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계를 벗삼기
-비아 포지티바(via positiva, 긍정의 길)-
대심리학자요 인류애자인 에리히 프롬은 임종 때 친구 로버트 폭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인류가 바이오필리아보다 네크로필리아를 택할까?” 의미심장한 물음이다. 왜 정작 우리는 생명 사랑보다 죽음 사랑을 택할까? 경축보다 미사일을? 함께하는 힘보다 군림하는 힘을? 떨쳐버리기보다 욕심부리기를?
이 뜨끔한 물음에 당연히 풍부한 대답이 나올 수 있지만, 나는 신학자의 관점에서 하나만 내놓고자 한다. 서양문명은 그 종교전통이 창조보다 속량을, 황홀보다 죄를, 우주적 인식보다 개인적 내성을 택한 그만큼 생명보다 죽음을 택했다. 서양종교는 기쁨, 우주창조, 창조주로부터 계속 흘러나오는 힘, 원복에 대해 침묵한 그만큼 자주 사람들을 낙담시켰다.
서양에서 종교의 실패가 우리 문화에 죽음 사랑이 나타나는 근본원인이라면, 나는 의심 없이 그렇다고 생각하거니와, 창조계에 바탕 한 영성의 회복이야말로 이 사회에 신성한 쇄신을 기약할 것이다. 다만 이 회복이 너무 늦어져서는 안 된다. 케케묵은 타락/속량 신학의 선입견들과 수많은 과거지향적 싸움을 벌이기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
의문의 여지도 없이 지난 6세기간 서양 사회와 종교에서 가장 모자랐던 것은 비아 포지티바, 긍정의 길, 감사와 황홀의 길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비아 포지티바 열 마당을 들를 것이다. 이들은 개념적 주제에 그치는 것이 물론 아니다. 깊이 들어가는, 깊이 느끼는, 깊이 나누는 여행이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무감각이 아니라 자각의, 통제가 아니라 에로스의 여행이다. 또 따라서 구원의, 치유하는 힘의 여행이다. 비아 포지티바의 힘은 잊혀져 왔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힘이다. 기쁨이요, 지혜인 힘이다. 라틴어와 히브리어에서 ‘지혜’에 해당하는 말들이 ‘맛봄’과 연결됨은 우연이 아니다. 시편 시인은 “주님을 맛보라.”고 외친다. 비아 포지티바는 우리와 만유를 의미하는 창조계의 아름다움과 우주적 깊이를 맛보는 여행이다. 이 창조계의 힘들이라는 확고한 토대가 없을 때 우리는 권태로운 사람, 폭력적인 사람이 된다. 죽음의 세력들과 죽음의 원들을 사랑하는, 죽음의 연인들이 된다. 비아 포지티바로 모든 창조계가 새 출발을 한다.
비아 포지티바를 따라 걸으며 머물 열 마당은 다음과 같다.
1. 다바르: 하느님의 창조력(말씀)
2. 축복인 창조와 기쁨 맛보기의 회복
3. 땅스러움인 겸손: 열정과 단순과 더불어 축복인 우리의 땅스러움
4. 우주적 보편성: 조화, 아름다움, 정의
5. 신뢰: 신뢰와 확장의 심리학
6. 만유내재신론: 모호하고 투명한 하느님 체험
7. 우리의 왕다운 인격 존엄과 하느님 나라 건설 책임: 하느님 나라 신학의 창조신학
8. 실현된 종말론: 때의 새로운 인식
9. 우주적 환대인 거룩함: 창조계 황홀체험을 나눔이 이루는 감사와 찬양의 거룩한 기도
10. 비아 포지티바에서 보는 죄, 구원, 그리스도: 창조와 육화 신학
<마당 1>
다바르: 하느님의 창조력(말씀)
지혜로 만물을 만드셨나이다. -시편 104:24
말씀은 삶, 있음, 영, 모든 파릇파릇 돋아남, 모든 창조성이다. 이 말씀이 조물마다에서 나타난다. -빙엘의 힐데가르드
티끌 하나도 놀라운 혼이 있다. -조안 미로
조물마다 하느님의 말씀이며 하느님에 관한 책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온 세상과 만물이 다름 아니라 펼쳐놓은 책이요, 사전 지식이 없이도 하느님 학문을 연구하고 그분 뜻을 배울 수 있도록 살아 있는 성서다. -세바스찬 프랑크
파란 싹 사이로 꽃을 내미는 그 힘이/ 내 청춘을 밀고 간다. .../ 돌 틈으로 물을 솟구치는 그 힘이/ 내 붉은 피를 돌린다. -딜런 토마스
우리 어린이들이 인간 재주로 지은 책만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큰 책을 읽은 법도 배울 필요가 있다. 이 큰 책을 읽은 것이 어린이들에게 자연스런 일이다. -토마스 베리
창조계는 존재할 뿐 아니라 진리도 발산하다. ... 지혜는 인간이 신비에 접하면서 존재의 영광에 승복할 것을 요청한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
무엇이나 그 자체로 파악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우주의 다른 모든 것과 이어져 있음을 발견한다. ... 미립자 하나라도 허비되거나 소모되지 않고, 이런 씀에서 저런 쓰임으로 영원히 유전한다. -존 뮤어
우주는 신성의 첫 계시요 첫 기록이며, 신-인 통교의 첫 자리다. -토마스 베리
이 입에서 나가는 말은 빈말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사야 55:11
주님의 말씀으로 그분의 행업들이 있게 되었다./ 태양이 만물을 비추듯이/ 주님의 행업은 당신 영광으로 충만하다. -집회 42L15,16
인류 본성은 모든 우주 사건에 참여하며 안으로나 밖으로나 얽혀있다. -리처드 빌헬름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 -요한 1:1,14
서양에서는 하느님 말씀의 신학이 사실상 하느님 말씀을 죽였다. 역설적인 이 말은 신학자들이 히브리어 아바르를 “말”로 번역하면서 사실상 우리 문화에서 “말”이 뜻하게 된 바를 고려하지는 않은 그만큼 사실이다. 다바르는 단순히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다. 인쇄술이 발명될 무렵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서양인 가운데 3분의 2가 완전히 문맹이던 당시에 현명하게도 하느님 말씀을 설교하는 신학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은 다르다. 계몽주의 이래의 좌뇌 주도권이 우리를 마르이 홍수에 빠뜨리는 문화를 낳았다. 광고, 신문, 연설, 문고, 전집, 또 이제는 워드 프로세서, 이 모두가 “말”의 의미를 함부로 바꾸고 싸구려로 만들기에 바쁘다.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가 성장하는 자양이 되는 영성적 뿌리를 다시 얻자면, 말 전의 원래 창조계로 돌아가야 한다. 인쇄 말, 방송 말, 워드 프로세서 전으로, 상당한 침묵이 있어야 말도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던 그런 때로 돌아가야 한다. 발설하는 말, 이야기하는 말, 생명을 낳는 말, 따라서 신적 창조력인 그런 말로 돌아가야 한다.
성서 전통에서는 그 시간 전 시간과 말 전 시간이 지혜와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놀이를 내포한다.
주님께서 당신 길의 맏이로 나를 창조하셨도다.
그 옛날 당신의 행업 이전에
영원에서부터 나는 모습이 갖추어졌도다.
한 처음부터 세상 시작 때부터 ...
나는 그분 곁에 있었던 기능장
나날이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노라.
나는 그분 땅의 거주지에서 뛰놀며
사람들 사이에서 즐거워했노라.(잠언 8:22,23,30,31)
히브리 성서의 지혜를 연구한 게르하르트 폰 라트는 창조 배후의 말씀인 지혜를 “시원의 세계질서, 세계창조의 배후의 신비”라고 정의한다. 지혜는 만유에, 창조계 전체에 미친다. “인간 사회의 영역들에서처럼 비인간 창조계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다스린다. ... 인간에게 도움을 제공하면서 인간을 향해 있다.” 그러므로 창조계 전체가 하느님의 살아 있는 지혜와 말씀을 담고 있으며, 그 모두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인간의 말은 하느님이 발설하신, 따라서 신적 광채로부터 발산되는 수십억 말씀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지혜와 접족함이란 인간의 말들을 넘어감이다. 인간의 말이 존재한 것은 4백만 전쯤일 뿐이다. 그리고 종이에 나타난 것은 몇 천 년, 인쇄로는 500년이 고작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하심도 내표하는 계속되는 창조의 수십억 년으로 되돌라가도록 초대받고 있다.
인간의 말만 말이라고 하는 인간 중심적 말의 통제를 떨쳐버리고 하느님의 창조력인 다바르로 돌아갈 때는 어떻게 될까? 폰 라트에 따르면 진리가 나타난다. 그리고 애정이 나타나고, 하느님이 나타나신다. “창조계는 존재할 뿐 아니라 진리도 발산한다.” 책들만 상상하지 말라. 창조계 자체가 진리의 원천이요 계시의 원천이다. 그것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하듯이, 하느님에 관한 책, 즉 성경이다. 자연 자체가 지질학자 토마스 베리에 따르면 “제 1의 성서”다. 폰 라트는 또 더 나아간다.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인즉 “세계 내의 이 신비로운 질서는 인간에게 말을 건넬 뿐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참된 다바르는 좌뇌(언어, 진리, 인식)일 뿐만 아니라 우뇌(애정, 놀이, 사랑)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도 다바르를 오늘날 “하느님의 말씀”으로 번역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력 배후에 있는 풍부한 의미를 파괴한다. 자연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들을 때, 보들레르의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가 걸어가는 물질적인 것들의 숲
영적인 것들이기도 하여
정다운 눈길로 우리를 바라본다.
하느님의 창조력이 얼마나 풍부한지 눈여겨보라. 우리는 단지 한 숲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진리를 쏟아부어 주는 물질적인 것들의 숲에서 온 삶을 걷고 있다. 그러나 듣고 있는가? 인간 언어의 책에서 머리를 돌려 하느님의 지속되는 창조력을 감지하고 있는가? 이스라엘 하느님의 관심은 자연이 아니라 구원에 있다고 말하려고 애써 온 우리네 많은 좌뇌 중심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을 폰 라트는 놀라게 한다. “창조계로부터 증거가 발산된다는 사상은 오로지 이스라엘에서만 볼 수 있다.” 물론 폰 라트는 아메리카 원주민 전통, 위크 전통, 그 밖의 가부장제 이전의 종교전통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매우 강조하듯이 사실 이스라엘은 그 지혜전통을 통해 창조주와 창조계의 친교를 매우 생동적으로 파악하여, 계시의 원천인 창조계에 대한 독창적인 신뢰를 보여준다. 적어도 이스라엘 당대의 고대 근동 종교 가운데서는 독창적이다. 따라서 그 지혜는 또한 감각적이다. 창조계의 모든 것이 그렇다. 폰 라트에 따르면 “거의 관능적”이다. 그리고 세계의신비들, 현대 과학이 이제야 비로소 베일을 벗기기에 이르고 있는 신비들이 지혜문학 저자들에게서는 그대로 “하느님의 모든 신비들”이다.
이 모두에 무엇이 따르는가? 우리의 영성여행에서 인간적 반응은 무엇인가? 첫째, 모든 사물, 모든 시간, 모든 공간을 통해 흘러나오는 창조력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인 흐름, 하나인 힘, 하나인 신적 말씀이 있다는 인식이다. 우리는 그 흐름의 일부다. 우리는 오만하게 우리의 미약한 말들만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추정하기보다는 그 흐름에 귀 기울여야 한다. 폰 라트는 있는 것을 그대로 사랑하기를, “신비에 접하면서 존재의 영광에 승복하기를” 요청한다.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 “존재의 영광”이 사랑받는 모든 곳에서 창조중심 영성이 발생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있음이 하느님”이라고 말한다. 신적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만유 안에 아름다운 신성(성서가 일컫는 ‘영광’)이 실재한다.
다바르를, 즉 하느님의 창조력을 되찾을 때 창세기 첫 장의 참 의미를 되찾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이 말씀하시니 창조계의 힘찬 존재들, 빛과 어둠, 해와 달이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가 “말”로 옮기는 히브리어 다바르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행위와 행동을 내포한다. 담론이 아니라 성취, 장광설이 아니라 창조다. 창세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이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하느님이 ‘땅에 풀이 돋아나게 하라 ...’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이런 말은 참으로 창조력이니 값싼 무능이 아니다. 여기에 예언자말과의 연결고리도 있다. 예언자 말은 죽음으로 가득한 삶의 방식을 떨쳐버리는 새로운 창조를 요청하는 예언자적 창조력이다. 예언자 말도 하나인 창조력 흐름의 일부다. 그 흐름이 탐욕이나 부패, 권태나 불의에 가로막힐 때 터져 나온다. 다바르는 억눌려질 수 없다. 하느님의 능력은 사신될 수 없으며 창조를 낳는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표현했다. “하느님은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누구도 멈출 수 없는 큰 지하 강이다.” 레오나드 번스타인은 <미사>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지속적 흐름의 의미를 포착한다. 그는 출전 거부 때문에 투옥된 젊은이로부터 받은 편지를 따라 읊는다.
용감한 사나이들을 잡아가둘 수는 있지
용감한 사나이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라지
모험을 모조리 질식시킬 수는 있지
한 세기나 그쯤은 그럴 수도 있지
희망을 솟기 전에 눌러 버리라지
아주까리처럼 시들기를 지켜보라지
그러나 가둘 수 없다네 주님 말씀은
암 가둘 수 없고말고 주님 말씀은
창조력인 하나님의 말씀 다바르는 갇히려 하지 않는다. 오래 붙들려 있지 않는다. 우리의 영성적 과제는 그 말씀이 풀려날 길을 열어 우리가 그 말씀으로 충만해서 치유, 경축, 공동창조함이다. 다바르는 우리 안에 유화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고 말하는 그것, 시원의 지혜, 말들 전의 말씀, 하느님의 창조력이 우리 가운데 사람이 되셨다는 그것이다. 신약성서도 더 히브리적으로, 다른 한편으로 인간 중심적 오만이 덜하게 번역되기 시작한다면 그리스도ㅗ 이야기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나리라. 예컨대 우리 함께 요한복음서 첫 장에 새로이 귀 기울여 보자.
맨 처음에 창조력이 계셨다.
그 창조력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그 창조력은 또한 하느님이셨다.
이분이 맨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어느 하나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창조력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셨다.
그 빛이 세상에 오시어 세상에 계셨다.
세상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지만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다. ...
그러나 그분은 당신을 맞아들인 이들에게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주셨다....
정녕 창조력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에서 천막을 치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으로 충만하고 진리로 충만한
창조주의 외아드님이신 그분의 영광을(요 1:1-5, 9,10,12,14)
참으로 다바르는 능동적이고 상상력과 놀이에 차 있다. 창조중심 영성을 가진 사람은 끊임없이 흐르며 늘 푸르게 펼쳐지는 하느님의 다바르에 민감하고 생생히 깨어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창조계 자체가 으뜸 성사(聖事)다. 하느님의 창조는 과거에 갇히지 않는다. 근본주의자들이 부지중에 왜곡하여 하느님을, 또 따라서 하느님의 창조를 과거에 가두려 하는 바와는 전혀 다르다. 창조는 우리가 그런 것처럼 지속되고 있다. 우리의 체험만큼 광대하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그것 안에 있다. 그것은 우리이고, 우리의 먼 피안에 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증언하듯이 인류는 하느님의 거룩한 다바르가 담긴 독특하게 성사적인 그릇이다.
수백만 년 전에 창조하신 모든 것과
수백만 년 후에, 세상이 그렇게 오래 존속한다면, 창조하실 모든 것을
하느님은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창조하고 계시다.
과거의 모든 것과
현재의 모든 것과
미래의 모든 것을
하느님은 영혼의 가장 내밀한 영역에서 창조하신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