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평화
(약 3:13-4:3)
신약성서에 나오는 단어 중에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요? 보는 관점에 따라서 서로 다를 겁니다. 믿음, 희망, 사랑이라거나 하나님 나라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중에서 ‘평화’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의 보도에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 전승에 이미 평화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실 때 목동들은 들판에서 천사들로부터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마태복음은 팔복을 전하면서 일곱 번째 항목으로 평화를 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복음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증언합니다. 사도바울도 편지를 쓸 때마다 평화의 인사를 전했습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빌 1:2) 이런 몇몇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에서 이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화는 물론 초기 기독교만 말한 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샬롬이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대에게 평화가!’라는 뜻입니다. 아랍어로는 ‘살람’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인사를 나누는 이유는 전쟁으로 인한 평화의 파괴가 인간 삶을 가장 크게 위협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꾸준히 평화를 외쳤지만 평화는 요원합니다. 다른 나라는 접어두고 한민족에게는 이런 문제가 더 시급합니다. 남북의 군사대치 국면이 별로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남북이 평화통일을 이룬다면 군사비를 줄여서 대학교 등록금을 모두 무료로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당장 통일까지는 힘들다고 하더라도 평화 체제는 이뤄가야 할 텐데, 그런 조짐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책임이 중차대합니다. 평화를 삶의 현실로 인식하는가의 여부에 따라서 정책의 방향이 달라지고 선교 및 설교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은 성서에서 평화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평화만이 아닙니다. 성서의 모든 가르침을 멀게, 막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주님의 말씀을 남의 이야기처럼 듣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도 교장 선생님들의 훈화 정도로 듣습니다. 지키면 좋지만 안 지켜도 뭐 큰 일이 나지 않는 ‘공자왈’에 불과한 겁니다. 이렇게 성서의 가르침을 멀게 느끼는 일이 우리에게 반복되면 결국 하나님도 멀게 느끼게 될 겁니다. 모든 신앙이 상투성에 떨어지는 거지요. 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신앙의 알맹이는 오간데 없고, 그저 껍데기만 붙들고 아등바등하고 마는 거지요.
성서가 강조하는 평화가 우리에게 절실하게 와 닿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평화가 지금 당장 우리의 삶과는 관계없다고 느낀다는 것이 중요한 대답입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세계 평화는 우리 같은 소시민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남북평화도 역시 우리가 직접 챙길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관심이 있어도 소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평화를 개인의 마음에서 작용하는 어떤 심리적인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의 평화가 오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것도 실제는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평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세상의 평화도, 개인의 영적인 평화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는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평화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생명의 리얼리티로, 즉 구원의 리얼리티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교회 공동체를 허무는 이들
앞에서 마태복음의 팔복 가운데 ‘화평하게 하는 자’를 인용했습니다. 그 구절이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야고보서 3:18절과 비슷합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평화의 씨앗을 심어서 의의 열매를 거둔다는 겁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 의를 세운다는 뜻이겠지요. 일반론적으로는 옳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론에만 떨어지면 야고보가 말하는 평화가 우리의 삶에 리얼리티로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야고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구체적인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는 두 세력의 다툼으로 인해서 큰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두 세력은 율법주의자들과 무(無)율법주의자들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주로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에 속하고, 무율법주의자들은 주로 헬라의 이방-기독교에 속합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이지만 율법에 대한 생각이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후자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지금 여러분에게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겁니다. 그 상황을 오늘과 비교해서 설명하는 게 좋겠군요.
1517년 10월31일은 루터가 교황청을 향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단 문 위에 대자보 형식으로 붙인 날입니다. 보통 종교개혁일이라고 부릅니다. 루터의 주장 중에 한 가지는 구원이 하나님의 ‘오직 은총’에 의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로마가톨릭교회는 은총과 더불어 신자의 업적도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차이가 별로 커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당시 교황청과 루터 사이에는 서로를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결국 교황청은 루터를 파문했고, 루터는 동조자를 규합해서 교황청에 더 적극적으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끼리의 이런 싸움은 초기 기독교에서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아니 그 당시에는 더 심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기독교의 체계가 잡히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고린도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 파로 나뉘었다고 합니다.(고전 1:12)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선교활동을 하던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선교여행부터 갈라섰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그 상황이 이해가 안 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직접 교회 지도자로 활동하던 시대에 이런 분리와 싸움이 있었다는 게 이상합니다. 이상하게 생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게 교회의 현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사이에도 생각의 차이는 어쩔 수 없습니다. 신자들 각자 살아온 경험이 다르고 현재 처한 형편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보수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진보적으로 생각합니다. 정치적으로도 어떤 사람은 여당에 가깝고 어떤 사람은 야당에 가깝습니다. 타종교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더불어 대화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북한을 완전히 불신하는 사람도 있고, 전향적으로 이해해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은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야고보는 지금 율법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무율법주의자들의 위험성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니골라 당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런 행위도 필요 없습니다. 몇 주 전의 설교에서 저는 그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야고보가 아무런 열매도 없는 죽은 믿음을 비판하고 행위를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야고보가 완고한 율법주의자, 또는 단순한 행동주의자라는 게 아닙니다. 그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총과 복음의 비밀을 몰랐겠습니까? 그건 이미 전제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극단적인 무율법주의자들로 인해서 교회 공동체가 해체될 위기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평화를 허무는 일들이 복음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땅 위의 지혜
그래서 야고보는 이들의 실체를 경고하는 중입니다. 야고보가 볼 때 지금 교회의 평화를 훼손하는 이들은 자칭 선생, 지혜자입니다. 야고보는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약 3:13) 하고 질문한 이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말을 잘 합니다. 그리고 말을 많이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혜로운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변에서도 그들의 그런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물론 지혜는 교회에서 필요합니다. 신학도 지혜입니다. 설교도 지혜입니다. 복음을 논리적으로 전하는 능력은 분명히 지혜입니다. 교회의 선생들이 지혜가 없다면 기독교 신앙은 열광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들의 많은 말들이 교회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야고보는 3:1절 이하에서 이를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뭔가 아는 것처럼 앞에 나서서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입에 재갈을 물리라고까지 강조합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는 반대 의견을 말하면 절대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대 의견은 필요합니다. 때로 격렬한 논쟁도 필요합니다. 교회의 판단이 늘 옳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잠시 언급한 루터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는 로마교황청에 반대되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로마교황청이 루터를 파문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교회는 진리 공동체이기에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는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주장이 정욕에 따를 때입니다. 그런 정욕은 진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리사욕에 따라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진리에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분쟁과 싸움 자체를 즐깁니다. 진리는 오간데 없이 오직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 데만 몰두하게 됩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파벌과 정략이 판을 치게 됩니다.
진리를 향한 논쟁과 정욕에 따른 자기주장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욕에서 나온 자기주장도 잠시 동안은 그럴듯한 모양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잠시만 그렇습니다. 정욕의 본성 상 그것을 오래 감출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본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 지혜는 땅의 것이기 때문에 시기, 다툼, 혼란, 악한 일을 일으키게 됩니다.(약 3:16) 야고보 공동체에서 이미 이런 정욕의 열매들이 일어났습니다. 신앙은 어디로 가고 인간적인 방식의 다툼과 싸움만 가득했습니다. 야고보 선생에 따르면 싸움과 다툼은 신자들 사이에서 싸우는 ‘정욕’에서 나온다고 합니다.(약 4:1) 여기서 말하는 정욕은 ‘헤도나이’입니다. 헤도나이는 바른 통찰력인 이성, 사랑, 양심을 거스르는 악한 힘들입니다. 이것들의 현상이 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욕심을 내고, 살인하고, 시기하고, 싸우고, 분쟁을 일으키고, 자기의 이익을 구합니다.
그런 일들을 오늘 한국교회에서도 사실은 자주 봅니다. 총회장, 또는 감독 선거에서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진리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교권을 잡기 위한 싸움입니다. 힘에 밀리면 세상의 법정에 고소하기도 합니다. 모든 게 허울만 믿음일 뿐이지 실제로는 정욕에서 나온 지혜, 즉 꼼수에 불과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
야고보는 이것과 달리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설명합니다. 그런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습니다.(약 3:17) 야고보는 여기서 일곱 개의 항목을 열거했습니다. 다섯 가지는 적극적이고, 두 가지는 소극적입니다. 교회 지도자, 교회 일꾼들의 지혜가 하늘로부터인지, 땅으로부터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기준들입니다. 야고보는 이중에서 두 번째 항목인 평화를 18절에서 다시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4:1-3절에서는 싸움과 다툼을 경고합니다. 그가 이 대목에서 전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아는 사람은, 그리고 그런 지혜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평화의 씨앗을 심는다는 것입니다.
평화의 씨앗을 심는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믿음생활만 잘 하면 실제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평화를 지향한다고 말하면서 불의를 보고도 침묵한다면 그게 바로 죽은 믿음이겠지요. 단순히 분쟁이 없는 것이 평화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2:51) 십자가 사건은 세상과의 불화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언제 평화를 맺고 언제 투쟁해야 할지 판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겉으로 친하게 지내고, 가족과 큰 다툼 없이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평화의 씨앗을 심는다고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정욕적인 힘들이, 즉 헤도나이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궁극적인 평화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실천할만한 능력이 없지만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로 평화를 지향하는 것과 땅에 속한 정욕으로 싸움과 다툼을 일으키는 것 사이에서 말입니다. 야고보가 경고하고 있는 이들은 후자였습니다. 그들은 말만 그럴듯하게 하면서 정욕을 따라갑니다. 그들은 자칭 선생이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신자들을 다투게 하고 분당 짓게 하고 적대감에 빠지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만이 참된 지혜입니다. 그것이 참된 지혜라는 사실은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설명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열매는 평화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지혜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면 여러분은 교회에서, 가정에서, 세상에서 평화의 씨앗을 심게 될 것입니다. 거꾸로 여러분이 교회에서, 가정에서, 세상에서 평화 지향적으로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의 지혜는 바로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200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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