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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2005.3.13.          

요 11:17-44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누가복음의 나사로와 요한복음의 나사로
요한복음의 특징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비교적 서술적 보도로 접근하는 공관복음에 비해서 변증적으로 접근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자료 선택에서 공관복음과 독립된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나사로’ 이야기도 잘 알려진 것이지만 공관복음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공관복음서 기자들만 이 사실을 몰랐을까요? 아니면 알면서도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판단했을까요? 물론 그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이야기(요 4장)도 공관복음 기자들이 전하지 않는 걸 보면 지금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누가복음 16장 19절 이하에 ‘나사로’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고 살았던 어떤 부자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이름입니다. 여기서 나사로는 생전에 어느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살아가던 거지였다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반면에, 이 세상에서 호화 호식하던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의 나사로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사로 이야기가 상당 부분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죽음’을 주제로 한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누가복음의 나사로는 죽은 다음에 하늘나라에 갔으며, 요한복음의 나사로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이야기는 뿌리가 같다는 뜻일까요? 원래는 누가복음의 나사로 전승만 있었지만 요한이 그것을 기초로 해서 또 하나의 나사로 이야기를 창작해 낸 것일까요? 우리는 2천년 전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실체적 진실을 모두 완벽하게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실체를 완벽하게 재구성해야만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전승사를 거쳤든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요한복음의 나사로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성서기자들은 그 당시 독자들에게 어떤 객관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기보다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신앙고백적인 차원에서 전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요한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었을까요? 다시 말하자면, 요한 공동체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죽음
오늘 본문의 배경은 나사로의 죽음입니다. 11장1절부터 시작되는 이 나사로 이야기는 우리 인간의 삶에 놓여 있는 실존과 파토스를 정확하게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는 그 유명한 마리아와 마르다입니다. 성서가 그들의 부모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걸 보면 세 남매만 살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 남매에게 심각한 일이 생겼습니다. 나사로가 심각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평소에 예수님과 가까운 사이였던 이들 남매들은 다른 곳에 계신 예수님에게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 소식이 예수님에게 전달되기 전에 이미 나사로는 죽었을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예수님은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이나 더 지체한 다음에 이 남매들이 살고 있는 베다니로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경과했다고 합니다(17절). 그 초상집에 조문객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이들의 가문이 꽤 괜찮았다는 뜻이겠지요. 어쨌든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참척의 슬픔에 빠져있는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예상 외로 늦게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두 자매 중에서 언니인 마르다가 먼저 마중을 나왔습니다.(20).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21). 물론 이어서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하고 말했지만 이 뒷부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르다가 집안으로 들어가서 동생 마리아를 예수님에게 보냈습니다. 마리아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32). 마르다와 마리아는 똑같은 말을 합니다.
그녀들의 이 말은 우선 오빠의 죽음으로 인한 안타까운 마음을 의미하겠지요. 오빠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가까운 사람이, 가족이나 친구가 세상을 떠난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잃었고, 삼십대 중반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을 때는 어느 정도 세상살이의 연륜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감당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를 잃었을 때는 그 아픔이 평생 계속되었습니다. 만약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에게 부모가 없었다는 게 옳다면 이들에게 오빠의 죽음이 더 큰 슬픔이었겠지요.
그녀들의 이 말에는 또 하나의 다른 의미도, 훨씬 본질적인 의미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있었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 말은 곧 이미 오빠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나쁜 병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죽기 전이라고 한다면 온갖 치료를 다 기울이고, 금식 기도라고 드리겠지만 죽은 다음에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이 죽음은 아무도 돌이킬 수 없는 우리의 결정적인 운명이며 실존입니다. 칼 바르트는 이 죽음의 문제를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죽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가까이, 어떤 사람에게는 좀 멀리, 그러나 우리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시간은 가고, 죽음은 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오고 시간은 우리에게서 떠나가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운명을 아무리 피해보려고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삶의 가능성은 쇠락하고, 우리가 만나는 삶의 방해거리들은 계속해서 훨씬 심각해지며, 우리의 희망과 기대와 계획들은 훨씬 심각하게 상대적인 상태로 빠져들며, 훨씬 제한적이고 훨씬 분명하게 해체의 길을 걷습니다. 이런 상황이 긴박해지면 질수록 우리도 아주 신속하게 빙점(氷点)을 향해 달려 나갑니다.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든지 않는지 상관없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태는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곳으로부터 왔던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할 그 사태말입니다.”(칼 바르트 신앙묵상).

나사로야, 나오너라.
오빠의 죽음으로 인한 절망과 체념을 호소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고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35). 이 뒤로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의 일반적인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묻혀 있는 무덤의 돌문을 치우라고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이미 시체가 썩기 시작했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대답에 상관없이 돌을 치우게 하시고, 하나님께 기도하신 다음, 무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사자로야, 나오너라.”(43). 그러자 죽었다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데, 손발은 베로 묶어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44).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듭니까?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그런 사건에 관심이 가나요? 과연 나사로는 부활한 것일까요? 일단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하더라도 부활한 건 아닙니다. 그는 다시 죽지 않을 영적인 몸으로 변화한 게 아니라 여전히 죽을 몸으로 다시 살았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어서 경험한 하늘나라를 자세하게 묘사하는 책들도 있습니다. 본인들이 그렇다고 하는데 내가 나서서 그렇지 않다고 말할 필요는 없지만 기독교 신앙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에 있는 게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건의 마지막 순간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는 나사로의 몸을 풀어주라고 말씀하셨지만 실제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가 자기의 그 경험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를 죽이려고 작정했다는 보도가(12:10) 나오는, 그 대목에서도 나사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곧 이 이야기에서 나사로 사건이 핵심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극적인 사건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서의 관심은 전혀 아닙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다른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예수
오늘 나사로 이야기의 전반적인 구조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전개되지 않습니다. 일단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이 이틀이나 머뭇거리셨다는 사실이 그렇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미리 예측하셨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에 나사로의 가족들이 당할 끔찍한 슬픔을 모른 체 하셨다는 건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눈 대화도 그렇게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라자로는 죽었다. 이제 그 일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다. 그곳으로 가자.” 그 순간에 토마가 다른 제자에게 이렇게 엉뚱한 말을 합니다.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 합시다.”(16).
또 하나의 작은 부자연스러운 표현이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저자는 마리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드린 적이 있는 여자였다.”(2절). 그런데 주님의 발을 닦아드린 사건은 12장에 가서야 실제로 일어납니다. 아마 저자와 독자들은 오늘 본문 사건을 전해 듣기 전에 이미 마리아가 어떤 여자였는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저자인 요한은 이 나사로 사건에서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사실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메시지에 관심을 보인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나사로의 시체가 이미 썩기 시작했다는 마르다의 대답을 듣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 나사로가 앓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이미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11:4). 요한복음 서론에 이미 영광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요 1:14).
영광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독사’는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glory, splender, grandeur, power, kingdom, praise, honor, brightness, brilliance, revealed presence of God, God himself, glorious heavenly being 등등. 결국 ‘영광’은 하나님 자신, 그의 현현과 연관된 어떤 상태나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 사건이 곧 하나님의 일이며, 그의 능력과 그의 통치를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요한의 관심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있었습니다. 그 이외의 요소들은 부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사건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훨씬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구약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건이 많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영광 자체만으로 요한복음의 특징이 있는 것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예수라는 사람에게서 일어났다는 것이야말로 요한이 말하려는 핵심이며, 초기 기독교, 특히 요한공동체가 믿고 있던 신앙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기도하신 내용은 곧 요한공동체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 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 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42).
오늘 본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곧 예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이 예수님을 통해서 극복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의 영광의 일치, 이것은 곧 기독교 신앙의 신비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 사건, 즉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그 믿음은 2천년 전 요한공동체의 믿음이었으면서 동시에 오늘 우리의 믿음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1: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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