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7.20. (롬 8:31-39)
여러분들이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그 기조가 전반으로 어둡습니다. 바울이 시편 44:22절을 인용해서 묘사하고 있는 기독교인의 처지를 보십시오.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본문에 나오는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또는 죽음, 생명, 높음, 깊음 등등의 단어들에서도 우리는 비장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비장감은 본문의 앞 구절인 로마 8:18-25절에서부터 이미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영광과 고통을 대비시켰습니다. 영광은 미래에 우리가 참여할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입니다. 이런 세계는 너무 놀라워서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일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 영광에 온전히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은 오히려 고통입니다. 그 고통을 바울은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인간 실존
첫째, 피조물의 고통입니다. 롬 8:22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라는 말은 존재 근거를 자기의 내부에 두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스스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 인간은 단 5분만 숨을 쉬지 않아도 죽습니다.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우리 몸이, 특히 뇌가 가장 빨리 죽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은 주변의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결국은 죽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곧 물 한 모금 넘기기 힘들 정도로 기력이 쇠약해져서 죽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순간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실존적인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둘째, 기독교인의 고통입니다. 바울은 피조물의 고통을 지적한 후에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도 역시 속으로 신음한다고 지적했습니다.(23절) 바울의 이런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군요. 세상 사람들이야 허무한 삶을 사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으로 사는데 무슨 신음이냐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세상의 피조물과 똑같은 조건 아래 놓여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이 세상의 고통을 쉽게 넘어서는 게 아닙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에게는 조금 더 특별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영광을 아는 사람은 현재의 삶이 아무리 즐겁다 하더라도 결코 즐거워만 할 수는 없습니다. 절대적인 생명이라 할 이런 영광 앞에서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생명은 아무리 화려해보여도 초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태양과 촛불의 차이와 비슷하겠지요. 태양의 광휘를 아는 사람은 촛불이 얼마나 불편한지 압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바울을 염세주의자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이 세상은 고해(苦海)니까 이 세상의 일을 모두 포기하고 하루빨리 저 하늘나라에 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빌 4:4)고 이를 정도로 이 세상의 삶을 긍정한 사람입니다. 그가 피조물의 고통과 신앙인의 신음을 거론하는 이유는 참된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생명 완성의 길이 무엇인지를 말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면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생명의 실체를 뚫어보아야 합니다. 위에서 예로 들었듯이 오늘 우리의 삶이 촛불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면 순식간에 꺼지는 촛불, 몇 시간이 지나 초가 다 타면 끼지는 촛불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참된 생명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을 겁니다. 롬 8:30절에서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간단히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존재의 근거를 우리 내부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가르침을 세상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반대할지도 모릅니다. 나 혼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인정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반론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씩씩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명을 누리는 70,80년의 삶만을 전제로 한다면 그들의 말도 옳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는 생명은 이런 생명을 넘어섭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이라고 했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롬 8:25)고 고백했습니다. 기독교인은 결국 죽어야 할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세상,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오게 될 세상, 우리의 몸이 완전히 해방될 그 세상에서의 생명을 희망합니다. 바로 여기에 생명에 대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생각에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들어가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생명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노력해서 건강하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만, 새로운 세상에서는 그런 노력이 무의미합니다. 죽음이 무업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붙들었던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만 하는 사건입니다. 천하를 주름잡던 영웅호걸들도 숨이 멎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습니다. 그의 몸은 박테리아의 밥이 될 뿐입니다. 죽음 너머의 세상은 하나님만이 실질적으로 지배합니다. 그렇게 지배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는 몸의 참된 해방과 구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로 이 질문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지키는 것이 바로 그 대답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그들과 대립하고 있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복음이라는 전혀 다른 대답을 제시했습니다. 율법으로부터 복음으로 신앙의 근본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무늬만 약간 다른 게 아니라 근본이, 패러다임 자체가 다른 대답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면, 복음은 하나님의 행위에 맞춥니다. 율법은 인간의 노력이 관건이라면, 복음은 하나님의 은총이 관건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 사실 하나에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셨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건 정말 중요한 사실입니다. 한번 듣고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숨을 거둘 때까지 거듭해서 생각하고 큰 깨우침으로 받아들여야 할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게 아니라,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하나님 자신이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에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놓여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혁명적인 진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수고하고 애를 써서 이루어야만 가치가 있지 공짜로 받는 게 무슨 가치가 있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가 이렇게 수고하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피상적인 원리들입니다. 그런 원리의 아래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아침에 먹은 밥이나 빵도 피상적으로는 우리가 노력한 댓가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일상도 그 깊이에서는 전혀 다른 은총의 질서가 작동하는데, 죽음 너머의 새로운 생명의 세계에서야 오죽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영광스러운 생명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능한가?
바로 이 사건,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하신 하나님의 그 행위가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외아들을 주기까지에 이릅니다.(롬 8:32) 여기서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하나님도 인간처럼 아들을 두시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외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본체가 곧 하나님과 하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만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그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고전 13:8)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는 인간의 모든 지식, 인식, 헌신, 믿음조차도 무의미해집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주시고, 죽음 이후의 영광스런 영광의 생명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줍니다. 인간에게 이것보다 더 큰 복음은 없습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 사랑을 별로 진지하게, 또는 현실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막연한 것으로만 받아들입니다. 우선 바울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38,39절인데, 여기서 그는 “나는 확신합니다.”는 문장으로 이 문제를 정확하게 정리합니다. 3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읽은 공동번역은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미래적인 것으로 번역했지만, 실제로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현재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바로 우리의 존재 근거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는 진술에서 바울이 거론한 이 세상의 힘들은 열 가지입니다. 죽음, 생명, 천사, 권세의 천신, 현재의 일, 미래의 일, 능력의 천신, 높음, 깊음, 각종 피조물이 그것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으려는 힘들입니다. 이 내용은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것도 있고, 전혀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습니다. 익숙한 것들은 죽음, 생명 같은 단어이고, 나머지는 낯선 것들입니다. 낯선 이유는 이 내용이 묵시문학적 장르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고대인들은 주술적인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선한 존재만이 아니라 악한 존재인 ‘권세의 천신’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별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점성술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겠군요. 바다의 깊은 곳, 땅 깊은 곳에는 악한 영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용왕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런 악한 권세는 인간의 삶을 파괴합니다. 특히 신약성서 당시는 로마 제국이 거의 신적 권위를 보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런 권세로부터 당하는 구체적인 고난을 바울은 35절에서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이 그것입니다. 위에서 거론한 열 가지 목록은 묵시문학적 배경에 근거한 관념적 세계라고 한다면, 이것은 개인의 실존이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했던 실제적인 삶의 무게였습니다. 특히 기독교인이 감당해야 할 고난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선교 활동에서 어떤 시련을 당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안일한 일상에만 만족하는 사람들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시련을 당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묵시사상의 악한 세력이나 구체적인 삶의 시련이나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게 가능할까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내지 못한다는 바울의 확신에 찬 고백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열거한 악한 권세와 구체적인 시련은 지금 당장 우리를 힘들게 하는데 반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추상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대개 지금 당장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세력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이런 데만 온통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를 실제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를 아는 것이며, 그럴 때만 우리는 현실적으로 우리를 억압하는 온갖 종류의 악한 권세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묶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를 온전히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감히 우리 편이라고(31절)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습니까?”(35절) 그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한 그 어떤 악한 권세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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