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
(롬 10:8-13)
신구약성경은 모두 구체적인 삶을 그 배경으로 해서 기록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성경은 하나도 없습니다. 신비한 상징 언어로 진술된 구약의 여러 묵시문학적인 문서들이나 신약의 요한계시록도 역시 구체적인 역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언어로 진술된 바울의 편지는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 형식의 로마서도 그런 구체적인 삶의 배경에서 집필되었습니다. 가장 큰 배경은 유대교입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유대교라는 영적인 배경에서 자랐으며,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탓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도 원시 기독교는 유대교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유대교와 직간접적으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가 유대교와 완전히 다른 종교로 자리를 잡았지만 초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와의 관계를 정립해야 할 미묘한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바울입니다. 그는 아주 강력하게 유대교와 전혀 다른 복음의 세계를 제시했습니다. 바울 덕분에 기독교가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지지 않게 된 셈입니다. 바울의 이런 신학적 투쟁을 알려면 유대교의 특징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율법 의, 믿음 의
유대교의 특징은 율법입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언어로 말씀을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교는 일종의 언어 종교인 셈입니다. 고대 종교 중에는 언어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교도 많았습니다. 어떤 종교는 춤을 통해서, 또는 명상을 통해서 신을 만난다고 주장했습니다. 건축을 통해서 그걸 경험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심리와 열정에 의지하는 종교들입니다. 그런 열광적이고 신비주의적 전통은 오늘의 기독교 안에도 들어 있습니다. 기도와 찬송을 열광적으로 합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일종의 종교적 엑스타시를 경험합니다. 유대교의 전통은 언어에 있습니다. 그 뿌리는 모세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해서 많은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 중심 내용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걸 토라라고 합니다. 크게 보면 구약성서 전체가 토라, 즉 율법입니다.
그 율법의 근본의미를 바울은 롬 10:5절에서 정확하게 제시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레위기 18:5절의 인용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가 여기서 중요합니다. 율법을 행하면 의를 얻는다, 또는 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행한다는 게 무엇인지 다른 것은 접어두고 십계명만 생각해보십시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첫 계명이고,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마지막 계명입니다. 그 사이에 있는 여덟 계명도 모두 이 두 가지에 연관됩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다른 부류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지켜야 할 구체적인 내용이 모세 오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소가 이웃집의 밭에 들어가 농사를 망쳤을 경우에 어떻게 배상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도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정확하게 준수되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사회가 되겠지요.
율법주의를 요즘 말로 바꾸면 법치주의입니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충돌을 법으로 관리하는 제도입니다. 사람은 모이면 시시비비를 따져야 할 일이 늘 일어납니다. 비가 오면 나막신 장사를 하는 아들이 울고, 날이 맑으면 우산 장사를 하는 아들이 우는 부모의 입장과 비슷합니다. 여기서 법이 필요합니다. 법이 없다면 힘으로 자기의 이익을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그런 세상은 카오스입니다. 물론 법이 이현령비현령으로, 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방식으로 오용될 염려가 없지 않지만 법을 통해서 정의로운 공동체를 세운다는 주장은 인정해야 합니다. 현재까지 인류가 선택한 최선의 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얻는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정당합니다. 초기 기독교도 역시 이런 생각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단순히 법조문에 매달리는 편협한 종교생활이라고 무시하면 곤란합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만을 염두에 두고 율법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오해한 것뿐입니다. 원래 율법은 그렇게 인간을 편협하고 독선적이게 만드는 체제가 아닙니다. 율법이라는 문자에만 매달리게 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형식주의, 행동주의, 도덕주의가 아닙니다. 율법은 믿음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롬 10:6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설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신 30:14절을 인용해서 설명합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는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입과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우선 입으로 율법을 읽고 외워야 합니다.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듯이 율법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율법은 동시에 마음을 요구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게 합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마음에 담아 고백하듯이,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고 기도하듯이 말입니다. 바울이 인용한 신 30:14절은 율법의 실체에 대한 정확하고도 놀라운 진술입니다. 율법은 사람의 존재 전체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는 유대교의 전통을 바울도 그대로 인정합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롬 10:9) 이런 전통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율법 정신의 전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와 일찌감치 결별하지 않은 이유였습니다. 바울 이외의 사도들과 예수님의 동생이 여전히 유대-기독교라는 절충적 성격의 공동체를 유지한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그런 유대교와, 그리고 유대-기독교와도 선을 그었을까요?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율법의 근본정신을 그렇게도 잘 알고 있던 바울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
그 대답은 바울이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의 본질을 정확하게 뚫어보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바울이 볼 때 유대인들의 율법 신앙은 결국 사람의 의에 머물렀습니다. 사람이 의를 세우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의’를 우습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사람이 잘난 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고상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롬 10: 2)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없으면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율법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요즘 신앙생활을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여기에 비추어보면 됩니다.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특별한 분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귀한 일들입니다. 바울이 볼 때 이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올바른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데 있었습니다.(롬 10:2b) 뭘 모르고 무조건 헌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리켜 바울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롬 10:3) 그렇습니다. 보기에 좋은 것이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이비 이단들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있습니다. 그들이 뭘 모르고 있다는 게 문제이겠지요. 모른 채 열정적으로 행하기만 하다보면 결국 자기 의에 사로잡히게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입과 마음에 담고 있는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가 어찌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다는 말인지요. 그들이 동의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롬 10:9절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가 바로 구원의 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너무나 쉬운 대답이래서 실망이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는 그게 잘 안 됩니다. 대개는 자기 의에 묶여 있습니다. 자기 의가 힘 드는 일인데도 거기에 매달립니다.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자기 의에 매달리는지 우리의 일상에서도 쉽게 나타납니다. 작게는 우리의 자존심이 바로 자기 의입니다. 자존심이 조금만 손상당하는 것 같아도 우리는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사실 자존심이 없으면 그것도 문제겠지요. 자존심 자체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결국은 자기 의로 귀결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다른 것들을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자녀를 괜찮은 인간으로 키우려는 것도 역시 엄격하게 말하면 자기 의입니다. 자녀들이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화가 납니다. 사업도 역시 자기 의로 작동됩니다. 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문적인 업적으로 죽느니 사느니 합니다. 한 국가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도 자기 의가 강할 겁니다. 아무리 옆에서 말려도 자기의 뜻을 밀고 나갑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세종시 문제로 소위 친이(李)와 친박(朴)의 대결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보다 더 옳기’ 때문에 자기 의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소모적인 논쟁을 그치지 않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자기 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결핍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무지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무지에서 오는 사람의 자기 의를 무효처리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고 했습니다.(롬 10:4)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의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매달릴 필요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형제끼리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동생과 형은 서로 자기가 옳다는 논리를 댑니다. 증거를 들이밀기도 하고, 자기를 변호할 친구를 불러옵니다. 형은 동생보다 자기가 부모님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린다고 주장합니다. 동생도 똑같이 말합니다. 부모가 그들에게 그들의 행위를 모두 용서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부모의 용서는 바로 하나님의 의와 같습니다. 그 앞에서는 형과 동생의 자기 변론은 무의미합니다. 실제로 누가 더 잘했는지, 또는 더 못했는지 하는 차이는 있겠지만 용서한다는 부모의 말 앞에서는 그 차이가 무의미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차이를 확인하는 일에 매달린다면 부모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녀들이겠지요. 바울은 지금 이런 연민의 심정으로 유대인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 이미 끝난 자기 의를 붙잡고 하나님의 의를 외면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만인 구원(?)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의만 설명하면 자기 의는 저절로 설명이 될 겁니다. 바울은 그것을 롬 10: 11과 13절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사 28:16)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욜 2:32) ‘누구든지’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의를 얼마나 실천했는지, 얼마나 교양이 있는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하는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롬 10:10) 바울은 이어서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셨다고 합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알았습니다. 자기 의가 아무리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구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과 상충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차별이 없는데 율법은 차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차별 없이 사람을 보시는 원래의 하나님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누구든지’의 신앙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차별이 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혁명적인 시각의 전환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단서가 있습니다. ‘그를 믿는 자’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겁니다. 여기에도 차별이 있는 거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결국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 생각이 잘못 된 거는 아니지만 충분한 거는 아닙니다. 왜 그런지 두 가지 방향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이미 바울이 말한 것인데, 구원자는 한 분이며, 그분이 모든 사람의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인류와 세계 전체를 구원하실 분은 한 분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가 주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걸 보편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변증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런 변증을 위해서라도, 이는 곧 선교 책임인데, 우리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밀쳐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바로 그들에게도 주님이십니다. 한 분이신 바로 그분이 그들까지 구원하십니다. ‘누구든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는 바로 교회 안의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이십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은 교회 안의 사람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까지 포함한 만인의 구원이 가능한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 모두 사순절 첫 주일에 이 사실을 기뻐 찬양합시다.(사순절 첫째 주일, 2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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