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
성경은 여러 종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한 족장들 이야기나 모세와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전쟁 이야기는 별 생각 없이 읽어도 재미있습니다. 삼손이나 드보라 같은 사사들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벌어졌던 많은 이야기들도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이들의 예언이나 신약에서 바울 같은 이들의 편지들은 그런 재미가 덜합니다.
바울의 편지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5장은 아주 까다롭기 때문에 우리가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특히 12-19절 말씀은 부활 신앙에 대한 믿음을 단순하게 서술하고 강조하는 게 아니라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을 분석하기 때문에 조금 따분하기도 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만나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충 지나갑니다. 그러나 밥을 먹을 때도 편식하지 말고 모든 음식을 골고루 꼭꼭 씹어 먹어야 건강에 좋듯이 따분한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꼭꼭 씹어 먹어야 합니다. 부활문제와 연결해서 2천 년 전 고린도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고린도교회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그리스도파로 자처하는 이들로 인해서 분열이 심했고, 음식을 중심으로 한 우상의 문제, 도덕적인 타락, 지나친 은사주의 같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일들에 대해서 1-14장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한 다음에 이제 전혀 새로운 주제를 15장에서 언급합니다.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말은 곧 그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서 부활에 대한 신앙적 견해가 서로 달랐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도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그 시대에 이런 문제들이 벌어지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런 문제는 그렇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그런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고, 또 진리는 그런 논쟁의 방식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종교회의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는 처음부터 완벽한 신앙체계를 갖고 시작한 게 아니라 교회 현장에서 불거지는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면서 교리를 형성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현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신앙에 접근하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염려하는 겁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바울이 염려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 게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다면 아예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었겠지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는 말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말이 결국 똑같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조금 깊이 생각하려면 그 당시 죽음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생각과 헬라인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 참고해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죽음 이후의 생명에 대한 개념이 별로 강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모두 지하의 세계를 가리키는 게헨나, 혹은 스올에 갑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저주입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수명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에서 부활사상이 조금 엿보이기는 하지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헬라인들의 죽음은 영과 육이 완전히 구분되는 사건입니다. 죽음에 의해서 유한한 육은 사라지고 영원한 영은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이들에게도 역시 죽은 자의 부활은 없었습니다.
바울이 지금 지적하고 있는 사람들은 주로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 신자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은 영과 육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부활할 수 없고, 예수님이 재림할 때 살아있는 사람은 그 상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오늘 너무 신학적으로 예민한 문제들을 말씀드리는 것 같군요. 고린도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를 설명하느라 그렇습니다. 한 말씀만 더 드려야겠군요. 바울이 책망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었습니다. 다만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들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무조건 단정하지 마십시오. 그들도 나름으로 최선으로 바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했습니다. 다만 그들의 세계관이 헬라철학의 영육이원론과 영혼불멸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별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어떤 면에서 매우 극단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예루살렘의 핵심 세력인 사도들이나 예수님의 동생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유대교의 율법을 그대로 안고도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은 그것을 버려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모(母)교회와의 신학적인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에 의해서 기독교는 유대교와 구별되는 새로운 복음 공동체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극단성은 오늘 주제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보십시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고린도교회의 지도자들 중에서 상당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었지만 죽은 자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게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잘 보십시오. 13,14절 말씀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케뤼그마)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15-18절은 13,14절의 반복입니다. 바울답지 않게 글의 긴장감이 떨어지는 걸 감안하면서도 이렇게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이유는 이 문제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 문제는 단지 그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문제에까지 연결되고, 결국은 기독교의 선포인 케뤼그마 전체에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의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바울의 논리가 조금 과장된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도 지금 바울은 신학적으로 큰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여차하면 물러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그는 배수진을 치고 말았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 문제는 실증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없습니다. 생물학이나 물리학이 그걸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바울 시대의 헬라 철학은 오히려 영혼불멸에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교가 죽은 자의 부활 사상을 완벽하게 지지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죽은 자의 부활 문제는 접어두고 대충 그리스도의 부활만 믿는 것으로 정리하는 게 지혜로운 게 아닐까요? 그런데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 문제를 그리스도의 부활 문제로까지 확대시켰습니다. 죽은 자의 보편적인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이제 바울의 논리는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 주장했다면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고전 15:1-11절에서 증거하고 있듯이 부활의 주님이 사도들과 5백 명의 교우들과 야고보와 자신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제 아주 미묘한 문제인 죽은 자의 부활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시켰으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이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그가 설명하는 기독교 신앙 전체가 허물어질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증명했나요?
몸의 부활
고전 15:35-58절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부활을 변증합니다. 그중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42-44절 말씀만 읽겠습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그는 몸을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육체적인 몸과 영적인 몸말입니다. “소마 피지콘” 즉 육체적인 몸은 썩지만, “소마 프뉴마티콘” 즉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말입니다.
바울이 소마(몸)를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영지주의의 영육 이원론과 똑같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영지주의는 죽음을 통해 육체와 영혼이 갈라진다고 말하지만, 바울은 육체의 모습을 한 인간이 죽은 다음에 영의 모습을 한 몸으로 다시 산다는 주장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변형입니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몸으로 살다가 죽고, 그 다음에 영적인 몸(소마 프뉴마티콘)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걸 전제하고 51-5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눈 깜빡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치 씨앗이 땅속에서 썩어 잎과 꽃으로 변화하듯이, 그리고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우리는 전혀 다른 몸으로 변화합니다. 이런 참된 생명으로 변화하는 부활의 첫 열매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변화된 몸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이 육체적인 몸에서 영적인 몸으로 변화한다는 그의 주장이 곧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에 대한 증명인가요?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증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증명을 구분해야 합니다. 신앙의 문제는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명제처럼 실증적인 증명의 차원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서를 물리학적인 차원에서도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창조과학회에 속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성서를 귀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태도야 칭찬받을만하지만 그것이 곧 기독교의 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생명, 부활, 종말, 죽음 같은 가장 궁극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우리의 잠정적인 논리로 완전하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루 이틀 안에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서 풀어야 할 종말론적 숙제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런 숙제를 푸는 중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성서의 답변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진리입니다. 다만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가 아직 완전하게 알지 못할 뿐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종말 때까지 그 숙제를 풀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왜 죽은 자의 부활 문제를 제기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영육이원론에 빠진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이 문제였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 오늘 인간의 몸은 무의미했습니다. 그들은 극단적인 금욕이나 도덕적 방종에 떨어졌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몸을 함부로 굴렸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책망합니다. 이 몸은 육체와 영으로 분리되어 썩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다시 영적으로 변화된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곧 영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로 설명한다면 우리는 지금 영적으로 신랑을 맞게 될 신부와 같습니다. 신부는 ‘아직’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결혼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부활을 기다리는 오늘 우리의 마음은 신부처럼 새롭게 변화할 생명에 대한 설렘과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이걸 아는 사람이라면 이 기쁨을 주변 사람들과 나눌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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