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장이의 손
렘18:1-11, 창조절 둘째 주일, 2019년 9월8일
1.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2.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 3.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1.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예레미야는 기원전 587년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기 전 수십 년에 걸쳐 예루살렘에서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km 떨어진 아나돗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문은 괜찮은 편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의 상황은 좋지 못했습니다. 제국 바벨론의 위협을 받아서 나라가 어지러웠고 민심도 좋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왕족이나 귀족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내용을 하나님 말씀으로 선포했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백성들을 불안하게 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벨론 제국의 위협으로 힘든 마당에 유대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오늘 설교 본문도 그런 비판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렘 18:1절 이하를 따르면 예레미야는 어느 날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요즘이야 토기 그릇을 잘 쓰지 않지만, 옛날에는 대부분 그릇이 토기였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는 유명한 도공이 많았습니다. 일본에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습니다. 토기장이는 진흙을 자기 뜻대로 빚어서 밥그릇을 만들거나 술잔을 만들거나 꽃병을 만듭니다. 진흙이 원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직 토기장이의 뜻대로 결정됩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토기장이가 이미 만든 작품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부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수준만큼 잘 안 나오면 진흙에 섞어버립니다. 그걸로 다른 작품을 만듭니다. 토기장이에게 모든 결정권이 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걸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선포했습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운명이 하나님 손에 달렸다는 사실입니다. 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저 심연에서 크게 울릴 정도의 장엄한 필치로 선포된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것처럼 한 나라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메시지가 어떤 이들에게는 허튼소리로 들렸을 겁니다. 한 나라의 운명은 제국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대의 제국은 바벨론입니다. 형제 나라인 북이스라엘은 이미 백삼사십 년 전에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패망했습니다. 아시리아의 힘이 약해지면서 바벨론이 지중해 동쪽 지역을 제압했습니다. 제국은 어쩔 수 없이 팽창 정책을 펼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붕괴합니다. 팽창 정책을 쓰는 제국에 맞서는 작은 나라는 대부분 패망했습니다. 패망을 면하려면 조공을 바치는 식민지가 되어야 합니다. 예레미야 당시의 유대는 조공을 바치면서 패망만 면한 상태입니다. 제국이 역사를 결정한다는 생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집니다. 겉으로 드러난 역사 현상만 보면 그 말이 옳아 보입니다.
오늘의 제국은 누가 보더라도 미국입니다. 중국도 비슷한 나라입니다만 우리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치는 나라로 치면 분명히 미국입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바벨론은 악하고 지금 미국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벨론도 아주 세련되고 합리적이고 최고 문명을 자랑하는 나라였습니다. 예레미야의 활동이 끝난 시점인 기원전 587년에 유대는 함락되었습니다. 바벨론의 동화 정책에 따라서 많은 귀족과 지식인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거기서 일정한 혜택을 받으면서 학문에 전념하거나 국가 공무원으로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에 세계 최강국 미국이 세계의 운명을 손에 쥔 듯이 보입니다. 그걸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가능한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심지어 일본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국가 차원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국처럼 강력한 힘이 있어야만 인생 성공이라는 생각이 만연합니다. 그게 현재 우리의 삶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제가 일일이 말씀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요즘 법무부 장관 청문회에 얽힌 이야기를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젊은이들의 상당수가 법무부 장관 후보를 불편하게 느끼는 이유는 진보적 가치를 말하던 그가 실제는 철저한 기득권자로 살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의 집안은 우리나라 상위 1%에 해당할 겁니다. 그런 계급에 속한 부모들은 누구나 자녀들을 위해서 법무부 장관 가족에게 드러난 그런 노력을 했을 겁니다. 그의 딸이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 고등학교에 다녔다면 학생들 스스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스펙을 쌓았겠지요. 그게 불법은 아니지만, 거기에 이를 수 없는 젊은이들에게 박탈감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저는 이 문제가 어느 한 부모와 학생을 향한 마녀사냥식의 비판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대한민국이 학벌 사회라는 사실입니다. 학벌 계급이 청소년부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 영향을 끼칩니다. 목사가 되더라도 일단 서울대학교를 나오는 게 대한민국에서는 좋습니다. 학벌주의와 제국주의는 똑같은 현상입니다.
예레미야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제국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이스라엘, 즉 예루살렘 주민들의 운명이 달렸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역사에 나타났던 수많은 제국을 보십시오. 가장 막강했던 제국은 로마입니다. 로마의 멸망사에 관한 책이나 논문도 많습니다. 외부에 의한 멸망이냐 아니면 내부에 의한 멸망이냐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원히 존속할 것처럼 보였던 로마가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은 자신들이야말로 세계 중심 국가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래서 이름도 가운데 중(中)이라는 글자를 사용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금 홍콩에서 시민 혁명에 버금갈 정도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티베트는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독립하려고 합니다. 그 외에 여러 소수민족도 어떤 계기가 오면 떨어져 나갈 겁니다. 1990년대에 소련이 붕괴하여 여러 나라로 나뉜 것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 적합한 개념이 ‘나비 효과’입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고대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제국의 역사를 해체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신다는 사실을 출애굽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해방되리라는 꿈을 꿀 수 없었습니다. 애굽의 고센에서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었고, 애굽의 힘이 너무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인도로 그들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민족의 차원에서 처음 경험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추격하던 애굽의 마병들이 홍해에 빠져 죽은 다음에 모세의 누이를 비롯한 젊은 여성들이 소고를 들고 춤추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21).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세계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십니까?
열린 미래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선포한 메시지의 두 번째 내용은 하나님이 처음의 생각을 바꾸신다는 사실입니다. 8절 이하에 나온 말씀입니다. 어떤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면 하나님이 내리기로 생각했던 재앙을 돌이킬 것이며, 어떤 민족이 하나님 보기에 악을 행하면 내리기로 생각했던 복을 거두리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이 원래의 뜻을 바꾸시는 기준은 악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거라고, 거꾸로 악을 행하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다고 종종 말합니다. 아주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이 이런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착한 사람이 늘 건강하고 돈도 많고 오래 살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악한 사람의 인생이 반드시 나빠진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악에서 돌아서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권선징악의 교훈쯤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그런 교훈은 동서양의 윤리 교사들에게서 나올만한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더 근본적인 차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뜻을 바꾸신다는 말은 역사가 닫혀 있는 게 아니라 열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전자는 역사 결정론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역사 개방성입니다. 역사 결정론이 우리에게는 더 익숙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바꾸면 그것은 예정론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할 자와 버릴 자를 예정해놓았다는 뜻입니다. 부분적으로 예정론이 틀리지 않지만, 성경 전체로 볼 때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기계적으로 예정론을 들이밀면 역사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없습니다. 모든 일이 예정된 것이니 악이나 불신앙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일종의 숙명론에 떨어집니다. 예정론은 역사가 미리 결정되어 변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 신비롭다는 의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금 한가하게 책상 앞에 앉아서 역사 결정론이니 개방론이니 하면서 역사 철학을 논하는 중이 아닙니다. 지금 자기 민족인 유대가 바벨론 제국을 두려워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는 현실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백성들은 바벨론 제국 앞에서 주변의 다른 나라처럼 유대도 망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무조건 자신들을 지켜주신다는 확신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확신도 사실은 불안에서 나온 현상입니다. 유대 백성은 총체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아주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미래는 결정된 게 아닙니다. 유대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운명도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막연하게 잘 되리라 마음먹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대 백성들이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집니다. 이 사실을 가리켜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전지전능 개념이 훼손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한 채 하나님이 자기 뜻을 얼마든지 바꾸신다고 표현했습니다.
국가나 민족만이 아니라 개인의 미래도 마찬가지로 닫힌 게 아니라 열려 있습니다. 그걸 느끼면서 사는 사람도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삶을 지루하게 여기거나 어딘가에 광적으로 매달립니다. 느끼는 사람은 삶을 흥미롭게 여기면서 긴장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동유럽 여행을 갔다고 합시다. 체코의 프라하도 좋습니다. 그는 가방 하나 등에 지고 발길 닿는 대로, 또는 지도 한 장 손에 들거나 지도 앱이 든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이 골목 저 골목을 걷습니다. 저 골목을 돌면 무엇이 나올지 그는 모르기에 흥미롭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듯이 보입니다. 새롭다고 해봐야 돈이 많아지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질 뿐입니다. 일상의 깊이에서 보면 오늘과 내일이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 먹는 복숭아 맛과 내일 먹는 복숭아 맛이 다릅니다. 비와 바람에 대한 오늘의 느낌과 내일의 느낌은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다릅니다. 영혼의 깊이로 들어가면 내일이 훨씬 더 새롭습니다. 준비만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완전히 새롭게 경험될 것입니다. 미래가 닫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새로운 미래에 관한 경험의 절정은 천국 경험입니다.
마커스 보그는 <놀라움과 경외의 나날들>이라는 책에서 예수의 대안적인 지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일부를 읽겠습니다. “예수의 대안적인 지혜, 즉 많은 사람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은 사실상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살았던 삶입니다. 예수의 지혜는 우리를 성스러움 –하나님- 안에 철저하게 중심을 두는 삶으로 이끕니다. 이와 대조를 이루는 삶은 인습적인 지혜를 따르는 삶인데, 우리 대부분이 이제껏 오랫동안 살아왔던 삶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모두 인습적 지혜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초래한 많은 결과 중에 두 가지에 관심을 기울이길 바랍니다. 한 가지는 인습적인 지혜가 우리로 놀라움에 대해 눈멀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커스 보그가 말하는 인습적인 지혜는 삶을 고정된 실체로만 보는 태도입니다. 닫힌 세계관입니다. 지식의 유무나 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인습적인 지혜에 묶인 사람은 삶의 놀라움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사실상 한 가지입니다. 나라의 운명을 국제 정치공학적인 차원에서만 볼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으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본문 11b절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악한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공통으로 전한 불의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상숭배이고, 다른 하나는 고아와 과부 등 사회의 약자를 억울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통합니다. 우상숭배는 물질숭배입니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삶의 태도입니다. 물질숭배에 찌든 사회는 빈부격차가 심해질 수밖에 없으면, 사회 빈곤층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의 대다수 나라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런 악한 길을 갔습니다. 당연합니다. 잘 먹고 잘살아야 하고, 국방비도 늘려야 하기에 일단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정의로운 세상은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못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나라 유대도 그런 길을 갔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재앙을 내릴 계획을 세웠으니 하루속히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고 호소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요? 안타깝게도, 아니 당연하게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다음 구절인 렘 18:12절에 따르면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헛되다고 비판하면서 조롱했습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방식대로 계속 살겠다는 겁니다. 렘 18:18절 이하를 따르면 예레미야를 향한 집단적인 반대 목소리가 드세졌고, 급기야 예레미야를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개혁을 불편해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와 같습니다. 개인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내부의 인습적인 삶의 태도가 우리를 붙들고 늘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평소에 토기장이의 손과 같은 하나님의 전권과 섭리와 능력을 느끼면서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지금까지 축적된 세상 경험을 절대화하십니까.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이며, 토기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예상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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