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 살림, 증인
(행 3:11-19)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가 세 번 등장합니다. 2:1절 이하의 오순절 설교, 3:11절 이하의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 4:8절 이하의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의 설교가 그것입니다. 이 설교는 단순히 베드로의 설교라기보다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설교의 대상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입니다.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의 관계는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했습니다. 원래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이외의 모든 추종자들은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경험 이후에도 여전히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를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유대교 안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있듯이 나사렛파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당시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유대-기독교인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들과 다른 기독교 공동체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중심이 되는 기독교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로부터 복음을 받았지만 점점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이 이방인 기독교의 특징은 유대교의 율법과 할례를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를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대표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 지도자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 지역에서도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결국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으로 밀려났습니다. 지금의 그리스 땅인데, 바울에 의해서 복음이 유럽으로 넘어간 셈입니다.
이렇게 두 갈래로 갈라진 초기 기독교의 차이가 세월이 흐르면서 더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동생이 주축이 된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는 기독교적 특징을 잃고 결국 역사에서 사라진 반면에, 바울이 중심이 된 이방인 기독교는 큰 세력으로 자랐습니다. 이 헬라 기독교 전통에 속한 누가라는 사람이 기원후 80년대에 기록한 문서가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그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방인 기독교가 유대교와 어떻게 다른지를, 기독교가 왜 유대교로부터 벗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설명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놓여있습니다.
죽임
누가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설교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했던 빌라도를 반대했다고 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유대인들의 잘못을 정확하게 짚습니다.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자를 놓아주었습니다.(행 3:14) 결국 그들은 “생명의 주”를 죽인 것입니다.(15절) 유대인이 예수님의 죽음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역사는 죽임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는 마세요. 지금 유대인이라는 한 민족에게만 책임이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이런 죽임의 역사를 자행해온 인류를 대표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신성 모독죄입니다. 이것은 유대교의 산헤드린 지도부가 내린 대답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가 신성 모독으로 비쳤다는 건 이해할만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율법과 성전을 절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 논쟁은 대표적입니다. 사람들의 죄도 용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헤드린 종교지도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예수님은 명시적으로 자신을 신이라거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거나 메시아라고 드러낸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가르치고 행동하셨을 뿐입니다. 그것이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참칭하는 죄로, 신성모독으로 비쳤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회 소요죄입니다. 이것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내린 대답이었습니다. 복음서와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하고 싶었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민중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형 선고를 내린 것처럼 말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서 기자들은 종교적인 차원으로만 예수님의 사건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와 질서를 훼손할 가능성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의 판단은 물론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사회 혁명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기대를 갖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차원의 사회개혁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회가 민주화된다고 해서 영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만 영적인 만족이, 구원이 가능했습니다. 빌라도가 오해했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정치적 위협이 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사람이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인 생명과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빌라도는 산헤드린과 유대 민중들의 압력에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분명한 정치적, 사법적 관점에서 예수님을 사형시켰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일을 반복했습니다. 때로는 진리 투쟁이라는 명분으로, 때로는 유치한 생각으로 상대방을 죽였습니다. 선악과를 취한 아담과 이브는 남에게 책임을 미루기에 바빴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이유는 시기심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도 그런 일들은 수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반복됩니다.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편이냐 아니냐 하는 차원으로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을 행할 때 자신들은 그게 무언지도 잘 모릅니다. 아니 자신들이 옳다고 합리화합니다. 마녀를 죽이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에 회부해서 지동설을 주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 보편적인 인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개인들도 이런 죽임 역사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런 피해의식은 순식간에 공격심리로 나타납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우리는 죽임을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닐는지요.
살림
베드로는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선포합니다. 이 말을 처음 들은 유대인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은 예수 공동체의 주장을 술에 취해서 외치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걸 잘 알고 있던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그 시간이 오전 9시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 요엘이 말한 것처럼 성령이 임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기 쉽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사실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전할 뿐이었습니다. 솔로몬 행각 앞에서 설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 기회는 그 앞에서 일어난 어떤 특별한 사건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 기도하는 시간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걷지 못하는 거지가 성전의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엇을 얻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는 그를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웁니다. 그 사건을 본 예루살렘 주민들이 크게 놀라워했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게 아닌데 왜 자신들을 주목하느냐 하고 말입니다.(12절) 이를 걷게 한 것은 바로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이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라는 것입니다. 거지 장애인의 치유 자체는 여기서 핵심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유대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표적에 불과합니다. 베드로는 그런 종교적 표적이라는 호기심으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유대인들의 관심을 돌립니다. 그게 초기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장애와 병이 치유되기를 원합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도 근본적으로 이런 치유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복지를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성서에도 자주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 불치병이 치유되고 가난에서 벗어나서 부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편리하게 살아가는 도구입니다. 정치와 경제는 모두 그것을 목표로 합니다. 유대인들이 바라는 하나님의 표적도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기독교에도 그런 요소들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거의 미미할 정도의 의미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자녀들이 부모에게 용돈을 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용돈으로 부모의 사랑을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용돈을 한 푼도 주지 않는 부모가 많은 용돈을 두는 부모보다 더 깊이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알리셨습니다.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 부활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달성할 수 없는 생명의 아르케, 생명의 알짬입니다. 이에 비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노력들은 헤어스타일을 꾸미거나 화장을 하는 정도입니다. 또는 성형수술을 통해서 외모를 가꾸거나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거나, 약을 먹는 정도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생명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다 알 겁니다. 그것은 단지 겉모양의 개량일 뿐입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살림은 사람이 손을 댈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만이 가능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력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을 죽지 않도록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민중을 동원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접수하고 로마를 몰아낸 뒤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새로운 세상을 펼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모두 무기력하게 손을 놓았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부활 생명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배타적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설명을 드러야겠군요. 저는 역사를 새롭게 개혁해야한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샘터교회도 역시 한국교회의 개혁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우리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민주화되고 정의로워져도 인간의 삶은 질적인 차원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 집안에서 부모가 준 용돈을 공평하게 나눠 쓰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새로워져도 그것으로 우리가 참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살림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증인
기독교는 바로 이 사실을, 즉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허락하시는가를, 어떻게 죽임의 질서로부터 살림의 질서로 이끌어주시는가를 우리의 온 영혼을 기울여 대면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으키는 생명나라의 파수꾼입니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는 베드로의 말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15b) 증인을 가리키는 ‘마르투로스’라는 헬라어에는 순교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재판정에서 증인들은 자기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이라는 말은 부활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에 자기 목숨을 건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서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거기에 자신들의 모든 삶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만이 ‘퀴리오스’(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로마의 황제를 퀴리오스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주가 부활의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의 증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거부될 경우에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서 오늘 우리도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베드로와 동일한 차원에서의 증인은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람도 아니고 그 사실을 사도들에게서 직접 말을 들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성서와 기독교의 전승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부활 경험자들이며, 동일한 증인들입니다. 이 사실을 동의하시나요? 이런 사실로 우리의 마음이 움직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사도들의 교회 전통을 잇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경험했고, 그것에 증인으로 나선 사도들의 공동체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 2천년동안 역사적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2천년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닙니다. 바로 어제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를 들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가 무엇을 말해 왔는지를 숙고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이어져온 예전 예배를 드려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르게 수행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사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이런 영성이 깊어지는 사람은 죽임으로부터 살림의 세계로 나가기 마련입니다. 죽임의 문화에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오늘 한국의 청소년들이 죽임의 교육제도에 묶여 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살림의 교육으로 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물질 만능적 시대정신이 죽임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죽음의 자리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토대인 자연까지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돈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들이 평생 풀어야 할 신앙적인 숙제입니다. 완전히 풀지는 못할 겁니다. 부활이 현실이 되는 종말에나 완전히 해결되겠지요. 그때를 기다려야겠지요.
오늘은 부활절 셋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그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증인으로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부활 생명의 증인으로 나설 자격이 있을까요?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끌어주십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 저희를 붙으시고, 부활의 빛을 비추소서. 아멘! (2009.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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