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손과 주의 얼굴
시 31:9-16, 사순절 여섯째 (종려) 주일, 2020년 4월5일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재난
사람들의 가장 소박한 꿈은 이 세상에서 큰 어려움 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때가 되면 편안하게 죽는 것입니다. 이런 꿈이 모두에게 실현되는 건 아닙니다. 운이 좋아서 평생 공주나 왕자처럼 멋지게 살았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요즘 말로 금수저를 들고 태어나서 아무 걱정 없이 평생을 살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흙수저를 들고 태어나서 젊어 고생하다가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대다수 사람은 후자의 인생을 선택할 겁니다. 크게 아파본 사람, 극심한 가난에 떨어졌던 사람, 따돌림을 당해서 고독의 끝자락에 떨어졌던 사람들은 그런 경험이 없던 사람에 비해서 삶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난을 당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삶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게 우리 인생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입니다.
우리가 시편을 읽는 이유도 간접적으로나마 재난과 고통의 깊이를 접함으로써 삶의 진수에 가까이 가려는 데에 있습니다. 시편은 대부분이 삶의 질곡에 떨어진 이들의 탄원입니다. 감사와 찬양과 지혜를 주제로 하는 시도 있으나 가장 많은 분량은 자신이 당한 재난과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탄원 시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시편 31편도 역시 ‘탄원 시’에 속합니다. 이 시를 기록한 사람은 끔찍한 불행에 떨어졌습니다. 주변 사람에게서는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라서 하나님에게 탄원하는 중입니다. 이런 운명에 떨어진 사람을 우리는 단순히 불쌍하게 여기거나 기피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쉬운 예로 노숙자 앞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시편을 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간 사람입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이 시편을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생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감동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이 시편은 예배 시에 읽힐 것이며, 수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기쁨을 제공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한 단락은 9-13절로 이 시편 기자가 처한 어려움에 대한 탄원이고, 다른 한 단락은 14-16절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고백입니다. 먼저 앞 단락을 보겠습니다. 제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읽기만 해도 이 사람이 어떤 상황에 떨어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9절에서 그는 자기가 받는 고통으로 인해서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다고 호소합니다. 10절에서는 인생을 슬픔으로 보냈고, 지난 세월을 탄식으로 보냈다면서 “나의 뼈”가 쇠했다고 탄식합니다. 11절에서는 대적자들에게서 욕을 당하고, 친구들이 자기를 피한다고 했고, 12절에서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힌 자가 되었다면서 “깨진 그릇” 신세라고 절규합니다. 표현이 절절합니다. 13절에서 극에 달한 고통이 묘사되었습니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이 시인은 생명의 위협까지 받은 것 같습니다. 이런 생명의 위협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죽어 마땅한 잘못을 저질렀다면 이렇게 하소연하지 않았을 겁니다. 문맥의 흐름으로만 본다면 이 사람은 그가 사는 공동체를 위태롭게 할만한 큰 병에 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다거나 뼈가 쇠하였다는 말,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피한다는 말이 이를 가리킵니다. 10절에서 이 시인은 자신의 “죄악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다고 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장애와 질병의 원인을 죄로 보았습니다. 몸의 병만으로도 살아가기 힘든 마당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니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요즘 한센병이라 부르는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마을 밖으로 격리되었습니다. 그런 난치병이 치료되면 다행이지만 오래가면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가 됩니다. 더 나아가서 치료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면 차라리 죽는 게 모두를 위해서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동네 사람들이 하게 되고, 그런 생각이 소문이 되어 이 사람의 귀에 들립니다.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이 사람은 지금 죽느니만도 못한 황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이런 운명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이런 운명에 떨어진 대표적인 인물은 욥입니다. 그는 동방의 의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경건하고 모범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슬하에 칠남 삼녀를 둔 다복한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재산도 많았습니다. 행복한 조건을 골고루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졸지에 모든 걸 잃었습니다. 재산을 잃었고 자식들도 죽었습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렸습니다. 아내도 그를 떠났습니다.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러 왔지만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출생 자체를 부정합니다. 욥 3:25절과 26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욥은 친구들의 충고를 거부하고, 하나님에게 따집니다. 이런 재난을 받을 정도로 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이런 운명에 떨어지게 했느냐고 말입니다.
시편 기자와 욥의 운명은 너무 처절하여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편합니다. 그건 현실이 아니라고, 다른 이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어쩌다 운이 나쁜 사람에게나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코로나19 사태가 세계 전체를 위기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가 지구에서 살아가는 한 이런 재난과 불행은 잠시 피하거나 시간을 늦출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에는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엄중한 실존입니다. 지금 여기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 언젠가는 오늘 시편 기자와 똑같은 운명에 떨어질 겁니다.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고, 뼈가 쇠하고, 생명을 빼앗길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로마 시대에는 개선장군의 행렬 바로 뒤에서 한 사람을 시켜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을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지금 군중들의 환호를 받는 위대한 장군도 곧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의 퍼포먼스입니다.
인류 전체의 재난과 개인의 재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태도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생을 허무한 것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빛이 아니라 어두움에 속해서 삽니다. 다른 하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세상 원리만 추종하는 태도입니다. 전자를 허무주의라고 한다면 후자는 세속주의입니다. 이게 서로 겹치기도 합니다. 저는 이와 다른 태도로 살고 싶습니다. 이 다른 태도는 저의 두 가지 정체성과 연관됩니다. 하나는 지성적인 휴머니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입니다.
지성적인 휴머니스트로서 저는 재난과 불행에 맞서 모두가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대의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재난에 떨어진 사람을 국가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일입니다. 그게 복지정책입니다. 일반 시민들은 정치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여론을 형성하고, 투표도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저는 정치가나 시민단체 책임자가 아니라 설교자이기에 재난과 불행에 떨어진 사람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재난을 극복하는 연대 운동을 무시하지 않고 그 토대를 확실하게 세웁니다. 더 나아가서 복지정책이 제공하지 못하는, 아무리 제공하고 싶어도 제공할 수 없는 차원의 대답을 찾게 합니다. 영혼의 차원에 해당하는 대답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14-16절에서 그 대답을 찾았습니다.
주의 손
14절에서 시편 기자는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주를 의지하겠다고 말합니다.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라고 외치겠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재난과 불행에 떨어진 사람은 대개 자포자기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 멀쩡하게 사는데 왜 자기만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 원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은 이상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겁니다. 오늘의 시편 기자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설교하는 저도 그 사람과 같은 처지에 떨어지면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기독교 신앙을 지켰어도 어느 순간에는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오죽했으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쳤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흔들리는 마음이 아니라 그것을 딛고서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한 걸음 더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말입니다.
이 시편 기자가 나락에 떨어진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자신의 앞날이 “주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5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우리말 성경의 “나의 앞날”이라는 표현이 KJV과 루터 번역에는 “내 시간”으로 나옵니다. “My times are in thy hand” 우리의 시간이,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면 지금의 재난과 불행을 넉넉히 견뎌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직장에서 큰 어려움을 겪는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감봉을 당하거나 실업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사를 책임지는 분이 여러분을 어떻게 판단할지를 확실하게 안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기에 자기의 시간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주의 손”이라는 표현은 은유입니다. 하나님에게 실제로 손이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겠지요.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의 손이 지켜주신다는 표현을 종종 했습니다. 폭풍우가 치는 광야나 숲속에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품속에 안긴 아이가 느끼는 평온함과 비슷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로 아는 사람은 매 순간 평화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영혼의 평화를 경험해보셨습니까? 날개가 달린 것처럼 인생이 가벼워지는 느낌말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이런 경험이 쉽지 않습니다. 교회를 평생 다닌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안전하게 덮어주는 하나님의 손을 경험하지 못한 채 평생 교회만 출입할 뿐이니, 어떻게 영혼의 평화를, 즉 영혼의 안식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의 기준으로만 인생을 판단하는 데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익숙해졌다는 말을 제가 자주 합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인생이 완전히 망가진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너무 강하기에 이를 달성하려고 하나님을 이용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기도 내용이 대부분 자신의 소원성취에 해당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 내용을 시시콜콜하게 A4용지에 적습니다. 결혼하고 싶은 대상이 되는 남자의 키가 어느 정도이고, 연봉이 어떻고 … 등등입니다. 거기에 매달리기에 영혼의 평화와 안식이 주어질 리가 없습니다. 늘 조바심을 내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문제가 안 풀리면 믿음이 부족하다고 자책합니다.
“나의 시간이 주의 손에 있다.”라는 말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벌어질 모든 일이 선하고 귀하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믿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체를 뚫어본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경우를 속으로 말씀해보십시오. 재산이 반 토막이 났다고 합시다. 30평 아파트에 살다가 15평 임대 아파트로 옮겨야 합니다. 자식들에게 대학 등록금 외에는 더 보태줄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마저 하나님의 선하고 풍성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실 겁니다. 아는 사람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영혼의 평화를 얻습니다.
시편 기자는 16절에서 “주의 얼굴”을 자신에게 비쳐달라고 기도를 올립니다. 주의 손이 주의 능력이라면, 주의 얼굴은 주의 나타나심입니다. 주가 나타나실 때 그는 주의 손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손을 의지하면서 살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항상 유지되는 건 아닙니다. 어느 사이에 자신의 미래가 불확실해서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설교자로서 저도 하나님이 늘 확실하게 경험되거나 믿어지는 건 아닙니다. 제가 성경에서 배워서 알고 믿는 사실이 궁극적인 진리가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아직 절대적인 생명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이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기자와 같은 심정으로 “주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추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명의 빛을 보고 싶다는 갈망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기도를 드리실 겁니다. 여러분은 주의 얼굴을, 즉 시원적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는 구원의 빛을 경험해보셨나요?
오늘은 사순절 여섯째 주일이면서 종려 주일입니다. 다음 한 주간은 고난주간, 또는 성주간(Holy Week)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교회력에서 가장 중요한 한 주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러 일을 겪으신 후에 목요일에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했고, 식사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으며, 이어서 산헤드린에서 파송된 군인들에 의해서 체포당하고, 산헤드린 법정과 로마 총독 빌라도 법정으로 끌려가 심야 재판을 받으신 후,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운명에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냈다고 믿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종교법인 율법과 정치법인 로마의 실정법이 행한 불의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그들의 불의를 하나님이 무효로 만든 사건입니다. 우리는 바로 예수의 운명에서 “주의 얼굴”을 봅니다. 바울의 편지인 고후 4:6절이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요즘 우리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서 아주 혼란스럽고 답답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몇몇 분들은 큰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에 들어갔습니다. “사방이 두려움으로 둘러싸였다.”라는 오늘 시편 기자의 탄원을 절감하는 순간들입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는 사람은 시편 기자가 말하는 “주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주의 손”이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우리의 인생 전체를 감싼다는 사실을 온 영혼으로 느끼실 겁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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