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7. 이사야 9:1-4
오늘 설교의 본문은 이사야 9:1-4절입니다. 기원전 8세기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이사야에 의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자그마치 2천7백년도 더 오래 된 말씀입니다. 몇 백 년 전의 텍스트도 따라가기 힘든 마당에 2천7백년이라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다르게 생각하겠지요.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온다고 말입니다. 지금도 그 말씀은 꿀처럼 달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는 건 아닌지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대충 어림짐작으로 좋은 말씀이겠거니 하고 여길 뿐이지 실제로는 잘 모르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시간에 차이가 많이 난다는 점만이 아니라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이 처한 삶의 자리가 지금 내가 처한 삶의 자리와 너무 다르다는 점에서도 역시 오늘의 본문을 가깝게 느끼기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이사야 시대는 아주 어려웠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날지, 언제 가족이 해체될지, 언제 먹을거리가 떨어질지 가슴 조마조마하게 지내야만 했습니다. 탐관오리들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기원전 735년에는 시리아(아람)이 북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고 남 유다를 침공하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그 당시 사람들은 내우외환에 지독히 시달렸다고 보아야 합니다. 매 순간마다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향한 이사야의 예언은 오늘 우리에게 좀 낯설게 들립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사야 시대와 마찬가지로 삶에 지쳐 있는 건 분명합니다. 한국의 경제가 전체적으로는 꾸준하게 성장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 뒤에 몇 사람이 목숨을 끊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경제에 올인 하겠다는 후보가 당선된 걸 보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고통을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다고 하더라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기준으로만 말한다면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보다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 시대가 오죽했으면 이사야가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 또는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1절)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우리는 이사야 시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겉으로 안다고 해도 그들의 절망을 몸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이게 바로 오늘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사는 우리의 딜레마이며 한계입니다. 여기서 어찌 해야 하나요? 성서를 건성으로 대하고 지나쳐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마 상당히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성서를 대할 겁니다. 저의 딸들에게서도 그런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성서에서 삶의 리얼리티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성서에 마음이 갈 리가 없으며, 그것을 해석하는 설교에 귀가 따라갈 리가 없습니다. 이런 건 제 딸들만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의 경우에도 비슷할 겁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과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이사야의 주장이 얼마나 절실하게 느껴지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캄캄한 땅
이사야가 말하는 캄캄한 땅은 분명히 그 당시에 벌어졌던 경제, 정치, 사회적인 고통을 뜻합니다. 사회적인 불의와 외세의 침입, 경제의 불평등 같은 조건들을 가리킵니다. 만약 이 말씀을 그런 방식으로만 접근하면 우리는 이 말씀의 궁극적인 의미로 다가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로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사야 시대의 그들이 겪었던 삶의 형편이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의 형편을 우리의 형편에 짜 맞출 수는 없습니다. 지난날 미국에서 노예로 살던 사람들의 조건을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런 정치, 경제적인 조건들이 충족된다고 해서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처럼 외세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고, 경제적인 부를 쌓게 된다면 그들이 참된 행복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 당시의 이야기가 너무 멀다면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바꿔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살림살이가 두 배로 좋아진다고 해도 조금 편리해질 뿐이지 근본적으로 달라질 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장애인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장애는 단지 불편할 뿐이지 나에게서 행복을 빼앗지는 못한다. 경제적인 조건이나 신체적인 건강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한 이런 조건들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의 근본 생명이 새로워지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이라는 이사야의 말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나요? 캄캄하다는 말은 절망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제 각각 절망을 다르게 경험합니다. 지금 이사야가 예언을 선포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은 정치, 경제적인 절망을 느꼈지만 모두가 그런 종류의 절망만 느끼는 건 아닙니다. 학문적인 성과를 이루지 못하거나, 과학 연구에 실패하거나,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못할 때 절망을 느낍니다. 실연을 당하는 사람들도 역시 절망합니다. 심지어 주식투자에 실패해서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런 삶의 과정에서 절망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일로 절망하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이 질문은 역설적인 것입니다. 이런 일이 실패하지 않고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와 완전히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는 뜻입니다. 성공으로도 완전히 만족할 수 없다면 실패했다고 해도 역시 절망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많은 일들로 인해서 절망합니다. 이 세상을 캄캄하게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왜 우리는 절망하나요? 왜 세상이 캄캄해질까요?
우리가 생명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만약 우리가 온전한 생명에 참여했다면 그 어떤 상황에 접한다고 하더라도 캄캄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자주 예로 드는 어린아이들을 보세요.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그 아이들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캄캄한 세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에게 어머니는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없다면 그때 그 아이들은 캄캄한 세상을 경험하겠지요.
이 지점에서 여러분은 오늘 설교의 결론을 이미 짐작하셨을지 모르겠군요. 우리의 생명인 예수님을 믿어야만 우리는 캄캄한 세상에서 빛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결론 말입니다. 이건 옳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미 신앙의 깊은 경지에 오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실 겁니다. 여러분이 신앙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과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 믿지 못할 때도 많을 겁니다. 여러분이 어느 순간에 이 세상을 캄캄하게 경험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런 부족한 믿음을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믿음 없음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와 믿음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를 드려야합니다. 믿음도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살아가는 한 이런 부족한 믿음의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생각도 의지도 없이 제 멋대로 살아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령에게 온전히 의지하는 삶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명의 원천인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줄 모른다는 데에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생각조자 하지 않는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겠군요. 이미 우리가 이렇게 생명을 누리고 있으니까 그것이 당연한 것인 양 생각할 뿐입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이 산소를 마실 수 있으니까 산소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말입니다. 정수기 꼭지만 틀면 깨끗한 물을 마시면서 결국 물의 존재론적 소중함을 모르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지구 안에서 먹고, 마시고, 숨 쉬는 걸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생명조차도 자기가 당연히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큰, 결정적인 착각입니다.
성서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만이 바로 우리 생명의 창조자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게 너무나 뻔한 이야기처럼 들리나요? 공자 왈 처럼 들리나요? 또는 반대로 이게 잘 믿어지지가 않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생명을 살면서도 사실은 생명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생명을 우리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오고 싶어서 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죽고 싶다고 죽는 게 아닙니다. 물론 자살하는 사람들은 있지요. 그들은 하나님이 주인인 생명을 자기가 처리하려다가 결국은 모든 걸 망치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생명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삽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확대하는 것만을 삶의 목표로 삼습니다. 삶의 확대가 오늘 어떻게 나타나는지 잘 아시지요? 모든 삶의 가치들이 수치로 측정되고 계량됩니다. 아파트 값이 바로 삶의 의미처럼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으니까 제가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문제는 이런 자기 확대를 통한 삶의 확인이 결국은 우리의 삶을 캄캄하게 만든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듯이 살면서 자신이 세운 인생의 로드맵에 조금만 이상이 생기면 캄캄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삶이 얼마나 건조하고, 얼마나 경쟁적이고, 얼마나 공격적이고, 얼마나 자기 파괴적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캄캄한 땅에 사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빛은 하나님이 주시는 무한한 기쁨, 넘치는 즐거움입니다. 그 즐거움은 곡식을 거둘 때의 즐거움 같고, 전리품을 나눌 때의 기쁨 같다고 묘사했습니다.(2절) 쌀독에 쌀이 다 떨어져갈 때 추수를 한다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셋방살이 하는 집의 자녀가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첫 월급을 탔을 때의 기쁨과 비슷하겠지요. 우리는 이사야의 이런 예언을 통해서 그 당시의 예루살렘 민중들이 얼마나 고단하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3,4절에서 이사야는 이들이 거의 노예나 포로 신세였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혹사하는 사람의 채찍을 꺾으시고, 이들을 짓밟던 군화를 불에 사른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 앞에서 정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빛으로 경험한 그런 것은 얼마 지나면 다시 시들해진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걸 말하고, 오늘 우리의 삶도 그걸 말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그 구원의 빛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하나님이 빛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이사야의 예언은 정당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 마태복음 4:12-17절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하는 그 장면에 관한 진술입니다.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마태는 그 순간을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나눈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설명했습니다.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이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마 4:16) 구약 이사야의 예언이 이제 복음서에서 새로운 의미로 심화되었습니다. 참된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이사야와 마태가 함께 전하는 어둠, 죽음이 그늘진 땅, 캄캄한 땅은 반드시 초라한 인생에게만 어울리는 표현이 결코 아닙니다. 화려한 인생이라고 해서 여기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공한 인생, 화려한 인생들의 삶이 더 캄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성취한 것을 보존해보려고 안간힘을 쓰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아무런 빛이 필요 없는 것 같이 화려할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캄캄한 땅이 숨어 있습니다. 이건 단지 개인의 부끄러움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위로 올라갈수록 사실은 생명으로부터 더 멀어질 위험성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참된 빛이 있어야만 생명을 얻습니다. 여기에는 초라한 사람이나 화려한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사실을 지난 2천년동안 가장 중요한 신앙으로 삼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의 역사에 한 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세상의 빛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빛입니다. 예수님이 빛이라는 말은 그분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그분에게 부활의 빛이 임했습니다. 그에게서 죽음이 극복되었습니다. 그 부활의 빛이 여러분의 캄캄한 삶을 비추어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은 주현절 후 셋째 주일입니다. 그 뜻은 현현, 즉 나타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세상은 이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예수님을 통한 생명의 빛과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가짜 빛입니다. 더 감각적이고, 더 짜릿하고, 더 권위가 있어 보여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는 한 가짜입니다. 참된 생명의 원천인 예수님만이 여러분에게 참된 구원의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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