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말씀
요 1:1-14, 성탄절, 2016년 12월25일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지금 여러분들은 인생의 시간표에서 어디 쯤 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초반인 경우가 있고, 중반이나 후반인 경우도 있겠지요. 어느 위치이든지 모든 인생의 시간표가 결국 끝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끝이 있다는 말은 곧 시작도 있다는 뜻입니다. 시작과 끝이 바로 우리 인생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입니다. 인생을 가장 의미 있게 살려면 시작과 끝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근원적인 시작과 근원적인 끝을 삶의 중심에 둔다는 뜻입니다. 한 개인의 시작과 끝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시작과 끝, 더 나가서 우주 전체의 시작과 끝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원(始原)에 대한 생각입니다. 시작과 끝은 너무 거리가 멀어서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또 생각해봐야 알 수도 없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에 머물러 있으면 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깊이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태초와 종말의 하나님, 즉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계 21:6)이기 때문입니다.
태초
오늘 제3독서인 요 1:1-14절은 바로 그 태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은 장엄한 문장으로 그 태초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문장에서 ‘태초’는 ‘아르케’라는 헬라어의 번역입니다. 아르케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헬-영 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beginning, first, origin, ruling power. 아르케는 모든 사물이 있기 전의 어느 때를 가리킵니다. 구약성경 헬라어 번역인 ‘70인역’ 창 1:1절에도 나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저는 성경구절을 읽을 때마다, 시를 읽을 때 시인의 마음을 알고 싶은 것처럼 그것을 쓴 사람과 그것을 받아본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사람은 ‘태초’라는 단어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었을까요? 구약성경이 구전되고 기록되던 시대의 물리적 지식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별과 태양, 그리고 폭풍과 지진과 화산폭발, 또한 세포와 원소의 물리적 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물리적 현상에 대한 직관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이 흐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들의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말입니다.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던 왕도 죽고, 영원하게 보이던 제국도 망합니다. 모든 것들이 지나가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그 모든 것의 근원과 최후를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아르케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그 태초가 궁금합니다.
태초를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세상살이가 너무 바빠서 아르케를 생각한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라고 말입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태초, 즉 시원에 대한 생각은 단지 철학자나 과학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평범한 모든 사람들에게 일상적으로 해당됩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시원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는 수없이 들 수 있습니다. 소리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금 저의 설교를 여러분들이 귀로 들을 수 있는 이유는 공간 안에 공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공기의 떨림이 없으면 소리도 없습니다. 진공에서는 소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공기의 떨림은 시원적인 현상입니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것도 시원적입니다. 눈으로 뭔가를 보려면 빛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태초에 빛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보는 것으로 우리는 태초와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이외의 다른 모든 감각도 궁극적으로는 똑같습니다. 작은 사물 하나도 근본적으로는 시원적입니다. 저는 매월 첫 주일 성찬식을 집행할 때마다 그런 것을 경험합니다. 성찬대 위에 놓인 빵과 포도주는 싼값으로 구할 수 있는 흔한 사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왔는지를 생각하면 아득합니다. 빵과 포도주는 오늘의 물리학이 빅뱅이라 부르는 태초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감각이 진부해져서 그렇지 예민하게 열리기만 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태초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창세기 기자의 마음도 지금 우리와 같습니다.
로고스
요 1:1절은 문장이 셋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존재했다. 2)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이 세 문장을 하나로 묶으면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존재했다.’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의 번역입니다. 로고스는 말, 언어, 가르침, 이성, 근거라는 여러 뜻이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의 기본 개념이 이 로고스에 들어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은 코스모스라 불리는 세상이 조화롭다고 보았습니다. 이 조화로운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로고스라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로고스가 신(神)이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로고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로고스로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했다는 겁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그 태초의 로고스가 인류 역사에 들어온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 1:14절은 그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구절이 바로 그 유명한 성육신 신학의 성서적 근거입니다. 말씀, 즉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육신은 헬라어 사르크스의 번역입니다. 살과 뼈, 오장육부로 구성된 우리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영육이원론에 빠졌던 사람들은 육체를 낮춰보기도 했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사르크스는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까지 포함된 단백질로서의 육체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었다는 위 구절에 따르면 육체는 결코 낮춰볼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구체적으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삶의 토대입니다. 사르크스가 있기에 우리는 보고 듣고 말하고, 그리고 커피 향을 냄새 맡고, 촉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이런 육체를 갖고 살았다는 사실을 과감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 육체를 지닌 예수의 영광이 바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 신학입니다.
요한복음의 성육신 신학을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지녔던 예수님이 태초의 로고스라는 말에 동의하는지요? 더 직접적으로 질문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 즉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요한복음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는지요? 세상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일 겁니다. 인간이 어떻게 신(神)이 될 수 있냐, 하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를 비롯해서 열두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뭔가를 크게 착각한 것일까요? 사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한계가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다른 점이 많았지만 인간적 한계라는 점에서는 비슷한 점이 더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수난전승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마 27:46)를 외칩니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외침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측은하게 여겨 잠시 고통을 면케 해주려고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하자 또 다른 사람들이 엘리야를 부르는 거 같으니 두고 보자면서 포도주를 주지 못하게 합니다. 마태복음은 이런 작은 해프닝을 전한 다음에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마 27:50). 이런 장면은 많은 이들을 실망시킬 겁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거라면 당연히 ‘우리 승리하리.’라는 노래를 불러야 마땅한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늘 당당하고, 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사람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카리스마만으로 본다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았습니다.
생명의 빛
요한복음 기자가 예수님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좀더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거기에 우리는 위의 질문에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 1:3절은 로고스인 예수님을 통해서 만물이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2천 년 전에 살았던 예수님을 태초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만물이 그를 통해서 만들어졌다는 것도 이상하게 들립니다. 요한복음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요 1:4절을 이렇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은 예수가 생명의 빛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게 분명하다면 예수는 태초의 말씀이라는 말이 성립됩니다. 태초는 궁극적으로 생명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요한을 비롯해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생명의 빛으로 경험한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이건 바로 우리에게도 직접적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런 경험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통한 생명 경험이 없다면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선 우리가 생명을 상실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아주 소박하게 말하면, 지금 많은 이들이 근심, 걱정, 염려, 불안에 휩싸여 있습니다. 또는 허무와 절망에 휩싸여 있습니다. 끝없는 경쟁심으로 마음이 불편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보면 이런 현상을 좀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곳곳이 전쟁터와 같습니다. 생명 파괴와 훼손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죄라고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으니 그 무엇으로도 생명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도 생명 충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분리가 해결되어야만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통해서만 그것이 해결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를 생명의 빛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경험에 근거해서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직업과 가족과 재산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왜 나에게는 없나, 하고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걱정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영혼의 깊이에서 존경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게 선생님일 수도 있고, 예술가일 수도 있고, 시인이나 소설가일 수도, 가수나 영화배우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절대적인 존경은 대개 종교적 성격을 띱니다. 티베트 불교도들은 달라이 라마를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으로 여길 것이고,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을 그런 대상으로 생각할 겁니다. 그런 대상과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 순간에 사람들은 자신을 초월하는 경험을 합니다. 평화와 기쁨으로 자기의 삶이 충만하게 되는 걸 느낄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아주 특별한 존재로 경험했습니다. 위에서 예로 든 인물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예수가 죽어서 땅에 묻혔는데도 어느 때부터 예수를 살아있는 자로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부활의 예수 안에 있으면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를 생명의 빛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절대 생명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를 통해서만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만물도 예수를 통해서만 의미 있는 것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에 근거해서 그들은 예수를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한 로고스라고, 즉 시원적 로고스라고 대담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경험입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신앙의 본질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능력
이런 경험이 있다고 해서 우리 삶이 실제로 달라지는 게 있나,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아무리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별로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이상하게 살아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를 절대 생명으로 경험한 사람들도 별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생각은 오해입니다. 예수를 특별한 존재로 경험한 사람들의 삶은 겉으로 어떻게 보이더라도 근본적으로 허접한 게 아니라 아주 특별한 능력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생명의 능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를 절대 생명으로 실제로 경험한 게 아니라 경험한 거처럼 흉내만 낸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도 비유적으로 설명해야겠습니다. 여기 광야를 횡단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방향을 가늠하기도 힘듭니다. 그 자리에서 그냥 머물러 있으면 위험에 처합니다. 저 멀리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빛을 따라가고 어떤 사람은 그걸 무시합니다. 따라가는 사람의 속도도 다 다릅니다. 가까이 간 사람은 큰 장작불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장작불의 열기를 받아서 몸이 따뜻해졌습니다. 불의 능력에 휩싸인 겁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멀리서 불빛만 바라보고 걸어옵니다. 빛은 보지만 열기는 느끼지 못합니다. 열기를 느끼지 못하니까 몸은 여전히 차갑습니다. 예수를 생명으로 가깝게 경험한 사람은 빛과 열을 동시에 다 받는 사람입니다. 삶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생활은 하지만 예수를 절대 생명으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먼 곳에서 불빛만 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경우에 해당될까요?
오늘은 2016년 성탄절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2천 년 전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절기가 성탄절입니다. 예수는 2천 년 전 역사의 한 시점에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런 역사에 제한받지 않고 태초부터 이미 존재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요 1:5).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세상은 알지 못했고 그의 백성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 1:10, 11).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었습니다(요 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의 빛에, 생명의 능력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런 엄청난 일이 시작된 날이 성탄절이니, 오늘 우리가 기뻐 찬송을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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