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창조절 열째 주일, 2022년 11월6일
구약의 시편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경험이 문학적으로 표현된 문서입니다. 시 형식이라서 울림이 크긴 하나 이해하기가 조금 까다롭습니다. 단어나 문장이 어려운 게 아니라 그 안에 녹아있는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게 만만치 않습니다. 오늘 설교 성경 본문 중에서 17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이 문장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관해서 두 가지 개념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로우심입니다. 히브리어 원어인 ‘웨하시드’는 성경 번역본에 따라서 거룩하심, 은혜로우심, 인자하심, 사랑 등등으로 나옵니다. 저는 우리 일상과 연결해서 볼 때 ‘선하심’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시 23:6절에는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거의 비슷한 뜻으로 나옵니다.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은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을 의로우시며 선하시다고 찬송하는 것일까요? 오늘날 여러분도 그렇게 노래할 수 있으신가요?
하나님의 의로우심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행위’에서 의롭다고 말합니다. 한두 가지 행위가 아니라 모른 행위에서 의롭다는 표현은 과장으로 들립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일들이 오히려 많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정의로우신 분이 맞나, 그럴만한 능력이 있나, 하는 의심도 듭니다. 억울한 죽음도 많고, 악한 자가 승승장구하는 일도 많습니다.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고,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공정하지 않은 일들도 분명히 일어납니다. 그러나 ‘모든 행위’에서, 즉 전체에서 그분은 의로우십니다. 그걸 시편 기자는 뚫어본 것입니다. 전체에서 의롭다면 모든 부분에서도 의로운 겁니다. 개개인의 인생도 부분적으로는 우여곡절이 많으나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납니다.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사실을 단지 ‘말’이 아니라 삶 전체로 받아들인다면 불의한 세상에서도 우리는 시 145:1~5에서 보듯이 ‘왕이신 나의 하나님’을 높이고 ‘주의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 것입니다.
사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도 불의한 세상 앞에서 절망한 적이 많았습니다. 악하고 불의한 세상을 질타한 선지자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너희는 힘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 ”(암 4:1) 모양만 약간 달라졌지 이런 일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합 1:2) 시편 기자들도 불의로 인한 고통을 반복해서 하나님께 탄원했습니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시 26:5)
고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엑소더스 공동체이고, 유목민 공동체입니다. 제가 종종 표현하는 개념으로 바꾸면 영적 노숙자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늘 생존의 위협 가운데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인종 차별을 겪었고, 앗시리아 군대에 망했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세력 앞에서 그들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대표적으로 족장 설화에서 한 대목을 꼽을 수 있습니다. 야곱은 오랜 흉년 끝에 가나안을 떠나서 애굽으로 갑니다. 다행히 그곳에는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이 총리 자리에 있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와의 첫 만남에서 야곱은 “네 나이가 얼마냐?”라는 질문을 받고 자기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 나그넷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넷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고대 이스라엘은 못 볼 꼴 다 겪는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런 운명을 바꿔보려고 노력했으나 제국에 의해서 파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말하기에는 너무 거친 역사를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화를 내거나 하나님 신앙을 포기해야 마땅한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줄기차게 노래합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오늘 말씀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봅시다.
하나님의 선하심
17절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할 때도 의로우심과 마찬가지로 ‘그 모든 일’에서 선하시다고 노래합니다. 선하지 않게 보이는 실제로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일’에서는 분명히 선하십니다. 이런 신앙을 배운 바울은 롬 8:28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배웠고, 보통 그렇게 말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믿고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그런 분이 계신데, 일상을 꾸려가기 벅찬 분들에게 이런 말을 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나중에 일이 잘 풀린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겪는 고통을 견디기 힘듭니다. 더구나 나중에 일이 잘 풀린다는 보장도 없기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는 더 어렵습니다.
구약 <욥기>에는 욥의 친구들이 나옵니다. 그들의 주장은 겉으로 보면 아주 은혜롭습니다. 핵심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욥이 당한 재난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으니 회개하고 돌아서라. 둘째, 욥의 불행은 믿음을 단단하게 해주려는 하나님의 시험이다. 참고 견디면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실 것이다.’ 욥은 친구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자기가 당한 대재난의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끝까지 버팁니다. 이런 욥의 운명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치열하게 투쟁하다가 고난을 겪고 결국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예수의 이런 운명을 종교적 도그마로만 받아들이면 그 실체적 진실을 외면하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운명 앞에서 우리는 가장 억울한 죽음을, 즉 죄가 없는 자의 죽음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는 모든 이들에게서 버림받은 자의 운명을 대표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는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습니다. 기도하는 그의 몸에 흐른 땀이 핏방울처럼 보였다고 성경 기자는 묘사합니다. 다음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는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쳤습니다. 공생애 중에서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라고 토로할 정도로 외로운 길을 갔습니다. 예수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예수에게 닥쳤던 이런 재난과 불행한 운명 앞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할 수 있을까요? 솔직하게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우리는 말로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제로는 세상에서 배우고 경험한 가치관에 치우쳐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을 정도로 우리의 영혼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빼곡하게 들어차 버린 겁니다. 어떤 신학자가 말했듯이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은 이방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겉모양은 그리스도인이고 삶의 실질적인 내용은 이방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작은 일로 삶 전체가 흔들리는 거 아닙니까.
오늘 본문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에서 저는 하나님의 의로우심보다는 선하심이 더 우선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유적으로 여러분이 어렸을 때 부모에 대해서 느꼈던 감정을 기억해보십시오. 형에게는 용돈을 더 주고 자기에는 적게 준다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용돈을 적게 받아도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안다면 뭔가 손해를 보는 듯해도, 즉 뭔가 정의롭지 못한 듯해도 잠시 불편할지 모르나 결국은 극복합니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기에 완전히 일치해서 살기는 힘듭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 사이에도 완전한 정의가 실현될 수 없습니다. 기본에서 서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길 줄 안다면 그런 불일치를, 오늘의 주제로 바꿔서 의롭지 못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바탕에는 옳고 그름보다는, 즉 정의롭냐 아니냐 보다는 존재에 대한 사랑이 있느냐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높은 가치로 두었지(고전 13:13) 정의를 높은 가치로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선하신 존재로 경험하느냐가 핵심입니다. 그걸 분명하게 절감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경험
하나님을 어떻게 선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사랑이 가득한 분으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이미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그게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아이들이 저절로 철드는 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오늘 시편 기자의 고백은 우선 하나님 경험이 분명한 데서 나옵니다. 흔한 말로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 시 145:18~21절에 하나님 경험에 관한 묘사가 나옵니다. 18절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이어서 19절에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에게 여호와는 정말 선하시고 좋으신 분이십니다.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2)라고 반복해서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 없이 하나님 신앙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특히 예수를 통한 복음 전통 가운데서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하나님 경험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 생활과 일상에서 하나님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겉으로야 하나님이라고 말하나 마음은 하나님에게 닿아있지 않습니다. 교회 활동에만 관심이 있을지도 모르고, 교인들과의 관계만을 중요하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자체를 생각하고 가까이 가는 일과 교회 활동은 다른 겁니다. 교회 업무나 활동도 중요하나 본질은 하나님 경험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으니 본질 외의 것에 너무 민감하고, 그런 과정에서 섭섭한 생각도 많이 들겠지요. 그건 인지상정이니 어쩔 수 없으나 그런 방식으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합니다.
하나님 자체를 생각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비유로 설명하겠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저는 아침에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밝아오는 동창을 먼저 봅니다. 동쪽 동산 풍경은 매일 다릅니다. 동산이 거기 있고, 그 너머에서 해가 천천히 떠오르는 걸 봅니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순간입니다. 침대에 걸터앉아서 잠깐 기도하고, 곧 일어나 화장실을 향합니다. 그 순간이 저에게 또 한 번 환희로 다가옵니다. 오늘도 내가 두 발로 서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합니다. 흔한 말로 ‘존재의 기쁨’입니다. 그런 경험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간섭도 받지 않습니다. 내가 누릴 수 있을 만큼 얼마든지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살아있음’의 깊이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선하신 하나님께서 저에게 삶을 풍성하게 누리도록 주신 선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병에 걸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어쩌지, 하고 묻고 싶으신가요? 그런 극한의 고난까지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런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할 수 있게 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히틀러 나치즘 치하에서 사형수가 된 20세기 순교자로 불리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사형이 집행되기 얼마 전 감옥에 갇혀서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으로 보호받는다는 사실을 노래한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요. 믿기 힘드신가요? 정말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런 나락으로 들어가 보신 적이 있나요? 지금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하나님 경험의 깊이를 부정해도 될까요? 아직은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죽기 전까지 그쪽을 향해서 한 걸음씩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 외에 여러분이 인생살이에서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찾는 삶
오늘 시편 기자의 고백과 찬송은 우리에게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요청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각자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찾는 노력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여러분의 일상에서 찾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졌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어디서 경험하게 될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나님 경험은 각각 고유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러분이 찾기 시작한다면 분명히 찾아질 것입니다.(마 7:7)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이들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노력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불의로 인해서 희생당하거나 이런저런 일로 삶의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힘을 얻도록 연대해야겠지요. 그런 이들이 때로는 외국인 노동자들일 수 있고, 성 소수자일 수도 있고,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을 기다리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교회에서 시험받아서 힘들어하는 이들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재정 규모에서 볼 때 교회 밖으로 나가는 비중이 다른 교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큰 편입니다. 이런 노력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찾아가는 작은 노력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 세상에서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사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찾아가는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근본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인식하게 해주셨습니다. 가장 가깝고 신뢰할만한 대상이 바로 ‘아빠 아버지’라는 사실을 온 영혼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당신에게 끔찍한 운명이 닥쳐왔으나 그걸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궁극적인 미래를 맡겼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하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걸어간 그 믿음의 길을 뒤따라서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예수에게 일어났던 부활 생명이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그 약속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은 지금 살아있는 동안에 이미 하나님께서 얼마나 의로우시고 선하신 존재인지를 실감하기에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그분을 마땅히 송축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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