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근본 속성
딤전 1:12-17, 창조절 셋째 주일, 2019년 9월15일
12.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죄인의 괴수
제가 성경과 신학 이야기 외에 가장 신바람을 낼 수 있는 이야기는 테니스입니다. 1980년부터 시작했으니 구력이 40년이나 되었습니다. 테니스 동호회원들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꾸준하게 실력이 느는 회원이 있고 그 수준에서 거의 늘지 않는 회원이 있습니다. 음악이나 그림, 또는 문학이나 인생살이도 다 마찬가지인데, 죽을 때까지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 세계가 무한정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학문의 즐거움이나 독서의 즐거움이라는 말이 있듯이 테니스의 즐거움도 있고, 당연히 인생의 즐거움과 신앙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런 즐거움에 핵심 요소는 성숙, 비약, 발전입니다. 신앙의 성숙, 비약, 발전은 성경의 세계가 충격적으로 경험될 때 일어납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그런 경험을 자주 하시는지요.
오늘 성경 본문은 바울이 신앙의 동료이자 제자인 디모데에게 쓴 편지 일부입니다. 저는 본문에서 놀라운, 그래서 충격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b)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무도 바울을 죄인의 괴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자기를 자랑한 적도 있습니다. 빌 3:4-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고후 11:16절 이하에서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살았는지를 길게 묘사했습니다.
바울은 부도덕하거나 파렴치하거나 비양심적이거나, 또는 무신론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가 자신을 죄인의 우두머리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가 구원을 경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구원은 절대적인 생명 경험입니다. 절대적인 생명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태양 빛 앞에서는 손전등의 밝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와 같습니다. 다시 테니스를 예로 들겠습니다. 지난 유에스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스페인의 나달이 우승했습니다. 저도 아마추어 동호회에서는 제법 테니스를 친다고 자부하지만 나달 앞에서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아예 테니스를 치지 못한다고 하면 본전은 되겠지만 어느 정도 할 줄 안다고 생각하니까 그 생각 자체가 테니스의 절대 세계에 들어간 사람 앞에서는 죄입니다.
바울은 딤전 1:15절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윤리 도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자랑과 업적이 죄입니다. 그런 자랑과 업적으로 자기 생명을 완성하려고 애를 쓰다가 절망에 떨어지기에 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자랑과 업적에 목을 매고 삽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추석 모임에서도 그런 경험을 했을지 모릅니다. 자랑과 업적과 인정과 칭찬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삶이 위축되거나 부풀려집니다. 저도 자랑과 업적과 인정받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것이 부질없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알고 믿는 사람은 당연히 자기 자랑에서 벗어납니다. 그것이 곧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한 모습입니다. 자기 자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왕
바울은 자학이나 열등감에 떨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어떤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두 가지 영적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가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제 말씀드릴 하나님 찬송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고 말하고 이어서 17절에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 두 가지 영적 현상은 실제로는 한 가지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만 가장 높은 존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중간한 상태에서는 아무런 영적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울의 찬송을 들어보십시오. 이 찬송은 당시 바울이 속했던 교회에서 두루두루 불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조금 후에 부를 ‘설교 후 찬송가’ 11장도 기본적으로 이 내용과 비슷합니다. 이런 찬송이 영혼의 중심으로 우러나오는 사람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의 문장이 약간 애매해서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볼 테니 비교해서 들어보십시오. “영원한 왕이시며 오직 한 분뿐이시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불멸의 하느님께서 영원무궁토록 영예와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여기에 하나님의 근본 속성이 몇 개 단어로 묘사되었습니다. 이 속성을 아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런 속성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우선 바울은 하나님을 영원한 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왕이라는 표현은 물론 은유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왕은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절대자였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왕은 죽습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왕이라는 말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이런 말을 너무 흔하게 들어서 충격적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고 실제로는 여전히 세상의 왕을 찾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아를 찾습니다. 연예계 스타에 목을 맵니다. 세상의 왕이 우리의 삶을 보장해주리라 기대합니다. 바울을 비롯하여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만이 영원히 자신들의 생명을 보장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영원한’ 왕이라는 표현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영원하다는 말은 유한하다는 말과 대립하는 개념입니다. 현대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자본이나 기술이나 정치는 아무리 큰 힘이 있어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우리를 지배합니다.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죽음을 넘어서까지 우리의 생명을 책임지십니다. 아마 이런 표현도 실감이 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모르겠고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어려운 일없이 즐겁고 행복하게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생각을 저 역시 존중합니다. 이 나라의 교육과 정치와 경제도 이런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 민주주의, 경제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합니다. 그게 다 옳다고 전제하더라도 저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나의 운명이 완전히 끝난다면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나을지 모릅니다. 살아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이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허무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좋았던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점심 후에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는 정도로 우리의 삶이 한순간으로 허무하게 끝납니다. 허무하기에 더 소중하다는 말도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죽음 이후까지 나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그를 영원한 왕이라고 찬송합니다. 또한, 지금 살아있는 동안 그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 이후까지 주관하시는 영원한 왕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거기에 대한 증거가 있느냐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증거는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그 증거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운명이 끝장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곳곳에서 증언합니다. 그런 증언의 절정이 예수 부활입니다. 성경과 기독교 신조는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죽은 자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명입니다. 돈이 많거나 건강하고 지위가 높아도 모두 ‘죽은 자’가 됩니다. 예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다고(고전 15:20) 노래했습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부활 생명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씨앗으로 살지만 언젠가는 꽃으로 변화한다는 믿음입니다. 씨앗은 죽지만 완전히 소멸하는 게 아니라 꽃으로 변화합니다. 그런 성경의 주장은 세상에서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기에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을 영원한 왕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라고 그냥 두십시오.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지금 당장 보이는 게 아닙니다. 물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진리만이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들도 진리의 일부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물리학과 생물학이 말하는 진리가 일치될 겁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영원하신 왕이 무슨 뜻인지를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홀로 한 분!
앞에서 읽은 딤전 1:17절에서 영원하신 왕으로서의 하나님은 썩지 않고 보이지 않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썩지 않는다는 말은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낡고 늙어 죽습니다. 갓난아이도 늙고 노쇠합니다. 바위도 그렇고 지구 자체도 그렇습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의 사람들은 제국이야말로 멸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로마 제국에 속하면 죽음 앞에서도 위로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문을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썩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의 원천이기에 썩지 않고 죽지 않는 존재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어떤 분들에게는 손에 잡히지 않을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실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지금 세포와 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세포와 원자가 없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바람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연민에 떨어지면 바람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무조건 배척합니다. 진리를 향해서 눈을 감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이런 표현도 자주 들어서 상투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우리의 삶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충격적입니다. 이 세상에는 홀로 하나인 생명체나 사물은 없습니다. 아무리 희귀한 생물이나 사물이라도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홀로 존재하는 대표적 대상은 태양입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태양을 신으로 섬기곤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태양도 수많은 별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홀로 하나’라는 표현은 하나님에게만 해당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 어느 것으로도 하나님을 유추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한 존재 유비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바닷속의 물고기가 물 밖의 세계를, 특히 인간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그분은 홀로 하나이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홀로 한 분이라는 말은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의 만물은 개체이고 개별이고 부분이지만, 하나님은 총체라는 뜻입니다. 비유적으로 무한에 가까운 퍼즐 판의 각각 퍼즐 조각은 인간과 만물이고, 그 전체는 하나님입니다. 각각 퍼즐 조각은 약간씩 모양이 다르나 거의 비슷하고, 전체는 퍼즐 조각과 완전히 구별됩니다. 전체는 덕수궁 모양일 수도 있고, 금강산 모양일 수 있습니다. 퍼즐 조각은 여러 개이지만 전체 덕수궁 모양과 금강산 모양은 홀로 하나입니다. 퍼즐 조각은 전체 그림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자신이 그 전체 그림에 속해있다는 사실만 인식할 뿐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하나님의 근본 속성이 이 복잡다단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먹고살기에 바쁘고, 아픈 몸을 추스르기도 고단하고, 아이를 키우거나 시부모와의 불편한 관계도 신경 쓰입니다. 외로움을 참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왕이라는 사실이 이런 우리의 일상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썩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그리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주나요, 건강을 주나요? 하나님을 깊이 안다고 해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얽힌 문제가 당장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근본 속성을 실제로 알고 경험하면 여러분이 일상에서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던 문제가 대폭 죽어들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말은 삶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받아들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정신적으로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의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3:11절에서 말과 깨달음과 생각이 어린아이였다가 어른이 되어 어린아이의 일을 그만두었다고 말합니다. 이제 어른이 되면 삶을 전혀 새롭게 느끼고 새롭게 경험합니다.
존귀와 영광!
그 새로운 삶이 바로 오늘 설교 본문의 마지막 문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이 찬송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근본 속성을 우리 삶의 내용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세상의 왕을 섬기지 않고, 죽어야 할 대상을 섬기지 않고, 보이는 것을 절대화하지 않고, 부분적인 것에 목을 매지 않는 삶입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절망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잘 풀려도 교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일에 무관심하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일이 어떻게 전개되어도 하나님 안에서 생명 충만을 누릴 수 있으며, 또한 누리겠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삶의 태도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대답을 원하십니까? 더 구체적인 답은 하나님의 근본 속성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라면 저절로 알게 됩니다. 이에 관한 저의 사소한 일상을 전하는 것으로 설교를 마쳐도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목사님도 손주가 생기기를 바라시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의 제 삶이 절정이기에 더 이상의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만약 나중에 손주가 생긴다면 그것 역시 절정의 한순간이 되겠지요.” 정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북분단 체제가 하루빨리 평화 체제로 바뀌고 노동과 교육과 경제 제도가 정의롭게 바뀌기를 저는 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아도 절망하지 않고, 그렇게 흘러간다 해도 지나치게 즐거워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현재 저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조건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미 대(大)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시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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