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영성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특징은 죄론의 강조입니다. 세례문답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죄인이라는 고백과 아울러 예수의 보혈을 통한 죄 씻김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죄 문제가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서의 증언이고, 둘째는 우리의 실제적인 죄에 대한 경험이며, 셋째는 죄에 대한 그리스도교 교리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범죄사건 이후로 모든 인간에게는 이런 죄가 유전된다는 교리가 그것입니다. 여기에는 민중을 정치적으로 억압하려는 중세기의 황제와 교황 체제가 한몫 했겠지요.
어쨌든지 죄 문제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 구성요소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벌어지게 된 신앙의 왜곡 현상은 매우 심각합니다. 죄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칙칙하든지 아니면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죄는 그것 자체로 존재론적인 근거가 있는 건 아니라 훨씬 중요한 어떤 사실로 들어가기 위한 통로입니다. 그 사실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이지 우리의 모습에서 은총의 빛은 점점 희미해지고 죄의 어둠은 강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왜곡된 신앙이 제 자리를 잡으려면 은총의 세계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들어가는 문은 창조 영성입니다. 사도신경의 첫 항목을 기억하시겠지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매 주일 이런 신앙고백을 드리면서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창조 신앙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게 도대체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냐, 하고 생각하고 맙니다.
창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시편 104편은 구약성서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묘사된 창조 신앙문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내 영혼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야훼, 나의 하느님, 실로 웅장하십니다. 영화도 찬란히 화사하게 입으시고 하늘을 차일처럼 펼치시고”(시 104:1,2) 시편기자의 눈에 하늘은 이 땅을 안전하게 지키는 차일처럼 보였습니다. 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땅을 주춧돌 위에 든든히 세우시어 영원히 흔들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고대인들은 지구가 둥글다거나 태양 둘레를 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기둥이 땅을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비록 그들의 우주관이 미숙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그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만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야훼 하나님을 찬미하라고 외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고대인들의 창조 신앙이 오늘과 같은 과학, 정보, 유전자, IT시대에도 설득력이 있을까요? 진화론 논쟁을 촉발시킨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 이후로 오늘 이 시대에 다시 한 번 더 창조론의 위기가 닥친 것 같습니다. 150년 전의 진화론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론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진화론은 한정적으로, 어떤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현상에 관한 생물학적, 지질학적 연구였을 뿐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진화론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만 했다면 그렇게 큰 논란거리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오늘의 과학기술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창조론을 위협합니다. 이미 유전자 변형 식품이 유통되었다거나, 앞으로 배아복제 기술을 통한 인간복제가 가능할지 모른다는 실제적인 문제도 심각하기는 하지만, 인간 자신이 이 세상과 삶의 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훨씬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기 확신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신비를 놓치고, 결국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을 더 이상 쓸모없는 뒷방 늙은이나 아니면 퇴물 기생처럼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의 이런 기술만능주의는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비하면 우리의 기술은 흡사 어린아이들의 장난감과 같습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 이 시간에 길게 설명할 생각이 없습니다. 조금만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건 그냥 눈에 들어옵니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말씀드린다면, 인간은 자신들의 기술이 기본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장 일상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동물처럼 빨리 달리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간은 자동차를 발명했습니다. 놀라운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자동차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놓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편리해지기는 했지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 때문에 죽고, 장애인이 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런 현상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는 반문명론자도 아니고 기술 폐기론자도 아닙니다. 다만 그런 힘들이 우리의 모든 삶을 완전히 지배해가는 이런 흐름을 위험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인간의 과학 기술은 그것보다 훨씬 근원적인 하나님의 창조 안에 움직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건 단순히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이 아니라 이 세계를 무엇으로 보는가 하는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차일처럼 펼치고, 땅을 주춧돌 위에 든든히 세운다는 성서기자의 노래가 바로 그런 세계관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세상이 든든하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바로 세상에 대한 신뢰와 긍정으로 이어집니다.
세상
시편기자는 하늘, 땅, 그리고 바다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계에 깃든 하나님의 창조를 노래합니다. 그 세계가 든든하고, 질서가 있으며, 그 안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의 삶이 자연스럽습니다. 모든 식물과 동물과 어류들이 제 각각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세부적인 묘사를 제가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요. 10-13절 말씀만 읽어보겠습니다. “계곡마다 샘물을 터뜨리시어 산과 산 사이로 흐르게 하나니 들짐승들이 모두 마시고 목마른 나귀들도 목을 축입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가까운 곳에 깃들이고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귑니다. 높은 궁궐에서 산 위에 물을 쏟으시니 온 땅이 손수 내신 열매로 한껏 배부릅니다.” 시편기자는 계곡, 샘물, 산, 짐승, 새, 비, 열매 등등의 단어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풍성한 생명을 노래합니다.
아마 이 세상을 시편 기자와는 전혀 다르게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이 세상은 척박하고, 질병이 많고, 노동의 땀을 흘려야 하고, 죄가 많다고 말입니다. 사막과 광야에는 먹을 게 없고, 자연재해로 인해서 많은 사람과 생명체가 죽는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재앙을 막기 위해서 인간은 온갖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말도 가능합니다. 옳습니다. 저도 의학을 통해서 인간이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하고, 아파트를 지어 집 없는 사람들에게 공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를 신뢰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신뢰와 긍정의 눈을 가진 사람은 사막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비록 홍수와 가뭄으로 인한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은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 가득한 생명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과학기술에 종사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창조 사건을 향한 신뢰를 그 바탕에 둘 것입니다. 반면에 이런 신뢰와 긍정이 없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단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깁니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인간 삶의 편리를 위해서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하나의 죽어있는 사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에게 이 세상은 죽어있는 사물이거나 우리가 이용해야 할 대상이거나, 더 나아가 우리를 적대하는 악의 원천이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은 모든 생명들이 나름의 생명을 향유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온갖 생명들이 어울리는 잔치 자리요, 축제 장소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심지어 포악한 바다고기를 대표하는 ‘레비아단’까지도 귀엽게 바라봅니다.(26b절) 얼마나 놀라운 영성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생명의 보고입니다. 시편 기자의 이런 묘사는 단순히 낭만적인 생각이거나 자연주의자의 생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신비주의자라고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와 사물들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가능한 세계관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도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신비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생명의 토대로 보는 것입니다. 농사를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생명의 질서에 참여하는 거룩한 행위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창조의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제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런 창조의 영성을 확보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의 물적인 토대가 강하지만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위해서 그것이 전혀 투자되지 않습니다. 그런 설교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단지 교회 공동체의 확장에만 모든 에너지가 반복 투자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창조의 영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런 영성을 확보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 천착하는 게 가장 바른 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도 그런 과정이겠지요.
저는 앞에서 시편 기자가 이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창조를 신뢰하고 그 신비를 통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창조영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편 기자의 이 신앙에서 또 하나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인간입니다. 창조 및 세상과 연관해서 시편기자에게 인간은 무슨 존재일까요?
인간
본문 11절부터 22절까지 잘 보십시오. 여기에는 수많은 동식물들이 등장합니다. 들짐승, 나귀, 새들, 짐승, 포도주, 기름, 양식, 송백, 황새, 오소리, 온갖 짐승, 사자들이 제 각각의 역할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달과 해도 이런 전체 생명 질서의 한 대목입니다. 21-23절을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사자들은 하느님께 먹이를 달라고 소리 지르며 사냥을 하다가도 해가 돋으면 스스로 물러가 제 자리로 돌아 가 잠자리 찾고, 사람은 일하러 나와서 저물도록 수고합니다.” 시편 기자의 노래에 따르면 인간도 역시 다른 동물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창조의 생명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숲 속의 사자가 먹이를 잡고 있을 때 인간은 자고, 사자가 숲으로 돌아갈 때 인간은 노동합니다. 노동의 시간과 방식은 다르지만 전체적으로는 결국 하나님의 창조에 상응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도 기본적으로 다른 생명체와 똑같이 이 세상, 즉 하나님의 창조 사건 안에 들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라고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일하러 나와서 저물도록 수고합니다.”(23절) 시편기자의 인간이해입니다. 하루 종일 노동해야 하는 존재가 곧 인간인데, 이것은 다른 동물도 똑같습니다. 사자가 사냥을 하듯이 인간도 노동하고, 사자가 먹어야 하듯이 인간도 먹어야 하고, 그들이 배설하듯이 인간도 배설해야 합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똑같다는 말이냐, 기분 나쁘다, 억울하다,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오늘 우리는 인간이 특별하다는 생각으로 생존에 필요한 것보다 훨씬 넘칠 정도로 생산하고, 과소비하고, 심지어는 대량살상무기를 만듭니다. 시편기자가 묘사하고 있는 그런 창조의 세계와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곧 창조의 훼손이 아닐까요?
물론 하나님이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이 동물들과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영적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인 ‘루아흐’는 바로 생명의 영입니다. 우리가 영적이라는 말은 곧 이 세상에서 생명 지향적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인간을 포함한 모든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창조 행위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계 안에서는 인간만 중요한 게 아니라 모든 생명들, 강과 산까지 모든 것들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사람은 시편 기자가 1절과 마지막 35절에서 노래하듯이 “내 영혼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하는 영혼의 노래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24절 참조) 이 세상을 창조하신 야훼 하나님과 그가 창조한 세상을 신뢰하고 긍정하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생명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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