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움의 근거
구제금 갹출
오늘 본문의 수신인은 고린토 교회 교우들입니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에서 아테네를 거쳐 고린토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대개 한두 주일이나 길게는 두세 달 머물렀지만 여기 고린토에서는 일 년 반이나 머물렀습니다. 바울의 선교 활동에서 이곳이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신약성서로 결정된 바울의 많은 서신중에서 고린토전후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양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높다는 것만 보아도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래 그리스의 중심 도시는 아테네였지만 바울이 그리스를 방문한 50년경의 아테네는 로마에 의해서 함락된 도시로서 주민이 겨우 5천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서 고린토는 지중해 해상로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고린토 신전에는 수많은 여사제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지금의 올림픽과 비슷한 스포츠도 발달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피혁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직접 노동하며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토 교회에 편지를 쓴 이유가 여럿이지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건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무슨 이유로 이런 모금운동을 펼치고 있을까요? 사도들과 예수님의 동생이 이끌어가던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교의 핍박을 받았을 수도 있고, 그 지역에 극심한 흉년이나 재난이 발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 당시에 각 지역의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일정한 액수의 돈을 납부하는, 일종의 부과금 제도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내막을 완벽하게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다만 우리는 초기 기독교가 처음부터 서로 상부상조하는 일치 정신에 충실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습니다. 단지 고린토 교회가 속한 아카이아 지역만이 아니라 갈라디아 지역과 마케도니아 지역도 역시 이런 모금에 솔선수범했습니다.
이런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방 교회의 경제 형편이 예루살렘 교회보다 낫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뜻 돕는 일에 나설 수는 없습니다. 특히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도 있었겠지요. 바울은 개인적인 감정과 교회의 일치를 세워나가는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태도가 곧 살아있는 신앙이겠지요.
오늘 한국교회는 이런 부분에서는 상당히 심각한 반성을 필요로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50개 중에서 반 수 이상이 한국에 있지만, 거꾸로 가장 가난한 교회도 한국에 있습니다. 가장 가난한 교회는 통계가 잡혀있지 않았으니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 있는 교회 중에서 30%가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그런 형편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직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고착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한국 경제의 양극화 현상이 곧 한국교회의 모습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아마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이런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목사가 능력이 없어서 교회가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하고 넘어가겠지요. 조금만 눈을 돌리면 이게 매우 심각하게 왜곡된 교회의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예컨대 한 가족 안에서 한 사람은 산해진미로 매일 배부르게 먹는데, 다른 한 사람은 한 끼도 먹을까 말까 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걸 한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한국교회가 미국 다음으로 세계 선교사를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 해외 선교를 하겠다는 데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그 예산의 반 정도만 국내 미자립교회를 돕는 데 사용한다면 한국교회는 크게 건강해질 것입니다.
마음이 담긴 구제금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구제금의 신앙적 의미를 매우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의 구제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정확하게 읽어보겠습니다. “각각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내야지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7절) 아마 그 당시의 고린토 교회에서도 이런 문제로 말들이 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별로 깊은 관계도 없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왜 돈을 내야하느냐, 너무 많은 걸 보낼 수는 없지 않느냐, 다른 교회는 얼마나 내는지 미리 정보를 알아야 하지 않겠냐, 등등, 말들이 많았겠지요. 사람은 지금이나 2천 년 전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행동과 마음의 일치라는 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구제금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삶에서 우리의 행동에는 마음이 담기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익명성이라는 특징으로 작동되는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런 경향이 훨씬 강한 것 같습니다. 직장 동료들과도 소위 ‘허심탄회’하게 관계하지 못합니다. 형식적으로는 가까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 마음이 소통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정작 필요한 말이 아니라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게 바로 이렇게 마음과 행동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는지요. 이런 관계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야만 유지되지 그게 달라지면 위태로워집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의 정치, 사회의 일각에서 정부의 북한 지원을 ‘퍼주기’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달러를 갖다 주면 그게 곧 핵폭탄으로 돌아오는데, 왜 그렇게 도와 주냐 하고 문제를 삼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북한 인권 문제를 이 문제와 연계하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이런 정치역학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제가 이 시간에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이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말들이 많아지고, 트집을 잡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이건 일상에도 역시 똑같이 적용됩니다. 누구를 도울 때도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구걸할 시간이 있으면 일하지 왜 이렇게 사냐, 이번만은 도와주지만 다음에는 어림도 없는 줄 알아라, 하는 식입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도와주면서 생색을 내려는 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마 나도 그런 경우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사람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기가 거의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금 양심적인 사람은 여기서 갈등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당위와 그런 일에 마음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는 현실이 바로 우리가 샌드위치처럼 깨어있는 실존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런 갈등이 완전히 해결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자신의 노력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죽을 때까지 그런 상태 안에 머물러 있겠지요.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그런 갈등을 자신의 운명으로 알고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일까요?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한계를 명확하게 뚫어보지만, 그런 한계 안에서 체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약점을 그대로 감수하지만, 전혀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새로운 삶의 차원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제금 문제를 우리의 윤리에서 다루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풍요의 하나님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풍요롭다’는 의미의 단어가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충분히’ 주실 수 있으며,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것을 ‘넉넉하게’ 가질 수 있고, 좋은 일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으며(8),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주시고(10), 여러분은 언제나 ‘부요하게’ 되어 ‘아낌없이’ 남을 도울 수 있게 될 것이며(11),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총을 보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15).
바울이 이렇게 풍요롭다는 말을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하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고린토 교우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먹을 걸 떼어낸다면 자기의 것이 그만큼 줄어드니까 사람들은 구제금을 내면서도 불안하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풍요롭게 만드시기 때문에 그런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흡사 자녀들에게 용돈을 넉넉하게 주는 부모 밑에 있는 아이들이 자기 것을 친구들과 나누면서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겠지요.
물론 여기서 다른 생각이 가능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신앙적으로 나누면서 살아도 실제로 부자가 되는 법은 없다고 말이죠. 하긴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먹고 살만 해야 나누고 절약하면서 나름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지, 늘 생존에 급급한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풍요와는 거리가 멉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나 북한 주민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선진국처럼 풍요를 경험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경제문제는 신앙과는 별로 상관없는 분야처럼 보입니다. 그 말은 일단 옳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이런 주장은 현실적인 게 아니라 ‘공자 왈’ 같은 것에 불과한가요? 고린토 교우들이 구제금을 좀 많이 내라는 뜻으로 이렇게 그럴듯한 말을 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단지 종교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목회 업적을 올리기 위해서 고린토 교우들을 선동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게 아니라 기술공학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진정한 생명의 힘을 의식한다는 뜻입니다. 좀 더 천천히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8a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충분히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은총이 충분하다는 이 말씀을 우리가 당장 부자가 된다거나 출세한다는 뜻으로 새기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에게 근거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부자가 되거나 출세하는 것만을 삶의 실체로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에게서 충분한 은총을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 삶은 그런 방식으로 자기를 성취하거나 앞세우는 일보다 훨씬 근원적입니다. 자기를 성취하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생명의 리얼리티들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걸 좀 더 우리의 일상과 가깝게 연결시켜서 설명한다면, 무한경쟁의 구도가 아니라 참된 사귐의 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8b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것을 넉넉하게 가질 수 있고, 온갖 좋은 일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모든 것을 넉넉하게 가질 수 있다는 게 부자가 된다거나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걸 어떻게 우리 모두가 넉넉하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자본주의가 기독교보다 우월하고 현실적인 종교입니다. 우리가 넉넉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생명의 능력이십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곰곰이 살펴보면 참된 사귐을 위해서 사용할만한 여유는 늘 있습니다. 이 여유는 돈만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시간도 그렇고, 의지도 그렇고, 몸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단지 약육강식의 방법으로 작동되는 자기 성취에만 마음을 쏟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풍요로운 은총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 감사
바울은 하나님의 풍요로운 은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되는가, 설명합니다. 구제금은 예루살렘 교우들의 가난을 덜어 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12). 바울은 13절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다시 강조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이런 말씀을 단지 종교적인 수사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자신들이 굶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 감격해하고, 그 생명의 소중함을 절감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감사가 어디 있으며, 찬양이 어디 있습니까? 생존의 위기에 빠진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돕는 일보다 더 귀한 전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삶을 저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 동성애자들, 북한 주민들, 장애인들, 이혼가정의 아이들, 여러 방식으로 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일지 모르죠. 이들이 다시 삶을 노래할 수 있는 길을 우리는 함께 찾아나서야 합니다. 그런 생명의 사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풍요롭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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