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 2022년 6월19일
예수님의 변화산 이야기(마 17장, 막 9장, 눅 9장)에 등장하는 구약의 두 인물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수많은 인물 중에서 두 사람이 거론되었다는 사실은 복음서 기자들이 엘리야를 모세 못지않은 인물로 평가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 지칭하신 적도 있습니다.(마 11:14) 거꾸로 예수님이 엘리야라는 당시 소문도 있었습니다.(마 16:14) 엘리야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극적인 인생을 산 인물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도 많이 행했습니다. 불 수레를 타고 승천하는 마지막 장면은 압권입니다. 자세한 이야기가 왕상 17~19장과 왕하 1~2장에 나옵니다.
엘리야와 이세벨
엘리야가 유대인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에 큰 울림이 된 이유는 여럿인데, 그중의 하나는 그가 박해받은 선지자를 대표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현재 우리나라처럼 남과 북으로 갈라졌던 기원전 9세기 바알 숭배가 극에 달했던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아합’이었고, 그의 아내는 시돈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이었습니다. 아합왕은 북이스라엘의 태조인 여로보암보다 더 악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사마리아 바알 신전 안에 바알 제단을 만들었고, 또 아세라 상까지 만들었습니다. 왕상 16:33절이 이렇게 그를 비판합니다.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엘리야는 아합에 맞섰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를 눈엣가시로 여겼습니다. 선지자들이 왕이나 다른 귀족들에게 박해받는 일은 종종 있었으나 엘리야처럼 왕과 왕비 두 사람에게 박해받는 일은 드뭅니다. 바알 선지자들의 후견인 역할을 한 이세벨 왕비는 세례 요한을 죽음에 이르게 한 헤로디아와 비슷합니다. 왕상 19:2절에 따르면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이세벨의 앙심 품은 저주를 들은 엘리야는 국경을 넘어 남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 땅으로 도망칩니다. 그곳 어느 광야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다음과 같이 자조 섞인 기도를 드립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왕상 19:4)
이세벨 왕비에게 위협을 받았다고 해서 죽느니 사느니 아우성치는 엘리야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엘리야는 앞에서 바알 선지자들 450명과 갈멜산에서 ‘배틀’을 벌였습니다. 왕상 18장에 나오는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을 겁니다. 엘리야는 승리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을 기손 냇가에서 죽였습니다.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일종의 유혈혁명이라서 엘리야도 까딱했으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이전에 하나님의 선지자들도 떼죽음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가뭄도 끝난 터라 엘리야는 아합왕이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당신을 죽이고 말 거야.’라는 이세벨 왕비의 경고를 들은 겁니다. 그녀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엘리야는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할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에 여호와 신앙을 회복해보려던 엘리야의 온갖 노력이 물거품이 된 셈입니다. 모든 게 끝장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살다 보면 형편이 너무 어려워지기도 하고, 건강을 완전히 잃을 때도 있고,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삶 자체에 대한 깊은 허무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 신앙이 깊어지면, 즉 살아있을 때 이미 생명 충만을 경험한 사람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죽는 게 차라리 낫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바울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 1:21~23)
세미한 소리
엘리야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가서 어느 굴에 들어갔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는 앞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쏟아냈던 한탄을 다시 쏟아냅니다. 왕상 19:10절입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명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낙심 가운데 빠진 엘리야 앞으로 여호와께서 지나가는 모습이 11절부터 네 가지 현상으로 묘사됩니다. 첫째,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지만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둘째, 지진이 일어났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셋째, 불이 나왔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넷째, 마지막으로 세미한 소리가 났습니다.
엘리야에게는 지금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같은 능력이 나타나서 아합과 이세벨과 그 추종자들을 단칼에 처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표적과 기사를 보고 싶었을 겁니다. 그게 고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하나님 표상이었으니까요. 홍해가 갈라지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하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쏟아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확신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런 크고 놀라운 능력을 갈망합니다. 그게 정치적인 능력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능력일 수도 있고, 건강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 엘리야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세미한 소리’로 그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건 겉으로 보기에 강력한 힘이 아니라 오히려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세미하고 부드러운 힘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숨소리를 들어보셨겠지요? 아기를 낳아서 키워본 분들은 경험했겠지만, 정말 신비한 소리입니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으나 ‘숨’은 우리가 살아있는 데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꽃 피는 소리를 들어보셨는지요?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으나 특수 측정기로 측정하면 작은 소리라도 들리기는 할 겁니다. 저는 소리에 민감한 편이라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불편합니다. 집에서 가족에게 방문을 소리 나지 않게, 아니면 작은 소리가 나게 조용히 여닫으라고 부탁합니다. 큰소리를 좋아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도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는 가끔 스피커 볼륨을 크게 올립니다. 언젠가 연주장에서 라이브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그리고 베르디의 <레퀴엠> 연주를 들을 때 연주장을 꽉 채우는 그 장엄한 소리에 큰 감동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큰 소리가 감동적인 이유는 세미한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격정과 정적이, 뜨거움과 차가움, 그리고 삶과 죽음이 조화를 이룰 때 훨씬 풍성해질 겁니다.
‘세미한 소리’는 단순히 소리가 크다거나 작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본질적인 소리냐 겉도는 소리냐로 봐야 합니다. 듣지 않아도 될 소리가 있고, 꼭 들어야 할 소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소리야말로 세미한 소리입니다. 책을 읽거나 친구와 대화하다가도 그런 세미한 소리를 듣고, 예배를 드리다가도 그런 경험이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그런 ‘세미한 소리’를 들었으며, 지금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듣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다른 이를 흉내 내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생명이 깊이에서 나오는 세미한 음성을 들으려면 영혼의 귀가 열려야겠지요. 저는 성경 기자들은 물론이고, 시인들에게서 그런 귀가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곽재구 시인의 『꽃으로 엮은 방패』에 나오는 ‘세월’이라는 시 전문을 읽어보겠습니다.
하얀 민들레 곁에 냉이꽃
냉이꽃 곁에 제비꽃
제비꽃 곁에 산새콩
산새콩 곁에 꽃다지
꽃다지 곁에 바람꽃
소년 하나 언덕에 엎드려 시를 쓰네
천지사방 꽃향기 가득해라
걷다가 시 쓰고
걷다가 밤이 오고
밤은 무지개를 보지 못해
아침과 비를 보내는 것인데
무지개 뜬 초원의 간이역
이슬밭에 엎드려 한 노인이 시를 쓰네
똑같은 길을 가면서도 세미한 생명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는 예수의 말씀은 아주 실질적인 겁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큰소리만 듣다가 결국은 세미한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잔 귀가 먹은 거지요. 오늘 우리는 생명의 세미한 소리를 실제로 듣거나 느끼면서 살고 있을까요?
남긴 자 칠천 명
여호와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은 엘리야는 굴 어귀로 나가서 섰습니다. 다시 소리가 들립니다. 굴 안에서 듣던 소리입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는 다시 하소연을 늘어놓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세 번이나 반복되는 내용입니다. 엘리야의 영혼이 얼마나 지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말씀을 이어갑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
내려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다메섹에 가서 선지자 역할을 감당하라는 겁니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서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답답하고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돈을 벌 사람은 돈을 벌고, 정치할 사람은 정치하고, 아이들을 가르칠 사람은 가르치고, 집안 살림을 맡은 사람도 그 일상을 감당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현실의 어려움 앞에서 자포자기하지 말고 선지자로서의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엘리야의 마음이 가벼워졌을까요, 부담되었을까요?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필요한 한 말씀을 18절에서 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가 가장 크게 낙심한 이유는 고립무원, 즉 자기 혼자 남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는 모든 여호와의 선지자가 죽임을 당했고, 모든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바알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여호와 신앙으로 진실하게 사는 사람이 칠천 명이나 남았다는 말씀을 들은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일단 눈에 보이는 일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깁니다. 어느 정도 교양이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조금 낫게 상황을 받아들이긴 합니다. 원하는 대학 입학에 실패하거나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지 못한 자녀들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격과 교양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게 끝장났다고 고함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저도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하면 죽겠다고 고함칠 겁니다. 그래도 방향은 압니다. 모든 걸 잃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모든 상황을 견딜 수 있다고 말입니다. 거꾸로 모든 게 있어도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게 허무에 떨어진다고 말입니다. 이런 말이 상투적으로 들리시나요?
칼 라너는 『기도의 절실함과 그 축복에 대하여』에서 기도 영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할 일을 몇 가지로 제시하는데, 그중의 첫 번째가 “잘 견뎌내고,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23쪽) 그 단락에서 몇 대목만 추려보겠습니다. “절망이 당신한테서 모든 것을 빼앗게 가만히 두십시오. 절망이 겉으로는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 당신은 유한하고 허무한 것만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빼앗기게 될 것이 아무리 위대하고 놀라운 것이어도 마찬가지이고, 또 그것이 당신 자신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 당신한테서 빼앗을 수 있는 것은 결코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칠천 명은 남겨두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살이가 깡그리 무너져도 행복할 수 있는 칠천 가지는 남습니다. 하나님이 남겨두신 칠천 가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원하는 십만 가지를 얻어도 행복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해서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하겠지요. 그런 눈은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 데서 주어집니다. 하나님 안에 있다면 그는 모든 걸, 즉 자기 자신을 잃어도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느끼는 고통이 너무 힘들기에 이런 말이 멀게 느껴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엘리야 같은 사람도 오죽했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했겠습니까. 그 어려움을 저도 잘 압니다. 그 현실과 하나님 신앙 사이의 간격은 제가 해결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외나무다리는 혼자 건너야 하듯이 여러분 자신이 혼자 뚫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호렙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은 ‘하나님의 산 호렙’은 모세가 하나님을 경험한 산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동족 이스라엘이 소수민족으로 살던 애굽에서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마흔 살에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여 양을 키우면서 살다가 여든 살에 우연히 호렙산에 올라갔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 머물지 말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해내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엘리야도 다메섹으로 가서 해야 할 일을 호렙산에서 전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모세나 엘리야처럼 신앙적인 영웅은 아니지만, 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니 들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험 없이 우리는 이전투구처럼 돌아가는, 때로는 답답하거나 무료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산 호렙’은 어디입니까?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는 놀라운 말씀을 들었던 순간은 또 언제입니까? ‘이건 정말 생명을 주는 하나님 말씀이야.’ 하는 경험이 있으신가요? 없으신가요? 여러분은 지금 성경이 말하는 이런 하나님 경험과는 아무 관계 없이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그럭저럭 살기에 바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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