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 섭리
(창 45:1-15)
요셉 이야기
야곱에게는 네 명의 여자를 통해서 얻은 열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열 두 명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태두가 되었습니다. 열한 번째 아들이 요셉입니다. 요셉에 관해서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을 겁니다. 모두들 요셉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의 삶에 기독론적인 의미가 숨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물로 그려졌습니다. 그는 언제나 성실하고 정직했으며, 주인집 여자의 유혹도 뿌리쳤습니다. 형제들에게 배신을 당했지만 그것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한 점의 흠도 없는 인물로 묘사된 이는 요셉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요셉의 운명이 드라마틱하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았습니다. 야곱이 특별하게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은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양을 치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는데 요셉은 고급 옷을 입고 아버지 곁에서 놀고먹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형제들은 아버지 몰래 요셉을 광야 거상들에게 팔았습니다. 요셉은 결국 이집트의 장군 보디발 집의 청지기가 되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이집트의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인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벼락출세를 한 데에는 해몽의 능력이 있습니다. 함께 옥살이를 하던 이집트 고위 관리의 꿈을 족집게처럼 정확하게 해몽해주었습니다. 나중에 이집트의 파라오가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해몽하지 못했습니다. 옥살이에서 풀려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파라오에게 데리고 오게 했습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정확하게 해몽해 주었습니다. 이집트에 칠년 동안 풍년이 들었다가 다시 칠년 동안 흉년이 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셉은 풍년과 흉년을 대처할 방법도 제시했습니다.
흉년은 이집트만이 아니라 요셉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살고 있는 팔레스틴 지역까지 덮쳤습니다. 먹을거리가 떨어진 야곱 가족들은 이집트에서 양식을 구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형제들이 돈을 들고 이집트까지 와서 총리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차여차 해서 양식을 사러 왔다고 말입니다. 요셉은 대번에 형제들을 알아보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요. 우선은 형제들이 너무 놀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겠지요. 자신들이 시기심으로 팔아버린 동생이 지금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당장 알게 된다면 기절초풍을 할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형제들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이 양식을 사러 이집트를 오가는 와중에 몇 번에 걸쳐서 시험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형제들이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으며, 아버지에 대한 효심도 깊었습니다. 특히 형들이 막내 동생 베냐민을 아낀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베냐민은 열두 형제 중의 막내로 여러 배다른 형제 중에서 요셉의 유일한 친 형제입니다. 요셉이 트집을 잡아 베냐민만 이집트에 남겨두고 다른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했을 때 넷째 형인 유다가 나서서 자기가 대신 인질로 잡혀 있을 테니 베냐민을 보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유다의 이 이야기를 듣고 요셉이 얼마나 감격했을지는 긴말이 필요 없습니다. 오늘 본문 창 45:1-15절은 요셉의 그 마음을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요셉은 관리들을 모두 내보고, 자기가 누구인지 형제들에게 털어놓은 뒤 북받치는 감정을 참을 수 없어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신가, 하고 요셉이 물었지만 형제들은 너무 놀라서 아무 대답도 못했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자신들이 옛날 요셉에게 행한 일이 기억났겠지요. 요셉이 자기 정체를 말하는 순간에 이제 죽었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요셉은 형제들을 진정시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그렇게 된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뒤에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알렸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모든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해 와서 살라고 했습니다. 모든 말을 마친 뒤 요셉은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울었습니다. 형제들과도 안고 울었습니다. 그제야 형제들이 요셉과 정상적으로 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장면은 우리에게 별로 낯설지 않습니다. 마치 남북이산가족의 상봉과 비슷합니다.
먼저 보내시는 하나님
요셉 이야기가 아무리 감동적이라 하더라도 요셉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생각하는 건 곤란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관심도 요셉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요셉 이야기에 꿈이 자주 나온다고 해서 요셉처럼 꿈을 꾸자, 비전을 갖자고 말하는 건 본문으로부터 크게 벗어나는 것입니다. 요셉이 다른 구약의 인물들보다 여러모로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만 객관적으로 본다면 문제도 많습니다. 그는 매점매석을 통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자유농이었던 이집트 민중들을 농노로 만들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지금 요셉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요셉에게 초점을 맞추는 건 본문을 벗어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성서기자가 드라마틱한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려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요셉의 입을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전달됩니다. 요셉은 자기를 이집트로 팔아버린 일을 기억하고 두려워하던 형제들에게 자신이 이집트에 오게 된 것은 형제들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5,7,8절에서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다.”고 말입니다. 이런 말은 요셉 개인의 말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체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섭리하셨다는 것이 본문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이 섭리 신앙은 하나님이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분이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는 의지를 갖고 이 세상에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입니다. 그 인격적인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요셉의 고백처럼 요셉을 미리 이집트로 보내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나라로 간섭하시고 통치하십니다. 개인의 운명에도 개입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있으신지요. 여러분이 지낸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시나요? 나의 인생에 어떤 의지를 갖고 있는 분의 생각이 개입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우리가 하나님을 옳게 믿고 경험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거꾸로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신비로운지를 모른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런 섭리 신앙은 우리를 감사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기 어려운 일들도 많습니다. 불행과 악이 그것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성실하게 살았는데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불치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부모를 잘못 만났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외국으로 입양되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무죄한 이들의 고난도 그치지 않습니다. 뻔뻔하고 악한 이들이 잘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도 과연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싶습니다. 대신 성서가 말하는 사실을 전하겠습니다. 오늘 분문에 따르면 불행과 악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요셉은 요셉을 이집트 거상들에게 팔아넘긴 원죄로 불안해하는 형제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일은 형제들이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 형제들이 오래 전에 동생 요셉을 판 것은 분명히 악입니다. 이것은 카인의 아벨 살해보다는 약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죄악입니다. 성서는 그런 악 자체를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인간의 악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겁니다. 악마저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욥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보십시오.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삶과 믿음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탄은 욥의 환경이 나빠지면 하나님을 부정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를 시험하려고 마음먹고 하나님에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욥은 재산을 잃고, 자식도 모두 잃었습니다. 극한의 피부병에 걸려 기왓장으로 자기 몸을 긁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욥을 향해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친구들도 모두 하나같이 욥을 비난했습니다. 욥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탄이 행한 불행이며 악입니다. 그러나 욥기서는 그 사탄의 행위를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탄의 능력이 대단한 건 분명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간교하고 강력합니다. 하나님과 쌍벽을 이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런 사탄의 능력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탄은 비열하고 우스꽝스럽기조차 합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데 선수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시기심으로 온갖 머리를 짜내서 동생 요셉을 팔았지만, 오히려 요셉을 이집트로 미리 보낸 하나님의 일이 되고 말았다는 본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서는 악마저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만이 역사의 승리자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선포를 진리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걸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은 분명합니다. 비록 불행한 일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그의 은총이 개입되어있다는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일 겁니다.
하나님의 섭리 신앙을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결혼하고 싶어도 대상이 없고, 결혼은 했는데 마음에 안 들고, 자식들은 말을 안 듣고, 하루하루가 짜증스럽다고 말입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일상에 푹 빠져서 다른 것을 못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도 인신매매 당하듯이 이집트로 팔려갈 때는 신세한탄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다음에 보니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절실하게 깨달으려면 우리의 삶을 미래의 지평에서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답답한 현실만 보이지만 미래의 시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 보일 겁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말입니다.
아직 미래가 오지 않았으니 미래의 시각으로 현재를 본다는 게 쉽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먼저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현재는 과거의 미래입니다. 오늘의 시각으로 과거를 바라보십시오. 그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보일 겁니다. 그게 보이지 않나요? 보이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면 현실이 아니라 허상을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여러분에게 현재의 삶이 최고입니다. 그걸 모른다면 아예 처음부터 신앙을 다시 배우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만 하면 모든 삶이 그에게 베스트라는 뜻입니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옥에 계시다면 그곳을 택하겠다고 했습니다. 제 목회에서도 현재의 상황이 베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생명 지킴이
저는 앞에서 하나님의 섭리 신앙으로 들어가려면 우리의 삶을 미래의 지평에서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미래의 지평이 무엇일까요? 거기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곳에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온전히 계시하십니다. 본문에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먼저 이집트로 보낸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창 45:5,7)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바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미래에 우리에게 생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 기자들이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어떻게 인류 역사에서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명시적으로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기껏해야 기근을 면하는 것이었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부활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생명이 우리 운명의 마지막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생명 구원을 향해서 우리가 나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도달하기 까지는 마치 요셉의 운명처럼 우여곡절이 많겠지요. 그 모든 것은 우리로 그 부활생명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입니다.
끝으로, 요셉은 형제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창 45:5)라고 했습니다. 섭리 신앙을 아는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한탄하지도 않습니다. 신세한탄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섭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 섭리에 영혼의 귀를 활짝 열어놓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으려고 선하게 투쟁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일어난 고난과 시련으로 근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항상 기뻐합니다. 그 너머에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의 요셉 형제들처럼 모두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겁니다. 그 놀라운 생명의 환희를 오늘 앞당겨서 살아가십시오. (2009.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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