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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http://wms.kehc.org/d/dabia/07.01.14.MP32007.01.14. 요 2:1-12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가나 혼인잔치
오늘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장면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한편의 삽화입니다. 갈릴래아의 가나라는 곳에 혼인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옛날 잔칫집을 상상해보십시오. 국수, 부침이, 떡, 돼지고기, 막걸리, 온갖 과일 등, 먹을거리가 넘쳐납니다. 잔치는 한 집안만이 아니라 동네 전체가 벌이는 축제입니다. 이 혼인 잔치에 예수님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잔치 주인이 예수님의 친척일까요? 예수의 어머니까지 그 자리에 온 걸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또 예수의 제자들도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면 신랑이 예수의 친구나 제자일도 모르겠습니다.
잔치가 진행되는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손님이 예상보다 많이 온 탓인지, 손님들 중에서 두주불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든지, 또는 포도주를 충분히 장만하지 못할 정도로 집주인이 가난했든지, 여하튼 잔칫집으로서는 매우 곤란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렸습니다. 마리아의 태도를 보면 집주인과 마리아의 관계가 아주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포도주가 떨어진 걸 알 까닭이 없으며, 떨어진 것을 알았다 한들 그걸 예수에게 전할 까닭이 없습니다. 물론 마리아가 오지랖이 넓은 여자래서 그런 일까지 참견하고 나섰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대목에 대해서 성서기자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 이런 대답만 보면 조금 민망합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너무 냉정하게 대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5절)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하리라고 믿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의 대화는 오늘 우리에게 흡사 선문답처럼 들립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2천 년 전 요한복음 기자의 시각으로 보도된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상하게 들리는 건 당연합니다. 이 사건의 진행을 조금 더 따라갑시다.
성서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정결예식 때 사용하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그 집에 놓여 있었습니다. 원래 물이 부족한 지역이기 때문에 항아리 숫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 부엌에도 물을 담아두는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동네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그 항아리에 담아두고 썼습니다. 지금보다 불편하긴 했지만 물 항아리가 놓인 부엌이라, 생각만 해도 정감이 어립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을 거부한 것 같았던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항아리마다 모두 물을 가득히 부어라.”(7절) 하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자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일렀습니다. “이제는 퍼서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어라.”(8절)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자 물이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 이야기의 중요한 줄거리입니다. 물론 그 뒤로 잔치 맡은 이의 말이 나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이 사람은 포도주 맛을 보더니 신랑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는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인데 이 좋은 포도주가 아직까지 있으니 웬 일이오!”(10절) 간혹 술집 주인들이 술 취한 손님들에게 가짜 양주를 내놓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런 일은 이미 2천 년 전부터의 관행이군요. 잔치 맡은 사람의 이런 진술은 앞서 일어난 사건, 즉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보충 설명입니다.

디오니시우스
여러분들은 오늘의 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듭니까? 크게 두 가지의 반응이 가능합니다. 첫째 반응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둘째 반응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은 2천 년 전 미숙한 사람들에게만 통용되는 것이지 오늘 우리에게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요한복음 기자의 보도는 사실입니까, 아니면 단지 신앙적인 해석에 불과합니까?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서는 이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이 대세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사실을 일단 전제하고 그 사건에서 신앙적인 교훈을 찾으려고 합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교훈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첫 기적을 행하신 곳이 혼인잔치 집이라는 사실은 곧 교회가 잔칫집과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듯이 우리도 변해야 한다.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우리의 삶이 물에서 포도주로 변한다. 여러분은 이런 것 이외에 더 많은 교훈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명령하시기를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히 부으라고 하셨으니까 우리도 교회를 가득히 채워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또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만 살면 우리에게는 늘 기적이 일어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나중 포도주의 맛이 더 좋았듯이 기독교인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처음보다 나중으로 갈수록 더 깊은 맛을 내야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들은 나쁠 건 없지만 본문의 중심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려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선 가나의 포도주 사건이 요한복음의 독자전승이라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는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복음서는 똑같이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는 말씀인데, 왜 이 사건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을까요? 그만큼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말이 될까요? 이런 문제는 신학적으로 복잡하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가지는 맙시다. 이 본문은 다른 복음서와 구별되는 요한복음 기자의 고유한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이 차이점은 근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은 네 복음서 중에서 헬라철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요한복음은 헬라 사상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흔적들이 요한복음에 많이 등장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포도주 사건 이야기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기독교의 성서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이미 헬라 신화에 나옵니다. C.K. 바레트의 설명에 따르면 디오니시우스 신(神)은 포도나무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기적들은 디오니시우스 예배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기원전 5세기의 고고학 연구에서 이런 것들의 증거들이 나왔습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는 이런 신화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들이 신앙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신화를 채용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주 사건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는 말인가, 하고 언짢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성서를 읽는 독자들이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확실한 겁니다. 또한 복음서의 보도에는 순수하게 기독교적이지 않은, 또는 그 역사성을 완전하게 증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최선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을 통해서, 비록 그것이 헬라신화와 연관된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성서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영성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신학적 영성이기도 합니다. 성서본문이 말하는 핵심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는 영성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에서 물이 포도주가 변했다는 사실 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미 헬라신화에 등장하는 요소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오늘 우리는 이 사건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들을 수 있습니까?

기적과 영광
요한복음 기자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전한 다음에 11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 문장에서 첫 번째 ‘기적’과 당신의 ‘영광’이 중요합니다. 아니 포도주 사건 전체에서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첫 번째 기적은 헬라어 “아르켄 톤 세메이온”입니다. 성서에는 기적이 많이 등장합니다. 창세기의 창조 사건도 기적입니다. 무로부터 무엇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이 대망하는 새 하늘과 새 땅도 역시 기적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사이에 얼마나 많은 기적 이야기가 보도되고 있는지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서를 펼쳐들기만 하면 나오는 이런 기적 이야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서를 오해하기도 합니다.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자기 인생이 기적적으로 좋아지리라는 야무진 꿈을 기독교 신앙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큰 착각입니다. 성서기자들은 기적 자체에 대해서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마술사입니다. 성서는 비록 기적 이야기를 담고 있어도 마술이 아닙니다. 성서 기자들이 보도하는 기적 이야기는 그야말로 “sign”, 즉 “표징”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기적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중요한 건 손가락이 아니라 달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꾸 손가락에 매달립니다.
당신,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안 잡힌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성서가 말씀하는 걸 그대로 믿으면 되지 거기서 무슨 손가락과 달 이야기를 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서언어가 가리키는 근원적인 생명의 세계로 눈을 돌리지 않으면 우리는 성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성서 기자들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중입니다.
요한은 이 기적이 “첫 번째”라고 말합니다. 헬라어 아르케는 순서에 따른 첫 번째라는 뜻만이 아니라 근원적인, 일차적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포도주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첫 번째 행한 것이라는 의미보다는 본질적인 사건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 그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바로 예수님의 “영광”(독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적을 중심으로 한 ‘호기심 천국’이 아닙니다. 기적, 꿈, 비전, 선교 등등, 이런 것들이 아니라 예수의 영광이 중심입니다. 이런 말이 여러분의 생각을 더 복잡하게 하는 것 같군요. 도대체 예수의 영광이라니, 손에 잡히지 않지요? 당연합니다. 2천 년 전 기독교 공동체들이 경험하고 인식한 예수의 영광을 우리가 쉽게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쉬운 것에만 눈독을 들입니다. 기적현상에만 심취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네, 하는 소문만을 퍼뜨립니다.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무슨 뜻인가요? 포도주 사건이 가리키고 있는 그 예수님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영광이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됩니다. 지금은 “가문의 영광”이라는 말도 있지만, 원래 성서 언어에서 사람에게는 사용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현시되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마리아의 요청에 대해서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신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그리고 예수님을 모두 알아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 현시가 완전하게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포도주 사건으로 부분적으로,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에게 현시되었습니다. 유대교의 정결의식에 사용되던 물이 생명을 살리는 포도주로 변화된 것처럼 예수님은 생명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신앙 안에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현시하셨다는 신앙 말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과 하나님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나타나는 구원 사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의 현존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 같은 존재론적인 변화가 가능합니다. 가장 궁극적인 변화는 우리가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쳐집니다. 기독교인은 그런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운명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아멘.
요한복음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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