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창조절 일곱 번째 주일, 2017년 10월15일
1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오늘 설교 본문인 마 22:1-14절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신 여러 말씀 중의 한 대목입니다. 성전 안에서 행하신 말씀은 마 21:23-23:3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과 그 일행에게 적의 소굴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층 인사들과 여러 번 충돌하셨습니다. 따지고 보면 시비는 예수님이 먼저 거셨습니다. 마 21:12절 이하에 따르면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성지 순례 차 온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매매하는 이들을 내쫓으시고 환전상들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도발이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왜 이런 행패를 부리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 비유’(마 21:33-46)를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포도원 주인의 종들과 아들을 죽인 악한 농부들이며, 하나님이 당신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대목을 저는 지난주일 설교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오늘은 그 비유에 이어서 나오는 ‘혼인 잔치 비유’를 설교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이 이야기도 역시 대제사장, 장로, 바리새인 등,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한 비판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
이 비유는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임금 아들의 결혼식이라면 사적인 일이 아니라 국가적인 일입니다. 이 결혼식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왕족과 귀족, 고급 관료, 그리고 외국에서 오는 사절들만 초대받습니다. 이 임금은 그런 관례를 깨고 일반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를 초청했는지 모릅니다. 초청장은 이미 앞서 보냈습니다. 결혼식 당일이 되어서 종들을 하객들에게 일일이 보냈습니다. 하객들이 타고 올 가마나 마차도 보냈겠지요. 초청받은 사람들은 궁으로 들어가야 하니 멋진 옷을 차려 있고 종들을 따라나섰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임금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임금은 뭔가 메시지가 잘못 전달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재차 종들을 보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게 했습니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초청받은 사람들은 이번에도 역시 거절했습니다. 반응이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일부 사람들은 임금의 말을 외면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일하러 갔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자기 사업을 하려고 자리를 떴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또 일부의 사람들은 임금이 보낸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은 군대를 보내서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살랐다고 합니다. 정말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임금은 종들에게 다시 명령을 내립니다. 처음 초청받은 사람들은 잘못되었으니 큰길에 나가서 아무나 데리고 와서 잔치 자리를 채우라는 겁니다. 임금의 명령에 따라서 종들은 큰길에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잔치 자리에 손님들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잔치를 시작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반전이 일어납니다. 임금은 잔치 자리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을 발견하고 왜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대답을 못하자 그들을 내쫓았습니다. 임금의 행태가 짜증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 비유는 파격적이고 과격합니다.
누가복음 14:15-24절에 똑같은 비유가 나옵니다. 이야기 진행이 부분적으로 마태복음과 차이가 납니다. 몇몇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누가복음 이야기에서 잔치를 연 사람은 임금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초대한 걸 보면 돈은 좀 많은 사람이겠지요. 막상 잔치가 열리자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거절했습니다. 이건 마태복음 이야기와 같습니다. 한 사람은 새로 구입한 밭에 나가봐야겠으니 양해해달라고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소 열 마리를 사서 시험하러 나가봐야겠다고 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장가들어서 초대에 응할 수 없으니 이해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태도는 마태복음의 나오는 사람들과 달리 정중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초대받은 사람들의 일부가 자신들을 데리러온 종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만 누가복음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예복 이야기도 누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이야기 전개 방식이 부분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근본 주제를 다루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잔치에 처음 초청을 받았던 사람들은 초청을 거절했고, 초청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결국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었고, 누가복음은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2천 년 전 마태복음을 읽던 독자들만이 아니라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이야기를 읽는 우리도 누가 잔치에 초청받았지만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고, 누가 나중에 들어간 사람들인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이 전자에 속하고 기독교인들이 후자에 속합니다. 당시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대상들이 누군지를 보면 전자에 속한 이들이 누군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 장로, 바리새인, 율법학자와 사두개인들이 바로 전자에 속한 이들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엘리트 집단입니다. 그들은 임금의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이지만 온갖 핑계를 대고 초청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종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들을 배격했습니다. 그런 전통에 의해서 그들은 급기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이 비유는 남의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이미 잔치에 들어온 사람이라고 자처합니다. 그렇게만 보면 곤란합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누가복음과는 달리 예복 문제를 거론한 것도 예수님의 이 비유가 단순히 유대교와 그들 엘리트들만 비판하려는 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처음에 초청받았다가 거절한 이들과 나중에 잔치에 들어왔지만 예복이 없어서 쫓겨난 이들은 모두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그것을 마 22:12,13절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이 비유가 너무 야박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까짓 예복 문제로 잔치에서 내쫓고 결박해서 어두운 데에 던지라는 말은 우리의 상식에 맞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진리를 빗대서 말하기 위한 비유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잔치로서의 하늘나라
이 비유의 배경은 결혼 잔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묘사할 때가 많습니다. 종말 때에 신부인 교회는 신랑인 예수님을 만나 공중에서 거룩한 혼례식을 거행하게 될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죽었다고 생각한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형은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아버지에게서 책망을 듣습니다. 잔치는 기쁨과 평화와 안식이 가득한 순간입니다. 먹을 것도 많고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야말로 생명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임금의 잔치에 오라는 말은 하나님이 은총으로 베푸시는 기쁨과 평화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입니다.
처음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그 초청을 외면했습니다. 적극적으로 거부했습니다. 더 나가서 종들을 죽임으로써 초청 사건자체를 말살시켰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습니다. 각각 사정도 이해가 갑니다. 일상이 얼마나 분부합니까. 그리고 그것 나름으로 얼마나 소중하고 재미있습니까. 그런 모든 사정보다 더 핵심적인 이유는 그들이 잔치의 기쁨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잔치의 기쁨을 그들이 알았다면 만사를 제쳐놓았을 겁니다. 잔치의 기쁨을 모르니 그들은 다른 일에서 재미를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재미가 바로 밭일이고, 사업이었습니다.
이 비유가 가리키는 잔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기독교인들이라면 답을 알고 있을 겁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복음의 기쁨이고 안식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나옵니다. 그리고 잔치의 기쁨과 평화를 경험하고 얻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게 실질적으로 뭔지, 그리고 그걸 경험했는지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막연하니까 신앙생활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존이 지루해집니다. 더구나 세상살이가 우리를 정신없이 휘몰아치기 때문에 잔치의 기쁨과 평화는 점점 더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변칙에 빠지기도 합니다.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다는 것을 기쁨의 근거로 여깁니다. 열광적인 예배에 몰입함으로써 얻게 되는 자기 초월 경험을 삶의 기쁨과 평화라고 여깁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기쁨과 평화를 맛볼 수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뭔가를 성취했다는 자기 만족감, 심리적인 상처의 고통이 진통제를 먹음으로써 줄어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것만을 목표로 한다면 굳이 교회에 나올 필요는 없겠지요. 사업 열심히 해서 성공하면 되고, 대중가요 콘서트장이나 프로 야구가 벌어지는 운동장에 가서 흥겹게 놀다 오면 되고, 또는 여러 종류의 힐링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됩니다. 일종의 교양과 취미생활이라 할 수 있는 이런 것들은 다 세상살이에서 쓸모가 있는 것들입니다.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여러분들도 그런 활동에 참여하기 바라지만, 성경이 말하는 천국 잔치는 그런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걸 모르면 영혼이 궁핍해집니다.
이런 문제는 기독교 역사에서 확인됩니다. 마태복음을 비롯해서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시절의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종교적인 교양이나 취미로 생각했다면, 이런 태도는 당시 로마 사람들이 견지하던 것인데, 굳이 유대교로부터 떨어져 나올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역사와 전통이 깊었던 유대교 안에 머무는 것이 훨씬 더 세련된 종교인의 모습을 취하는 길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와 근원적인 차이점을 세월이 가면서 더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더 착하냐 아니냐, 누가 더 인격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교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에 속한 사제이며 신학자로서 더 이상 구원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기쁨과 평화와 자유를 확보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대충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처했지만 루터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구원 문제는 자신의 모든 운명을 걸어야만할 절대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절대 생명 경험
현대 기독교인들은 임금의 초대를 거절한 손님들과 비슷한 태도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귀찮은 존재로 떨어졌습니다. 잔치에 가지 않아도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습니다. 밭에도 나가봐야 하고, 소도 돌봐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사업도 해야 합니다. 일상의 과잉이 현대인들의 특징입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일상을 제쳐놓고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역설적으로 일상의 과잉은 일상을 오히려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에게만 삶의 모든 의미를 걸어두는 현대인들은 허무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시 일상에 자기 삶을 과도하게 불태웁니다.
‘욜로’라는 말을 얼마 전에 처음 들었습니다. 미국의 어떤 래퍼의 노랫말에 처음 등장한 단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You Only Live Once’, 즉 ‘당신은 오직 한번 인생을 사는 거야’라는 문장의 머리글자를 딴 것입니다. 한 번뿐인 자기 인생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현재 최대한 즐기겠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현재의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여김으로써 자기의 이상을 실현해보자는 것입니다. 노후를 준비하려고 지금 쪼들리더라도 절약해서 저축하지 않습니다. 번듯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퇴직금을 받아서 세계 여행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부모들 세대의 삶에서 허무를 느끼는 젊은이들이 택한 삶의 방식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일상의 허무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낭만적이고 의미 충만할 거라고 여기는 여행마저 지겨운 순간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양이 아니고 취미생활도 아닙니다. 절대적인 생명을 향한 강렬하고 거룩한 욕망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말하면 구원을 향한 열망입니다. 여러분이 흔히 들었던 이야기지만 실질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돈만 좀더 있으면 만족스럽고, 건강이 더 좋아지면 행복하고, 자식들이나 잘 되면 좋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서 재미있게 살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예수가 생명이라는 교회 용어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 떨어지는 이유는 세상살이에서의 잘못된 학습 때문입니다. 서로 경쟁하고 소유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 외에는 더 이상의 것을 찾지 않게 하는 학습이 우리 몸에 배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더 착하고 똑똑하고 정의롭게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학습입니다. 그런 상황을 오늘 본문은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묘사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무엇인지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게 더 큰 불행입니다.
인생이 한 번뿐이라서 특별히 소중하다는 생각은 누구나 합니다. 그런 생각은 옳습니다. 그 소중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잔치에 청함 받은 사람은 많지만 택함 받은 사람은 적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구에서 살도록 청함을 받았지만 모두가 기쁨과 평화의 삶에 참여하도록 선택받지는 못했습니다. 이게 누구 책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바로 그런 삶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를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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