합시다. 아무 의미가 없어요. 성경은 영혼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야만 노아홍수에 멸망당하지 않고, 밭을 갈거나 맷돌질을 하다가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영혼이 깨어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제가 보기에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죽어야 할 인간의 실존을 냉정하게 직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끝난다는 사실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 달에 한번은 서울을 다녀옵니다. 기차를 탑니다. 기차에서 벌어지는 일상에 제가 매몰되지 않는 이유는 곧 기차에서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있는 돈을 우리가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는 순간이 옵니다. 그걸 절실하게 안다면 더 이상 돈에 매달리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영혼의 깊이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성취해야 한다는 유혹과 욕망에 지배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부활 생명을 약속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각을 유지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생명을 자신의 소유나 상품으로 간주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의 논리에 물들어버리면 우리는 그런 세상의 것들과 함께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인 ‘주의 날을 준비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신앙적인 포즈를 위한 게 아니라 우리의 미래와 운명과 죽음, 그리고 우주의 모든 것과 가장 깊은 차원에서 관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날은 생명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날이 도적처럼 임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미 비밀한 방식으로 지금 여기에 임했습니다. 그걸 삶의 능력으로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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