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루시아”
약 5:7-10, 대림절 셋째 주일, 2019년 12월15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오늘 설교 본문인 약 5:7-10절은 세 개의 명령형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7절과 8절에 나오는 동사는 “참으라.”입니다. 9절에는 “원망하지 말라.”라는 동사가 나오고, 10절에는 “본으로 삼으라.”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이런 말들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긴 합니다. 고대 그리스 스토아 철학자들이나 로마 선생들도 이런 충고를 자주 했습니다. 동양의 선인들도 마찬가지이고, 서당 훈장이나 초등학교 교사들도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어떤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참으라!
우선 첫 명령문인 “참으라.”라는 말씀을 봅시다. 참아야 할 사람은 주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입니다. 요즘 말로는 ‘을’에 속한 사람입니다. ‘갑’이 아무리 횡포를 저질러도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오늘 우리는 생각합니다. 왜 손해를 보느냐, 당하는 사람만 바보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저 역시 억울한 일을 당해도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한 대로 똑같이 갚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떤 정도로 반응하는 것이 옳은지는 상황에 따라서 여러분이 각자 판단해야 합니다.
참아야 한다는 야고보의 충고는 앞 대목인 약 5:1-6절에 나오는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그 대목에는 악한 부자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부자들은 언젠가 울고 통곡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약 5:2,3절에 따르면 이들 악한 부자들의 재물은 썩었고 옷은 좀먹었으며, 금과 은은 녹슬었습니다. 모든 소유가 무의미하고 허무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품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은 일입니다(4절). 저임금 정책을 쓰거나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들이 당시에도 벌어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재물을 사치와 방종에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5절). 물론 선한 부자들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자가 선하게 살기는 힘듭니다. 선하면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악한 부자들이 의인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6절). 세례 요한 같은 이가 의인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악한 부자들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악한 부자들은 헤롯 왕을 사주하여 세례 요한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빈번하게 벌어집니다.
야고보는 이런 악한 부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참으라.”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이 정당한가요? 비겁한 건 아닌가요? 야고보는 지금 세상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으로 세상을 보는 중입니다. 그는 무조건 참으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참으라고 말합니다. 이는 농부의 태도와 비슷합니다. 씨를 뿌리고 내일 당장 결실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농부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야 합니다. 추수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릴 줄 아는 농부는 내일 당장 곡식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좌불안석, 좌충우돌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추수 때, 또는 하나님의 시간, 오늘 본문 7절과 8절이 묘사하는 단어를 그대로 따오면 “파루시아 투 퀴리우”, 즉 “주의 내림”에 관한 생각이 어느 정도로 깊은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삶을 표피적으로 대하기에 거기서 벌어지는 오만가지 현상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면서 살아갑니다. 그게 인간의 실제적인 삶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 가장 인간답게 사는 길을 우리는 찾아갑니다. 그게 문명 역사입니다. 옛날과 비교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방식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습니다. 조선 시대의 임금보다 지금 서민들이 더 쾌적한 조건에서 살아갑니다. 에어컨이 없는 집이 없습니다. 냉장고가 없는 집이 없습니다. 수세식 화장실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옛날 임금들은 구경도 못 하던 생활 조건입니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과 비교해서 오늘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해졌을까요? 우리는 지금도 똑같이 다투고 미워하고 허무에 휩싸여 삽니다. 겉모양만 달라질 뿐이지 삶의 질은 그대로라고 말해도 잘못은 아닙니다. 파루시아를 기다리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삶을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이 강렬했기에 악한 부자들을 부러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파루시아 투 퀴리우’는 순전히 종교적인 차원이라서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정신 바짝 차리고 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현실이라고 느끼는 이 삶이 사실은 추상적이고 비현실일지 모릅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 마지막 장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머니 자궁 안에서 자라는 태아에게 결정권이 있다면 자궁 밖으로 나가기보다는 그 안에 머무르고 싶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태아는 그 자궁 안을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낍니다. 그에게는 어머니의 자궁이 모든 세계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일상과 세상도 어머니 자궁일지 모릅니다. 태아가 자궁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우리도 지금의 삶에서 나가야 합니다. 1년 전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자녀들이 컸을지도, 재산이 늘어났을지도, 부부 사이가 좋아지거나 나빠졌을지도, 좋은 직장으로 옮기거나 실업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다 일상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10년을 살고, 30년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늙어 죽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과 죽음 이후에 끼어 있는 그 사이의 삶을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점으로 표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짧은 한평생을 참된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일들은 진짜 삶이고 주님의 파루시아는 종교적인 관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정말 옳을까요?
지금 저는 우리의 삶이 헛되다거나 무의미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유일회적으로 살아가는 이 삶은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합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 나라가 여기에 가까이 왔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겠습니까.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보내셨겠습니까. 요한복음에 따르면 하나님은 지금의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요 3:16). 그렇게 중요한 이 세상의 삶이기에 역설적으로 이 세상의 속성과 본질을 뚫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본질은 다툼이고, 분노이며, 교양이고, 자기 자랑입니다. 야고보 당시 최고 문명이었던 로마는 악한 부자와 같았습니다. 기독교인은 당시 가장 잘 나가던 로마 문명에서 자신들의 구원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대충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그들이 살았다면 로마 문명에 기대서 대략 남이 부러워할 만한 삶의 조건을 채우는 데서만 신앙생활의 이유를 찾았겠지요. 그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내림으로만 구원이, 즉 참된 행복이 시작한다고 믿었기에 구원과 행복을 제공하지 못하는 악한 부자와 시시비비를 따지는 일에 시간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심판주
야고보는 9절에서 “파루시아”를 아주 특이한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느니라.” 파루시아가 왜 심판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생명 심판을 가리킵니다. 예수가 생명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생명 아닌 것은 예수 앞에서 제거됩니다. 여기 동네 축구 동아리 모임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자기가 축구를 제일 잘한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 자리에 지금 영국 프로축구 토트넘에서 뛰는 손흥민 선수가 나타났다고 합시다. 큰소리치던 사람들은 부끄러워서 쥐구멍을 찾을 겁니다. 손 선수 앞에서 그들은 심판을 받은 겁니다. 생명 심판주인 예수가 문밖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생명을 아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물론 구원이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구원이 너무 가까이 와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영혼이 간절하고 깨어있고 주님을 그리워합니다. 문을 열러 나가야 하는 순간을 깨달았습니다. 마음이 온통 문밖으로 쏠려있습니다. 이게 실제로 어떤 뜻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계 3:2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기다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혼의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예수가 여러분과 실제로 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식탁에 앉는 일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한데, 예수와 함께 앉는다면 그 기쁨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는 지금 이 세상에 없기에 직접 만나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은 살아남아 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부활의 첫 열매가 된 그의 삶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종이 아니라 아들로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 구원이 문밖에서 우리를 기다립니다. 문을 빨리 열고 심판주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그 구원이 실제로 뭔데,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생명 사건입니다. 그걸 우리는 지금 다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만나야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는 그 흔적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흔적의 하나가 평화입니다. 우리는 평화롭게 살기 원합니다만 그게 잘 안 됩니다. 평화는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평화를 선물로 반드시 받습니다. 평화를 받지 못했다면 그는 평화의 왕인 예수를 만나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9절에서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다는 말을 하기에 앞서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라고 충고했습니다. 여기서 원망은 평화와 반대입니다. 서로 원망하지 말아야만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심판을 면한다는 말은 예수 생명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당시 야고보서를 받아볼 교회 신자들 사이에 이런 원망이 있었나 봅니다. 사람들이 모였으니 원망이 없을 수는 없었겠지요. 원망은 책임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데서 벌어집니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인정한다면, 또는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인정한다면 상대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서로 원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십시오. 평화가 깨집니다. 평화가 깨지면 생명에서 멀어지는 겁니다. 생명에서 멀어지는 게 바로 심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원망하지 않고 살 수 있냐, 하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원망과 논쟁은 구별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은 때에 따라서 필요합니다. 시시비비를 따지기는 하되 원망으로까지 가지는 말아야 합니다. 시시비비는 진리를 향하는 몸부림이라면 원망은 평화를 깨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더 근원적으로 볼 때 서로 원망한다는 말은 그들이 심판주가 문밖에서 기다린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당장 문을 열고 나가기도 바쁜데 어떻게 네 탓이냐 내 탓이냐 하고 원망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정말 궁극적인 것에 영혼의 촉수가 닿아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옥신각신하는 일에 흥미가 없습니다. 오늘의 문제로 비쳐서 말하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과열되고 있는 여당과 야당의 정쟁에 저는 흥미가 없습니다. 물론 저에게 정치적인 관점은 분명합니다. 불의한 정권, 독재 정권에는 강력하게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으로 최선이 없으면 차선을 선택해야 하고,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치 행위에서 절대적인 것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저에게 지금 절실한 문제는 심판주에게 문을 열어드리기 위해서 문으로 달려가는 일입니다. 어떻게 영혼의 자유와 안식과 평화를 안고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일이 시급하기에 어떤 이와 트러블이 생겼을 때 안타깝게 생각할 뿐이지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원망할 겨를도 없고, 그런 마음도 들지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저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선지자 영성
야고보의 세 번째 명령은 “본으로 삼으라.”(10절)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옆에 본이 될만한 사람이 있으면 다시 힘이 납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에 속한다는 사실은 기독교인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교우들끼리 서로가 본이 된다면, 서로 본받으려고 노력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야고보가 본으로 삼으라고 한 대상은 선지자들입니다. 11절에는 욥도 거론됩니다. 선지자들을 본으로 삼아야 할 이유는 그들이 “고난과 오래 참음”에서 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이 고난을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생한 현실로 경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주님의 파루시아를 기다릴 줄 알았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 재림은 곧 오늘 본문에 반복해서 나온 ‘주의 파루시아’입니다. 선지자들의 영성이 오늘 야고보 선생의 편지에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약 5:8절은 “주의 강림이 가까우시니라.”라고 했습니다. 가까이 왔다고 말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예수의 재림을 갈망했다는 뜻입니다. 갈망하는 사람만이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예수 재림이, 즉 파루시아가 그들에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파루시아에 영혼의 중심을 두고 살았습니다.
2천 년 전에 그들이 갈망하고 기다렸던 예수 재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걸 보니 재림 신앙은 뭔가 잘못된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도 이런 일로 인해서 신앙에 시험이 들어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두 가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2천 년이라는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1만 년 후에 예수 재림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게 그리 먼 세월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천 년이 하루이고, 하루가 천 년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의 재림은 역사에서 이미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가 2천 년 전에 유대 땅에 오신 사건은 파루시아, 즉 주의 오심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성령을 통해서 파루시아가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죽음을 지금 여기서 현실로 경험하는 사람이 있듯이, 주의 임재를 지금 여기서 이미 현실로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담임 목사로서 여러분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세상에서 더 성실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은 담임 목사로서 당연한 목회적인 덕담이고, 여러분에게 정말 제가 바라는 바는 다음입니다.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생명이, 구원이, 궁극적인 행복이, 환희와 기쁨과 찬양이, 즉 파루시아가 이미 여러분 옆에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찾아보십시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 자리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찾는 자는 찾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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