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창조절 셋째 주일, 2022년 9월18일
디모데전, 후서는 큰 틀에서 목회 서신으로 분류됩니다. 바울이 믿음의 제자인 디모데에게 목회 현장에서 필요한 ‘노하우’를 가르치는 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 딤전 2장에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표제가 붙었습니다. 딤전 2:1~2절은 기도의 여러 종류에 관해서 언급하고, 이어서 임금과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맡은 일을 잘 감당해서 나라가 조용해야만 그리스도인들이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은 5절부터 갑자기 기도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내용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고 중보자도 한 분이라고 말입니다. 교리적인 성격이 강한 표현입니다. 우선 5절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위 구절이 기도라는 주제와 관련이 없어 보이나 실제로는 기도와 직결됩니다. 기도의 근본 토대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바칠 대상이 누구인지, 기도드려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제대로 된 기도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달리기할 때도 일단 방향이 분명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원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서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예배를 예배답게 드릴 수 있습니다. 그걸 모르거나 분명하지 않으면 예배가 모인 이들의 인간적인 욕망에 따라서 흘러갈 수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
5절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말로 문장을 시작합니다. 오해하기 쉬운 표현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세상에서 이해하는 산수처럼 하나, 둘, 셋이라는 숫자 개념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은 숫자 안에 갇히는 겁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를 유일신교로 분류하는 종교학자들이 있으나, 우리 그리스도교는 유일신론(더 정확하게는 단일군주론)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다릅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삼위일체론입니다. 삼위일체론을 ‘삼신론’이라고 이해해도 곤란합니다. 아버지라는 하나님이 있고, 아들이라는 하나님이 있고, 또 영이라는 하나님이 각각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문장에서 한 분은 ‘하나’이기보다는 ‘전체’라는 성격이 강합니다. 전체를 숫자로 표현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계 1:8절에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알파와 오메가는 처음과 끝이라는 뜻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우주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런 존재를 가리켜서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철저하게 제한받기에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전체이신 하나님을 직접 인식하거나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태양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듯이, 또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인간을 직접 경험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말합니다. 가끔 하나님을 보았다거나 천국을 다녀왔다고 간증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들은 헛것을 보았거나, 아니면 시를 쓰듯이 상징적으로 말하는 겁니다.
본문 5절에는 정말 이상한 문장이 나옵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정확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μεσίτης)도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헬라어 ‘메시테스’는 중보자보다는 중재자가 우리말에 더 자연스러운 번역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도 한 분뿐이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사이”
먼저 하나님과 사람 ‘사이’라는 표현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이시니까 우리와 연결해줄 어떤 존재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들리는 표현입니다. 사고 친 아들을 아버지가 혼냈다고 합시다. 서로 거리가 생겨서 소통이 안 됩니다. 어머니가 중간에서 중재할 수 있겠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이런 중재가 가능한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사람도 중재할 수 없습니다. 비유적으로, 불과 사람을 누가 중재할 수 있겠습니까. 중재하려면 불의 언어를 알고 사람의 언어를 다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쪽 말만 이해하면 중재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려면 하나님의 언어와 사람의 언어를 다 알아야 합니다. 신성과 인성이 다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중재자라고 한다면 그의 정체성은 하나님이면서도 동시에 사람이어야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부터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신학적 논란이 치열했습니다. 이는 곧 그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는 신입니까, 사람입니까?
신학은 이 주제를 ‘그리스도론’(christology)에서 다룹니다. 오랜 논쟁의 역사가 있고,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부터 극단적으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쪽과 인성을 강조하는 쪽이 있었습니다. 양쪽 모두 이단으로 정죄 받았습니다. 교회가 공적으로 내놓은 대답은 ‘참된 신이며 참된 사람’(베레 데우스 베레 호모)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신이면 신이고, 사람이면 사람이지 어떻게 참되게 신이며 참되게 사람일 수 있겠습니까? 고체면 고체이고 액체면 액체이지 어떻게 고체이면서 동시에 액체일 수 있습니까. 죽은 사람이면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이면 산 사람이지, 어떻게 죽은 사람이면서 살아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이런 존재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한국 그리스도교인들은 주로 예수님의 신성에 무게를 둡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당연히 신이라는 겁니다. 또는 동정녀 출생 전승이나 공생애 중에 나타난 초능력적인 기적 전승을 근거로 신성을 역설합니다. 사실 동정녀 이야기에서 핵심은 동정녀가 아니라 마리아라는 여자의 몸입니다. 기적은 고대 사회에서 예수님만이 아니라 다른 특별한 위인들에게 흔하게 따라오던 이야기입니다. 그런 걸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근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반신반인’으로 느낍니다. 어떤 때는 신으로, 어떤 때는 사람으로 나타난다고 말입니다. 그런 존재는 그리스 신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신인가요, 사람인가요?
그리스어 원어 성경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라는 문장 뒤에 세 단어가 접속사나 동사 없이 나란히 나옵니다. 중재자의 정체성을 그 세 단어로 규정한 것입니다. ἄνθρωπος Χριστὸς Ἰησοῦς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인 예수라는 뜻입니다. 가장 먼저 나온 단어가 ‘안트로포스’(사람)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과 똑같이 한 분으로서 중재자인 그분은 ‘사람’입니다. 가장 뒤에 나오는 단어는 자연인으로서의 예수 이름입니다. 그 사이에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이 복잡하게 들릴지 모르겠군요.
오늘 본문에 따르면 한 마디로 예수는 ‘사람’입니다. 반쯤은 신(神)인 사람이 아니라, 그리고 유별나고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베레 호모라는 단어가 바로 그걸 가리킵니다. 만약 본질에서 우리와 다른 게 있다면 그는 베레 호모가 아닙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가 우리처럼 사람으로서 감당해야 할 모든 어려움을 똑같이 감당했다고 전합니다. 그는 외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마음이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이웃과 어울려서 포도주를 어느 정도는 즐기지 않으셨을까요?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세 가지 유혹을 받았다고 전합니다. 돌로 빵을 만들 것,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것, 마귀에게 절할 것. 만약 예수님이 신이라면 유혹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설교 시간에 이야기해도 괜찮을지 조심스럽지만, 여러분이 새겨들으실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도 성적인 욕망이 있었을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그는 베레 호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욕망이 있다는 사실과 성적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세 가지 유혹을 받으셨으나 넘어가지 않았듯이 예수님도 성적인 유혹에 넘어가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대속물
저의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예수님의 신성을 무시하는 듯이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성경과 신학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분명히 ‘안트로포스’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크리스토스’라는 단어가 이어서 나옵니다. 그 단어도 예수가 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신이라는 의미였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말고 권능으로 세상의 악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했어야만 합니다. 그게 메시아, 즉 그리스도에 관한 유대인들의 본래 표상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신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완전히 먼 운명이 그에게 벌어졌습니다. 그걸 본문 6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대속물은 헬라어 ‘안티뤼트론’의 번역인데, 납치된 사람에 대한 몸값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납치되었다는 말인가, 하고 이상한 생각이 들긴 합니다. 성경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납치된 인질은 강제로 억압된 운명에 떨어진 사람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유약한 인질 중에서는 납치범에게 오히려 호의를 느끼는 심리 상태인 스톡홀름 증후군에 떨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납치된 인질을 그리스도교적 용어로 바꾸면 죄인입니다. 단순히 파렴치한 행위나 부도덕한 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에게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아도 겸손해지지 않습니다. 복지가 향상되어도 불평불만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참된 만족을 모릅니다. 쉽게 적대감에 떨어지고, 잘난 척하고 싶어지거나 허세를 부리고 싶고, 거꾸로 자책감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인생살이에서 성과를 거둬도 생명 충만감에 이르지 못합니다. 적나라한 예를 들어서, 신출귀몰한 재테크나 벤처 기업활동을 통해서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해도 사람은 그것으로 참된 평화와 안식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설명에 동의하시나요? 세상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진리가 훼손되는 게 아니기에 저는 성경의 가르침만을 우직하게 전하려고 합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납치당한 인질을 구출하려면, 또는 노예로 팔린 이를 자유롭게 하려면 몸값인 대속물(안티뤼트론)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이 바로 그 대속물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사실 십자가 죽음 자체에는 절대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 말고도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은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열사라고 이름 붙인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지난 어두운 시절에 민주화를 위해서 생명을 버린 이들을 가리킵니다.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이들 중에서 자기 몸을 의학 실험용으로 내놓거나 장기 기증에 참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칭찬받아야 마땅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우리는 ‘안티뤼트론’(대속물)이나 ‘메시테스’(중재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만이 유일한 안티뤼트론이자 메시테스입니다. 예수만이 그리스도입니다. 왜 그럴까요? 모두 남을 위해서 죽음을 받아들인 이들인데 왜 예수만을 중재자라고 말하나요? 여기에 무슨 근거가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중에서 두 가지를 말씀드릴 테니까, 각자 잘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유일한 분인 첫째 근거는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고(호모우시오스)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의 하나님 인식과 경험과 삶이 유일하기에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냐 율법학자냐 바리새인이냐, 또는 세리냐 무식한 자냐 죄인이냐 하는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교 전문가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고 선언하셨고,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며 자비로우시며 능력이 크신 분인지를 분명하게 경험하셨고 그 경험을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런 경험이 아주 강력해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또 다른 근거는 십자가에 처형당해서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이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살아있는 자”로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부활 사건을 가리킵니다.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원래의 상태로 회귀하는 게 아닙니다. 죽을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을 복음서 기자들은 빈 무덤 전승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영화를 찍듯이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할머니 장례식에 참석한 유치원 아이가 장례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단편적인 삽화로만 기억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중심으로 한 부활 전승이 산만하고, 또 어떻게 보면 신화적이나 핵심은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운명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생생하게, 마치 죽었던 자가 지금 자신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경험에 근거하여 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21세기 첨단 문명 시대에는 중재자 교리를 믿기 힘들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그러면 이보다 더 확실한 삶의 교리가 무엇인지 제시해보십시오. 죄와 죽음과 구원에 관해서는 아무 생각 없이 지금 당장 욕망을 무제한 발현하는 방식의 삶이나, 또는 적절한 위선과 세련된 교양으로 우리 인생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요? 납치범의 작은 친절과 진정성에 마음을 빼앗겨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외면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건 아닐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라는 말씀 안으로 깊이 들어가 보십시오. 여러분 인생의 실체가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저도 그런 길을 꾸준히, 그리고 즐겁게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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