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그 ‘너머’
약 3:13~4:3, 창조절 셋째 주일, 2021년 9월19일
말과 삶의 일치
사람의 인식 능력은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큽니다. 운동도 그렇고, 바느질도 그렇고, 음악이나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보다 빨리 깨우쳐서 높은 단계로 들어가는 사람을 세상은 지혜롭다거나 머리가 좋다고 말합니다. 똑똑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의 지도층 인사가 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약 3:13절은 아래와 같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야고보가 말하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구체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내용을 말로 가르쳤습니다. 야고보는 말과 이론에만 떨어지지 말고 그것을 행위로 보이라고 충고합니다. 자신의 깨달음과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행함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겁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강조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약 2:14절과 17절에는 기독교 역사에서 논란이 많았던 발언이 나옵니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기독교의 가르침은 원래 행위보다는 믿음에 무게를 둡니다. 그게 바울의 중심 사상이었습니다. 야고보의 이런 발언은 바울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다고 혹평한 적이 있습니다. 루터 번역 성경에는 야고보가 원래의 자리가 아니라 뒤에서 세 번째 자리로 밀려났습니다. 야고보가 기독교의 믿음을 낮게 평가하고 행위를 무조건 높이 평가하는 건 아닙니다. 야고보는 바울의 ‘칭의론’에 치우쳐서 믿음과 삶이 분리된 사람들을 비판한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지혜와 총명이 있는 이들은 말만 하지 말고 거기에 따른 행위로 본을 보여야 한다고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7:20)
약 3:13절에 특별한 표현이 나옵니다. ‘지혜의 온유함’으로 행위를 보이라고 했습니다. 지혜를 온유하게 펼치라는 충고이기도 하고, 거꾸로 지혜가 온유하지 않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경험하는 현상입니다. 머리가 명석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 지혜를 파괴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왜 그럴까요? 14절 말씀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에 시기와 다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시기와 다툼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자신의 지혜와 총명을, 그리고 선한 행위를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도 정곡을 찌르는 발언입니다. 우리의 시기심이 얼마나 막강한지는 우리 스스로 압니다. 남이 잘되는 걸 못 봅니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시기심이 발동합니다. 정치나 기업 영역은 물론이고 교회와 수도원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정의에 근거한 듯이 보여도 그 안에서는 시기심이 발동합니다. ‘다툼’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ἐριθείαν’으로 self-interest(사리사욕)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사리사욕도 우리가 거부하기 힘든 세력입니다. 시기와 다툼에서 나오는 지혜와 선한 행위는 위선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서 “거짓말하지 말라.”라고 질책합니다.
땅에 속한 지혜
야고보의 질책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십시오. 15절에 따르면 시기와 다툼(사리사욕)에서 나오는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땅 위의 것”입니다. “땅 위의 것”이라는 말은 그 지혜가 무조건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세속적이라는 뜻입니다. 세속의 원리는 ‘잘나고 싶은 마음’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표현으로 ‘자랑질’입니다. 그걸 가리켜 야고보는 ‘정욕의 것’이며 ‘귀신의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지혜의 속성이 여기서 세 가지로 표현되었습니다. 땅 위의 것, 정욕의 것, 귀신의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전체적으로 우리의 세속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현상이 이런 세속적 욕망에서 나타나는 것이라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정치 영역만이 아니라 교육계나 문학과 예술계도 비슷합니다. 우리 개인의 소소한 일상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야고보에 따르면 땅 위의 지혜가 불러오는 결과는 혼란입니다. 16절 말씀은 2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도 딱 들어맞는 분석입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그래서 야고보는 땅이 아니라 ‘위로부터 난 지혜’를 말합니다. 그 지혜의 열매를 17절에서 여덟 가지로 말합니다.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 편견 없음, 거짓 없음입니다. 바울이 갈 5:22~23절에서 열거한 성령의 아홉까지 열매와 비슷한 내용입니다. 바울과 야고보가 활동하던 시대의 교회에도 우리의 예상과 달리 인간적인 문제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교회도 시기심과 사리사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혼란스럽고 편파적이고 파괴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18절에서 다시 평화를 강조했습니다. 평화를 일구는 사람은 평화를 씨앗처럼 심어서 악한 일이 아니라 의로운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왜 시기심과 사리사욕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요? 나름으로 지혜가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왜 싸울까요? 우리의 지혜가 왜 평화를 일구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혼란을 부추기는 데 사용되는 것일까요? 똑똑한 사람들의 숫자가 훨씬 늘어났는데도 세상은 왜 여전히 저속한 방식으로 작동할까요? 물론 진실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실제로 정의롭게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야고보가 17절에 나열한 지혜의 선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옛날보다 더 좋아지지는 않았습니다. 국제사회나 대한민국 사회까지 갈 필요도 없이 그냥 개인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가난했던 젊은 시절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지금의 여러분이 더 너그러워졌습니까? 더 평화 지향적으로 삽니까?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으로는 거의 나아지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싸우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야고보는 4장 1절 이하에서 정확하게 진단했습니다. 우선 1절을 『새번역』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육신의 욕심
여기서 싸움과 분쟁은 비인격적이거나 난폭한 사람들에게만 벌어지는 게 아닙니다. 약 3:13절에서 언급된 지혜와 총명이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똑같이 벌어집니다. 그들은 지혜를 온유하게 사용함으로써 선행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나 시기심과 사리사욕으로 그런 선행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에게 나타나는 선행도 결국은 자랑질입니다. 이로 인해서 교회 안에서 싸움과 분쟁이 벌어집니다.
야고보는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을 ‘육신의 욕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이 ‘정욕’이라고 번역한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ἡδονή입니다. ‘헤도네’는 lust(욕정), pleasure(즐거움), passion(격정)을 의미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들어 있는 인간 속성입니다. 이 세상은 거의 이런 속성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인간 속성 자체를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화의 과정에서 주어진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예속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런 인간적 속성에 예속된 사람이 교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니까 싸움과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직접적으로는 보지는 못했습니다. 간접적으로는 들어서 아는 게 있습니다. 대구샘터교회에서는 그런 일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소소하게는 벌어졌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싸움과 분쟁의 동기는 분명하게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각자의 가치관과 성격이 다르니까 서로 충돌하는 건 당연합니다. 7~8년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어느 교인이 자기 땅에 교회당 건물을 자기 비용으로 지어서 예배 처소로 무상 대여하겠다고 나선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생각해볼 때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해서 교인 총회에 부쳤습니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몇몇 교우가 결국 교회를 떠났습니다. 저는 누가 옳고 그름을 지금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모인 사람들이라고 해도 담임 목사인 저를 포함해서 ‘헤도네’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의 모든 삶에 해당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그렇고, 취미 동아리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자기를 성취하려는 욕망인 ‘헤도네’가 운명적으로 크게 작용합니다. 싸움과 분쟁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속상해하고, 웬만해서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는 속담이 여기에 어울립니다. 약 4:2절이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욕심과 시기심이 성취되지 않으면 다투고, 더 나아가서 살인할 마음이 듭니다. 자기의 세속적인 욕망이 성취되지 않으면 계속 싸운다는 겁니다. 자기 정욕을 채우려고 교인들을 선동하는 당시 교회 지도자들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갈등과 다툼과 분열 현상들을 우리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습니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차이는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자기의 세속적 욕망에 매달리는 사람이 있고, 어느 정도 자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목회자들도 여기에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 목회 활동을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정욕에 떨어지는 겁니다. 목회에 성공하고 싶다는 열정이 바로 정욕입니다. 벤처 기업을 키우고 싶은 기업가의 욕망과 목회자의 욕망이 본질에서 똑같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이런 정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인류 모두가 죄인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인류 공동체가 빠져나오기 힘든 딜레마가 놓여 있습니다. 지혜는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지혜는 헬라어 ‘σοφία’(wisdom)의 번역입니다. 유럽 전통에서 철학(philosophy)은 ‘필로스’와 ‘소피아’의 합성어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인류 역사는 이런 지혜를 통해서 발전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지혜를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자기를 실현해야겠다는 강력한 욕망, 즉 정욕에 이끌립니다. 지혜와 정욕이 맞물리게 되면 결과는 뻔합니다. 다툼과 악과 위선입니다. 약 3:15절이 말한 대로 땅 위의 것, 정욕의 것, 귀신의 것이라 할만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기후 위기가 현실로 다가오고, 수많은 사회적이고 국제적인 갈등의 해결책이 늘 미봉책으로 끝나는 지금, 우리가 그런 시대를 산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그게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인간 본질이고 운명이니 어쩔 수 없다고, 그런 한계 안에서 행복하게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이해가 가는 생각입니다. 좋은 머리로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하루빨리 평생 먹을 걸 벌어놓고 조기 은퇴한 뒤에 유유자적 전망이 좋은 멋지고 넓은 집에서 맛난 것을 골라 먹고, 국내외 여행 다니면서 럭셔리하게 살겠다고 야무진 꿈을 꾸는 현대인들이 젊은 층에 제법 많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행복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제가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매일 진수성찬을 먹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단순한 먹을거리인 만나를 먹었던 고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행복했을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위로부터 오는 지혜
야고보는 인간 지혜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땅의 지혜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말한 겁니다. 땅 위의 지혜와 하늘의 지혜라는 표현이 말하려는 핵심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지혜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혜의 근본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지혜는 이렇게도 사용될 수 있고, 저렇게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지혜는 칼과 같아서 요리사의 손에 들리면 좋은 음식을 만드는 도구로, 강도의 손에 들리면 생명을 위협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지혜의 원천이 중요합니다. 그 지혜의 원천은 하나님입니다. 지혜가 의존해야 할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것을 저는 “지혜 ‘너머’”라는 설교 제목으로 달았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 또는 지혜 ‘너머’는 손에 분명하게 잡히는 게 아닙니다. 저도 역시 여러분에게 지혜 ‘너머’인 하나님을 보여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궁극적인 차원에 속한 것은 준비가 안 되면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막 4:9, 23) 종종 말씀하신 이유, 그리고 유대 고위 지도층 인사인 니고데모 역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지혜의 원천, 또는 지혜 ‘너머’를 여러분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는 없으나 거기에 이르는 길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길입니다. 그를 통해서만 우리는 지혜 ‘너머’이신 하나님에게, 즉 절대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절대 생명은 죄와 죽음이 개입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사람의 지혜가 무용지물이 되는 세계입니다. 사랑만이 배타적 능력으로 통치하는 세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 즉 지혜 ‘너머’가 느껴질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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