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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 10월16일

http://wms.kehc.org/d/dabia/1016.MP3http://wms.kehc.org/d/dabia/1016.MP32005. 10.16.       마 22:15-22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

세금논쟁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으니까 모든 사람들을 그대로 용납하시고, 무슨 일이든지 다툼을 피하셨을 거라고 생각하면 예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싸움을 거시는 일이야 있을 수 없겠지만, 그리고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구축하기 위해서 논쟁을 벌이지는 않으셨지만 ‘진리’ 문제에서는 결코 뒤로 물러서신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자주, 가장 본질적으로 논쟁을 벌인 사람들은 주로 종교전문가이며 신학자들이라 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입니다. 마태복음 22,23장은 주로 이들과의 사이에 벌어진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중의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에게 와서 질문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17절). 이들의 질문 방식은 매우 진지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교활합니다. 일단 그들은 질문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그럴듯한 말로 추켜세웠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16절). 사람을 판단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더라도 겉으로는 매우 세련된 말을 하는 존재가 곧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매우 호의적으로 말을 걸면서 실제로는 예수가 이 말에 걸려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질문이 올무인 이유는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시빗거리가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내야한다고 대답하면 로마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며,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면 실정법을 어긴다는 비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를 진퇴양난에 빠지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위치를 허물어버릴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려는 게 그들의 노림수입니다.
그 당시에 이 세금 문제는 좀 심각한 현안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AD 6년에 갈릴리 지역에서 로마 정권에 세금을 내지 말자는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났으며, 그것이 결국 무장봉기로까지 발전되었습니다. 로마 정권은 식민지의 문화와 종교를 완전하게 보장했지만 로마 체제를 흔드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정권이 유지되기 위해서 가장 요긴한 세금을 거부하는 행위에 대해서 그들은 일벌백계 식으로 다스셨습니다. 로마 정부는 당연히 정규군을 파병해서 갈릴리 무장봉기를 제압했습니다.
그런 사건으로 발전하기 전이나 후에도 유대인들에게 이 세금 문제를 민감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민족도 아니고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 정부에 세금을 낸다는 사실을 얼마나 수치스럽게 생각했을는지는 불문가지입니다. 오죽 했으면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멸시받는 집단이 세리와 죄인이었겠습니까! 그들에게 세리는 그야말로 반민족주의자, 매국노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말 한 마디 잘못했다는 완전히 왕따 당할지도 모릅니다.

데나리온 동전
성서는 이런 바리새인들의 속셈을 예수님이 알아채셨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참으로 난처합니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말입니다. 간혹 저도 그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동정녀 탄생을 믿는지 대답해 보라든지, 진화론을 받아들이는지 대답해 보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것 자체에 대해서 실제로 알고 싶다는 게 분명하다면 사실대로 말하지만, 그게 아니라 어떤 문제를 걸고넘어지기 위해서 질문하는 게 분명할 때는 많이 망설여집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일당에 해당되는 데나리온을 한 닢을 갖고 왔습니다. 그 동전은 디베리우스 가이사의 것인데, 뒷면에는 가이사의 어머니 리비아가 평화의 여신 모습으로 주조되어 있었으며, 앞면에는 가이사의 두상과 함께 “신적인 아우구스도의 아들, 가이사”라는 글씨가 새겨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20절).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21절).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이 결론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부분에서 매우 중요한 경구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21절).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트집 잡으러 왔던 바리새인들이 ‘경탄하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뭔가 한판 크게 붙을 것 같았는데, 일이 아주 싱겁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그렇게 간단하게 설득 당했다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바리새인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리라는 이 예수님의 답변이 바리새인들을 완전하게 만족시켰을까요? 아마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렇게 보충 질문을 던졌을 겁니다. 예수님, 도대체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월급에서 원천 징수되는 것은 곧 카이사르의 것이고, 교회에 내는 헌금은 하나님의 것인가요? 학생들 중에서도 이렇게 짓궂게 질문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런 질문이 좋을 수도 있고,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질문을 위한 질문이 아니라면 질문은 어떤 경우에도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질문하는 나에게 뭐라고 대답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경제학자도 아니고 사회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나의 질문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설명한다 하더라도 이런 정도겠지요. 그런 건 당신 스스로 생각해야지 그런 까지 내가 어떻게 알려줄 수 있소. 그런 질문은 내가 대답할 일이 아니라 다른 학자들이 할 일이오. 나는 단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는 말만 할 수 있소.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대답을 여러 가지로 해석합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것 같은 질문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헤쳐나간 걸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머리가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진리를 근원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흠집을 찾아보려고 해도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건 머리가 좋은 것과는 좀 다른 차원입니다. 그리고 시사토론의 패널처럼 예수님이 말을 잘했다는 사실을 오늘의 본문에서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카이사르와 하나님, 세상과 교회,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을 완전하게 구별할 수 있다는 지침일까요? 모르긴 해도 지난 2천년 역사를 통해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 말씀에 근거해서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게 정당하다고 주장했을 겁니다. 특히 황제와 교황이 양극 체제로 발전해온 유럽에서는 국가에 내는 세금과 교회의 헌금이 서로 간섭하지 않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는데, 아마 여기서 이 구절이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겁니다. 실제로 마틴 루터의 ‘두왕국론’은 카이사르와 하느님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속 질서와 영적인 질서를 완전하게 이원론적으로 구분했습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생각을 따르고 있을 겁니다. 세상과 교회는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어 있으니까 서로를 간섭하지 말고 자기의 영역에서 충실하면 된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하다는 바울의 주장(롬 13;1)도 역시 이런 생각에 일조를 합니다.
이에 반해서 칼빈은 세속 질서를 교회의 질서 안으로 복속시켰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제네바를 신성통치 도시로 만들려고 독재정치를 시도했습니다. 지난 총선에서는 기독교를 구체적으로 표방한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서 대형교회가 목회자들이 앞장섰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겠지만, 요즘 한국교회 일부에서 ‘뉴라이트’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약간 씩 색깔을 달리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칼빈의 이런 그리스도 왕국론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이 현실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겠다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서로 간섭하지 않는 마틴 루터가 옳거나, 아니면 그것을 일치시키려는 칼빈이 옳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루터의 전통을 이어받는 독일교회가 결국 히틀러 가능하게 했으며, 칼빈의 신성통치는 제네바에서 성직자 독재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 어느 것도 대답은 아닙니다. 더구나 이런 다원화 시대에 기독교가 구체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낭만적이고 무모한가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이 생태계의 파괴, 남북분단의 고착화, 사회의 양극화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방기하는 집단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카이사르의 폭력, 십자가
결국 이 문제는 이 세상의 문화와 종교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오늘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의 관점에서 이런 이 문제를 풀어야 할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이 세상을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문화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하는 걸까요? 루터입니까, 칼빈입니까? 두 사람 모두 부분적으로 옳고, 부분적으로 틀렸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루터나 칼빈 모두 자기들이 살아가던 그 시대에 가장 적절한 답을 찾았지만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유효한 건 아닙니다. 우리는 루터와 칼빈을 참고하고, 결국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의 대답은 5백 년 전의 루터나 칼빈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로마법에 따라서 세금을 내고, 율법에 따라서 헌금을 내면 된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구분되는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이 세상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기본적인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유지되고 보존되고,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마당에 어떻게 카이사르의 것을 따로 구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것을 따로 돌려드린다는 말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이런 문제는 본문만으로는 적당한 대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다른 가르침이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예수에 대한 인식에 근거해서 윤곽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카이사르의 것이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카이사르의 것을 인정하는 듯이 말씀한 이유는, 혹은 그런 근거는 하나님의 나라는 카이사르의 방식으로 성취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반어적 확증입니다. 카이사르는 권력을 움켜잡아서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인간들의 욕망인데, 이것과 하나님의 통치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사랑은 공장에서 생산해내는 게 아니라 사랑 스스로의 능력으로 우리를 찾아오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카이사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이게 분명하다면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주어버리는 게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이상하게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카이사르를 대리하는 빌라도 총독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카이사르와 아무런 상관없는 하나님의 통치에만 집중하셨던 분이 왜 카이사르에 의해서 죽었을까요?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돌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변증법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도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카이사르의 형식적 권위를 인정하지만 신적인 권위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이런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목표를 넘어서 새로운 힘에 의해서 살아가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세상과 대결하는 사람들이 곧 기독교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와 고난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태복음 22: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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