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본 사람
요 1:10-18, 성탄후 둘째 주일, 2020년 1월5일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0-18).
2020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2020년 역시 곧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나이를 먹습니다. 보통 80살이나 90살까지 삽니다. 사람은 자신이 이룬 인생 업적을 인생살이 자체로 여깁니다. 사람이 인생 성공에 매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수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거나, 사업가가 됩니다.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나름으로 인생 성공을 추구합니다. 대다수 사람은 그런 성취감을 행복으로 느끼면서 삽니다. 우리 교우들도 행복하게 살기를 저는 바랍니다. 다른 일부 사람들은 이런 삶에서도 공허와 무의미를 경험합니다. 아무리 많은 목표를 성취해도 그것이 꿈처럼 한순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는 너무 바쁘게 돌아가고, 일방적으로 물질적인 구조 돌아가기에 이런 공허를 느낄 기회마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사회는 영적으로 불행한 사회일지 모릅니다.
삶의 공허와 무의미를 넘어서려는 사람들은 신을 찾습니다. 여기서 신은 삶의 궁극적인 의미입니다. 폴 틸리히의 표현으로 신은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입니다. 판넨베르크 표현으로는 “만물을 규정하는 실재(reality)”입니다. 칼 브라텐은 “미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조금씩 표현이 다르지만 공통되는 점은 신이 절대적인 생명 능력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상대적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테니스를 칠 때 쾌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무리 테니스가 재미있어도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제가 매 순간을 그런 쾌감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 쾌감이 늘 행복하게 작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경험을 극복하기 위하여 절대적인 능력을 인류는 오래전부터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을 찾았나요? 지금도 찾고 계시는가요? 하나님을 찾기에는 세상살이가 너무 바쁘고 고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친구들과 노는 일이 바빠서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어린아이와 비슷한 심리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이야기가 성경에도 많이 나옵니다.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세 이야기
구약에서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은 모세입니다. 출애굽기에는 하나님과 모세의 직접적인 대화가 두 번 나옵니다. 한 번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호렙산에서 일어난 대화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살던 모세는 어느 날 호렙산에서 일어난 이상한 현상을 봅니다. 떨기나무가 불타고 있었는데, 나무는 타지 않고 불꽃만 일었습니다. 그 불꽃 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애굽 제국의 압제로부터 해방해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를 보내신 분이 누군지를 알려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그 유명한 명제가 이 순간에 나옵니다(출 3:14).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사람은 하나님의 규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우리의 관점에서 규정하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저것은 돌, 저것은 나무, 저것은 은행이고 저것은 병원이라는 식입니다. 교사, 변호사, 군인, 목사, 유튜버, 영화배우도 다 규정되는 대상입니다. 교회 구조도 이런 규정입니다. 그 규정되는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게 우리의 일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규정에 들어오지 않는 존재입니다. 규정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 개념, 범주를 초월하는 분입니다. 모세는 바로 그런 분을 만났습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 이런 분이 아니라면 모세는 애굽의 바로 앞에 당당히 서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광야로 나아가게 하셨다고 선포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은 바로가 바로 절대자라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세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제도와 개념과 규정으로 가둘 수 없는 존재를 만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출애굽 이후 모세가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하나님에게서 받은 시내산에서 일어났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에게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고 말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실제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20:20).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을 모세에게 알려주기 위해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펼치셨습니다. 모세를 반석과 반석 틈에 세우고 손으로 모세를 덮었습니다. 하나님이 지나갈 때 볼 수 없게 하려는 조치입니다.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이 이 대목에서 나옵니다.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4:23).
하나님의 등과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표현은 은유입니다. 하나님에게 등이 있고 얼굴이 있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등’은 우리가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안다는 의미이고, 하나님의 ‘얼굴’은 직접 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등만 보고 얼굴은 보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아무도 직접, 즉 실체로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간 모세도 이런 정도밖에 하나님을 알 수 없었으니 다른 사람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실체로 알지 못한다는 말은 궁극적인 생명을 실체로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밥을 먹고, 배설하고, 숨을 쉬면서 삽니다. 이를 생명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왜 밥을 먹어야 하고 배설해야 하고 숨을 쉬어야 하는지는 모릅니다. 남녀가 만나서 아기를 낳고, 돈벌이하며, 서로 자기가 우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살아갑니다. 인류가 앞으로도 계속 이런 방식으로 살아갈지는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미래에 관해서 C.S. 루이스가 재미있는 비유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처음 생명은 난자와 정자의 결합으로 시작합니다. 그 순간은 씨처럼 식물의 몸입니다. 이어서 어머니 자궁 안의 양수 안에서 물고기 형태로 삽니다. 어머니 배에서 세상으로 나온 뒤로는 지금의 형식으로 삽니다. 지금의 모습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도 상상하기 어려운 변화가 일어났듯이 지금의 삶이 끝난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변할지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미래에 숨겨진 생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외면하면서 지금의 삶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미래에 일어날 생명을 생각하면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후자에 속한 사람입니다. 문제는 지금의 상대적인 생명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생명을 실제로 염두에 두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세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의 등을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등을 역사 사건에서 보았습니다.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 귀환이 그 예입니다. 애굽과 바벨론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절정의 권력이자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들에게서 벗어난다는 것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한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등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이라 말하지 않는 이유는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 귀환으로 개인과 민족의 생명이 완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등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등에도 관심 없는 사람들이 많지만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하나님의 등만이라도 보려고 애를 씁니다. 반드시 교회에 다니는 사람만 그런 건 아닙니다. 겉으로 신을 부정하는 사람 중에서도 궁극적인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휴머니즘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들이 이들입니다. 아프리카 오지에 의료봉사를 다니는 의사들은 표면적으로 종교 이름을 내세우지 않아도 신을 찾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수도승들도 하나님의 등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예배드리고, 노동하고, 소박한 밥상을 대하고, 하나님을 탐색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으나 등만이라도 보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
오늘 설교 본문인 요한복음은 전혀 새로운 사실을 전합니다. 인간 역사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이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요 1:18절을 읽겠습니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주셨다.
이 문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품 안에 계신 분이며, 하나님의 외아들이고,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이기에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습니다. 요 8:38절에 따르면 예수는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 이렇게 파격적인 발언을 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예수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이를 기독교 신학은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부릅니다. 즉 보이지 않으시고 초월적인 하나님이 보이고 내재적인 몸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라는 말씀입니다. 이에 관한 핵심 구절이 요 1: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런 성경의 표현이 현대인들에게는 확 와 닿지 않습니다. 2천 년 전 그리스 철학을 바탕에 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스토아 철학 용어인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만물의 질서와 조화를 만들어내는 힘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개념으로는 형상을 가리키는 에이도스이고, 플라톤 개념으로는 이데아입니다. 현대물리학 개념으로 바꾸면 양자역학이나 장 개념이라고 봐도 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라고 표현했습니다. 로고스가 인간 육신을 입었습니다. 그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특별한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었습니다. 여기서 영광은 생명의 완전한 발현을 가리킵니다. 다른 말로는 생명 구원입니다. 예수에게 생명이 완전히 발현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요한은 예수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만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는 말이 성립됩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을 좀 더 일상적인 개념으로 풀면, 예수에게서 은혜와 진리가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4절과 17절이 은혜와 진리를 언급했습니다. 특히 17절에서는 하나님의 등만 보고 얼굴은 보지 못했던 모세가 언급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왔다면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습니다. 예수 이전에도 은혜와 진리가 없지는 않았으나 예수로 인해서 완전하게 실재(reality)가 된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은혜와 진리의 세계가 현실로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은혜와 진리
1) 은혜는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하나님 경험의 요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안다면 그 사람들은 전혀 새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 6:25-34절에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이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계신데도 어린 자식들이 늘 무엇을 먹을까 하는 걱정만 한다면 부모를 믿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현대인들이 은혜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핵심적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은혜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깨닫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어떤 분들은 속으로 하나님의 은혜만 믿고 살기에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너무 척박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선 경쟁력을 키우는데 몰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으로 살면 아마 죽을 때까지 은혜의 영성을 맛보지 못할 겁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 영성으로 사는 게 아니라 은혜 영성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예수라는 한 유대인의 영혼에 하나님이 가득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로 인해서 은혜의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바로 하나님 경험입니다. 꼭 기억하세요. 예수를 통해서 은혜를 아는 것이야말로 곧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말로만 은혜라고 하지 말고 실제로 삶을, 생명을, 인생을 은혜로, 즉 하나님의 선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2) 진리는 헬라어 ‘알레테이아’의 번역입니다. 알레테이아는 탈(脫)이라는 접두사 ‘아’와 은폐라는 명사 ‘레테이아’의 합성어입니다. 은폐된 것이 드러나는 사건이 바로 진리라는 뜻입니다. 자연과학의 속성도 바로 탈은폐, 즉 진리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진리가 왔다는 말은 은폐된 생명이 드러났다는, 즉 구원이 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 구원이 아주 협소하기에 예수가 진리라는 의미를 실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속된 표현으로는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우리는 생명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고상하게는 학문이나 예술이나 인생살이에서 업적을 내고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는 일입니다. 아니면 아주 소박한 차원에서 재미있게 사는 것에 머뭅니다. 이게 삶의 모든 것일까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구원 사건만이 궁극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와 운명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인생 업적으로도 이룰 수 없는, 그리고 모세의 율법으로도 이룰 수 없는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제 시작된 2020년이 여러분에게 이런 믿음의 깊이로 들어가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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