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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mms://61.100.186.211/pwkvod/dawp/dawp_080413.wmvmms://wm-001.cafe24.com/dbia/dawp_080413.mp3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2008.4.13. (벧전 2:18-25)

베드로전서를 비롯해서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시대의 특징은 노예 제도가 일반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에도 노예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합니다. 실제로 교인들 중에서도 노예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신약성서가 로마 제국과 직간접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역사적 상황을 놓고 본다면 이런 현상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고대의 제국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노예제도를 근간으로 하는데, 로마 제국은 아주 유별났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잡아온 적국의 포로를 노예로 삼았습니다. 이런 노예들의 노동력을 통해서 로마를 지탱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 노예들이 많은 이유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노예들에게 참된 희망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그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는 노예가 아니니까 이런 말씀은 우리와 상관없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고대 로마 시대와 같은 의미의 노예는 아니지만 상하 관계로 구성되는 사회 안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무늬만 다른 노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노예에 관한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선 베드로전서 기자가 말하려는 것을 따라가 봅시다.

복종하라.
그는 노예 신분의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끊어서 주장합니다. 더구나 “두려운 마음으로”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의 노예생활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을 겁니다. 미국의 노예제도를 고발한 <엉클 톰>이라는 영화나 <뿌리> 같은 영화에서 노예들의 삶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약간이나마 맛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인권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소나 돼지처럼 노예시장에서 사고 팔렸다고 하니, 더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 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도망치는 노예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잡아들이는 전문적인 노예 사냥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최근 미국의 역사만이 아니라 로마의 역사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던 것들입니다. 노예들이 비인간적으로 다루어지는 형편이라면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 투쟁하라고 말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닐는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노예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더구나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이 아니라 고약한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칼 마르크스가 이런 구절을 읽었다면 기독교야말로 <민중의 아편>이라고 본 자기의 주장이 옳았다고 쾌재를 부를지 모르겠군요.
마틴 루터도 이런 점에서는 욕을 먹기가 안성맞춤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한창 무르익고 있을 때 독일에서는 ‘농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농민은 로마 시대의 노예 못지않은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소작농과 같았습니다.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땅 주인만 배부르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농민들은 무장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같은 종교 개혁자였던 뮌처는 농민들을 지지한 반면에 루터는 그들의 폭력적 저항을 반대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많은 역사가들에게 인정을 받지만 바로 이 농민전쟁에 대한 반대는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루터가 그 당시 군주들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농민전쟁을 반대했다고 말입니다. 고약한 주인에게도 복종하라는 오늘 본문의 말씀과 농민전쟁을 반대한 루터의 입장이, 그리고 위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주장(롬 13장)이 모두 비슷한 논조입니다. 이런 것들이 과연 옳은 가르침일까요? 아니면 기독교가 현실을 외면한 체, 관념 안에 갇혔다는 증거일까요?
성서는 이 세상을 관념적으로만 접근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원래 악하기 때문에 아예 상관하지 말고 ‘저 세상’만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서는 이 세상을 훨씬 현실적으로 봅니다. 문제는 여기서 무엇이 현실이냐 하는 관점의 차이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성서기자는 이 세상에 ‘고약한’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 밑에서 노예 기독교인들이 당하는 고통은 정말 ‘억울한’(19a) 일입니다. 성서기자는 악한 주인이 얼마나 야비하고 악랄한지, 노예들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는 게 이들의 삶을 지켜낼 수 있는 현실일까요? 싸워서 권리를 확보하라는 것일까요? 그런데 성서기자는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대답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 당시의 노예제도는 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에 노예들이 폭력적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죽음을 담보해야만 했습니다. 실제로 주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도망가는 것조차 용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노예전쟁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잔인하게 학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악과의 소모적인 싸움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닙니다. 루터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그 당시에 농민들의 반란은 도저히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농민전쟁은 실패했습니다. 루터는 군주들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농민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전쟁을 거부한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일까요? 아니, 어느 쪽이 생명의 현실에 가까울까요? 죽는 게 분명한데도 무모하게 저항하라고 닦달하는 건가요, 아니면 구조 악 앞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는 건가요? 각각 시대와 형편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을 칼로 무를 자르듯이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마음을 열고 성령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면 어떤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무모한 싸움을 피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둘째, 생명의 현실은 사회제도의 개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이 관점이 훨씬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성서는 생명의 현실이 노예제도를 극복하는데 한정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노예제도는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해결해나가야 할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생명의 현실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금처럼 호사스럽게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생명의 온전한 현실에 참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보면 이게 확실합니다. 신앙인들은 이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복지향상이나 휴머니즘 제고와 일치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노예들에게 무력으로라도 투쟁하라고 강요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세계화의 물결이 지구촌 전체를 밀물처럼 뒤덮고 있습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벽을 허물고 지구촌 전체를 한 나라처럼 꾸려가자는 요구입니다. FTA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몇 년 전부터 우리 농민 대표들께서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이런 세계화 운동에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이런 저항에 기독교의 진보 측 인사들도 동참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크게 보면 그런 쪽에 속합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농민 대표들이 자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실제로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습니다. 세계화 반대가 과연 우리의 목숨을 걸고 싸울만한 사건인지, 저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선포하는 목사들이 섣부르게 이런 과격한 반대투쟁에 연대함으로써 결국 이런 죽음에 간접적으로나마 책임을 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약한 주인에게도 복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어떻게 보면 비겁해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순교를 불사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을 비겁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투쟁해야 할 대상이, 요즘 식으로 주적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노예로 산다는 것은 비록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 따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독교 신앙을 보존할 수는 있었습니다. 2천년이 지난 오늘의 사회과학적 시각으로는 초기 기독교의 이런 신앙을 비판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은 싸움을 피하는 것이 곧 노예 기독교인들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옳았습니다. 만약 노예들을 향해서 ‘저항하라.’고 가르쳤다면 기독교는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정의
저는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이 가르침이 기독교가 역사에서 살아남았다는 그 한 가지 사실에 근거해서 옳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살 궁리를 눈치로 때려잡은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훨씬 본질적인 신앙적 확신에서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 한 가지 사실에 매진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라는 확신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초기 기독교인들이 노예제도의 잘못을 모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거대한 악과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네로 황제와 도미티안 황제 시대에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을 벌였습니다. 지금 당장 폭동을 일으켜서 끝장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사실을 그들은 예수님 사건에서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죄를 지은 일도 없었고, 거짓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당한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았습니다.(22,23절) 그 내용은 70인 역의 이사야서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셨습니다.”(23b)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긴다는 게 무슨 뜻인지 예를 드는 게 좋겠군요. 학교 교실에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중에는 정말 못된 아이도 있습니다. 그 아이는 왕초노릇을 합니다. 아이들에게서 돈도 빼앗고, 때로는 구타하기도 합니다. 돈을 빼앗긴 아이는 다시 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맞은 아이는 자기도 한 대 때리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서로 씩씩거리면서 화를 내고,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도 못된 아이에게 당하기는 했지만 마음이 그렇게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종례 시간이 되면 선생님이 오셔서 모든 걸 정상적으로 돌려놓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정의롭게 심판하신다는 믿음으로 현실의 고통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태도는 약자의 자기 합리화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 주먹이 센 사람이 최고지 무슨 하나님의 심판을 믿느냐고 말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믿기 힘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간혹 정의로운 것 같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힘과 돈이 정의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실현할 최후의 보루라 할 사법부도 돈의 힘으로 좌지우지될 때가 많은 걸 보면 더 이상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말할 기분이 나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자리할 여유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경험과 생각만으로는 그런 확신이 들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과 생각에 의존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확신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그런 확신으로 사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늘 부족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넉넉합니다. 넉넉할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정도로 차고 넘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이사야 53:4,12절을 인용한 오늘 본문 24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스도 덕분으로 우리는 죄의 권세를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매 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분으로 우리의 상처는 치료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그에게 일어난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에 모든 마음을 걸어두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에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맡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십니다. 초기 기독교인의 신앙에서 바로 이 사실이 중요했습니다. 이 세상의 악한 힘은 자기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 대상을 십자가에 처형시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은 십자가까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들의 한계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저주의 대상이었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입니다. 그 부활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모욕은 더 이상 절망과 무기력증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의 설교를 듣고 오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불의에 전혀 저항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저항은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자기가 선택할 문제입니다. 각자의 살림살이를 조금 더 윤택하게 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돕는 일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행할 일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핑계로 자기 안일에만 빠져 있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런 투쟁이 우리 삶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큰 승리가 이미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것을 알고, 믿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으며,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에 치우치지 않으며,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님의 가장 분명하고 정의로운 심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베드로전서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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