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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사 62:1-5)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62:1-5, 주현 후 둘째 주일, 2016117

 

1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2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3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4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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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나의 결혼>

중국 난징 유니온 신학교 교수 He Qi2001년 작품

 

전체가 39권인 구약성경을 크게 분류하면 첫째는 모세오경이고 둘째는 선지서이고 셋째는 성문서입니다. 선지서의 분량이 가장 많습니다. 선지서는 선지자들의 활동을 담은 전기 선지서와 그들의 설교를 담은 게 후기 선지서로 분류됩니다. 후기 선지서도 다시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로 분류됩니다.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는 에스겔, 예레미야와 더불어 유명한 대선지서에 포함됩니다. 대선지서는 각각 분량이 방대합니다. 이사야만 해도 66장에 이릅니다. 글을 양피지에 기록하던 고대 근동에서 이런 정도의 글을 담으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 66장은 이사야라는 한 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서로 다른 시대에서 활동하던 세 명의 이사야에 의해서 선포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제3 이사야의 설교로 알려진 56-6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편의상 그를 그냥 이사야로 부르겠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바벨론포로 귀환 이후 20년 어간입니다.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된 이후 예루살렘 주민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나라를 잃고 일종의 인질처럼 끌려간 이들의 삶이 어땠으리라는 건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유대의 전통을 포기하고 바벨론 문명에 동참해야만 했습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삶도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유대민족을 자기들 제국에 동화시키기 위해서 여러 정책을 펼쳤습니다. 가장 중요한 정책이 종교생활의 억지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제사장 제도도 해체시켜서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바벨론 총독이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을 통치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저항이 산발적으로 일어났지만 자신들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대다수의 고대 근동의 작은 민족들은 그런 방식으로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런 바벨론 포로생활이 50년쯤 흐른 뒤인 기원전 538년에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린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고국으로 돌아가서 예루살렘 도시를 복원하고 성전을 재건하라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1). 꿈에 그리던 일이 현실로 일어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유대 총독으로 임명된 세스바살의 통솔을 받아 그 일을 추진했습니다. 그간의 과정이 구약성경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도시 복원과 성전 재건축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재정도 부족하고, 예루살렘 주민들의 의견도 분분해서 20년 동안 지지부진하다가 기원전 520년에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 어려운 20년 동안의 시대가 제3이사야의 역사적 배경입니다.

 

20년 동안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봐야만합니다. 모든 성경이 다 그렇지만 이사야는 아주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을 놓고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시대 50년을 거치면서 유대의 모든 전통이 훼손되었습니다. 유대의 구심점인 성전은 이미 오래 전에 파괴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양피지들은 다 분실되거나 불에 탔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예루살렘 주민들의 생각이 서로 충돌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크게 세 종류의 주민들이 거주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에도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살던 사람들이 있었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 그리고 바벨론의 동화정책에 따라서 예루살렘에 들어온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 중에는 예루살렘 재건과 성전 재건축을 위해서 새로 토목건축 기술자들과 노동자들도 제법 많았습니다. 이들의 이해타산이 달랐고, 생각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20년의 세월이 흐른 겁니다.

 

1945년 해방 이후의 한반도를 생각하면 25백 년 전 당시 예루살렘이 처한 형편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제 식민시대에도 여전히 한반도에서 평범한 민초로 살던 사람들이 제일 많았습니다. 친일 활동을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 이들도 있고,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이들도 있습니다. 국외로 나가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온 이들이 있습니다. 무력으로 저항한 이들도 있고, 외교적인 노력을 한 이들도 있습니다. 한반도에 들어와 살던 일본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해방 이후 곧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다가 3.8선 이북에는 승전국 소련군이 들어오고, 이남에는 미군이 들어와서 남북이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책임이 없는 나라가, 아니 피해를 입은 나라가 승전국들에 의해서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세월이 70년이 넘었습니다. 1950년에는 6.25 남북전쟁까지 일어나서 한반도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 한 일은 한 나라가 쫄딱 망하는 일이 다른 나라에는 발전의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가장 크게 이익을 보았고, 미국의 군수업자들도 큰 이익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미국 의회 도서관 입법 심의 연구기관인 의회 조사국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작년에 대한민국은 세계 최대의 무기수입국입니다. 우리는 78억 달러,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91,299억 원의 무기를 수입했는데, 그중에 70억 달러가 미국제품이었습니다(시사IN 434, 21쪽 참조). 미국과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통일을 원할까요?

 

이사야의 설교를 듣고 있는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루살렘 재건과 성전 재건축 등등에서 20년 가까이 아무런 진척이 없는 탓에 크게 실망해 있었습니다. 패배의식이나 냉소주의에 빠진 이들도 많았을 겁니다. 이런 기회에 한 몫 잡으려고 얄팍한 술수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모든 게 카오스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말로 시작됩니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의 간절한 심정이 전달 될 겁니다.

 

시온의 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시온을 격려해야 하므로, 내가 잠잠하지 않겠고, 예루살렘이 구원받기까지 내가 쉬지 않겠다.

 

이사야는 말씀 선포를 쉬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개역개정으로는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았지만, 새번역 성경과 히브리어 성경과 루터의 독일어 성경에 특징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 때까지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이사야가 희망하고 있는 내용이 그 표현에 담겨 있습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시온의 의가 빛처럼 드러날 때까지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 모두의 정신적인 고향이고 시온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다른 단어입니다. 시온, 또는 예루살렘의 의가 빛처럼 드러난다는 것은 유대가 세상에서 인정받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른다는 것은 유대가 온 세계에서 자랑스러운 민족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 사실을 2-4절에서 풀어 설명했습니다. 이방의 모든 나라들이 유대의 공의를 보고, 모든 왕들이 유대의 영광을 볼 것이며, 유대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릴 것입니다. 3절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유대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아름다운 왕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는 앞으로 더 이상 버림받은 자로 불리지 않고, 유대 땅도 황무지로 불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얻을 새 이름은 헵시바와 쁄라입니다.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는 뜻이고, 쁄라는 결혼한 여자라는 뜻입니다. 유대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민족이 될 것이며, 버림받은 여자가 아니라 결혼한 여자로 불릴 것입니다. 여자라는 표현은 비유입니다. 독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요즘과 달리 당시는 뭔가 크게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5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과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한 문장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과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한다.’는 표현보다 더 멋진 표현은 찾기 힘듭니다. 신랑에게 신부는 모든 것이 좋아 보이고, 신부에게 신랑도 그렇게 보입니다. 그들은 오직 상대방을 통해서만 기쁨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예루살렘의 유대 백성들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실감 있게 들렸을까요? 아니면 공허한 울림으로 남았을까요? 지금 우리는 이사야의 이 말을 실감할 수 있나요?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건 아닐까요?

 

우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할 정도로 우리가 하나님의 소중한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들어야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고 기뻐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 젊은 청년들이 결혼 대상자를 찾는다고 해봅시다. 외모, 인간성, 연봉, 학력, 가문 등을 볼 겁니다. 이런 조건이 좋으면 결혼 대상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하나님에게는 이런 기준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구약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은 순종 여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내치십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망한 이유도 유대의 불순종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선악과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모든 먹을거리를 먹어도 좋지만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아담과 이브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불순종의 첫 사건입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도 높은 노동과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고, 결국 죽음의 운명에 떨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사무엘이 유대의 첫 왕 사울에게 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도 기억하실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그것을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걸 신학적으로 연구하고 보존하는 이들을 서기관이라고 하고, 그것을 실제 삶으로 실천하는 이들을 바리새인들이라고 합니다. 율법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에 충실했던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모독자로 몰았고, 급기에 십자가에 처형당하도록 내몰았다는 점에서 율법 자체를 하나님의 명령과 일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이 있는 유대인이나 없는 헬라인 모두 죄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3:9).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이사야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율법에 순종했기 때문이 아니라, 즉 그들이 하나님 마음에 들 정도로 예쁜 짓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그들을 선택하셨고 자기 백성을 삼으셨고, 그래서 그들을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 자신에게 근거한 것이지 사람에게 근거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무언가 그분의 뜻에 맞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은 선한 것이기는 하나 영적인 사태를 정확하게 짚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은 일방적인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위 탕자의 비유’(15:11-32)를 보십시오. 아버지는 유산을 받아 가출한 둘째 아들이 환락에 몰두하다 돈을 다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베풀고 기뻐했습니다. 그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지만 그가 실제로 변하여 새사람이 됐는지 아닌지는 아버지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들에게 훈계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무조건 받아들였습니다. 반면에 아버지 집에 머물면서 모범적으로 살았던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설득합니다.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서 돌아온 것이니 잔치를 베푸는 게 마땅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우리는 다 첫째 아들처럼 어떤 기준으로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을 그렇게 몰아가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이 사실을 이사야는 분명하게 보았고, 그래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려면 한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니 제멋대로 살아도 좋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할 분들은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 기뻐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기뻐할 정도로 우리가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도 하나님이 기뻐할만한 존귀한 존재입니다. 연봉이 형편없어도 하나님이 기뻐할만한 존귀한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존경받는 전문직으로 살지 않고 전업주부로 살아도 하나님이 기뻐할만한 존귀한 존재입니다. 동화처럼 설명하면 우리는 다 거지 옷을 입은 왕자와 같습니다. 겉으로는 거지라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왕자이기에 자존감을 잃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거룩한 자존감에 휩싸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말에 실감이 갑니까

 

거룩한 자존감을 제가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약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우주물리학과 고생물학 책읽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략 140억 년 전 우주 빅뱅 이후 90여 억 년쯤 지나서 태양이라는 별과 거기에 속한 지구나 생겼고, 지구가 시작되고 5억 년쯤 지나서 원시적인 생물이 지구에 출현했고, 다시 30억 년쯤 지난 캄브리아기에 지구에는 생물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오랜 세월이 거치고 지금부터 3백만 년 전쯤에 인류의 원시 조상이라 할 수 있는 호모에렉투스(직립인)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2천년쯤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앞으로 그분의 재림으로 우주 전체는 완성될 것입니다. 이 전체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자기계시’, 즉 하나님입니다. 그 전체 역사에 저는 한 점으로 참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에, 즉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이 제가 붙들고 있는 거룩한 자존감의 토대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제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희망하고 살아가는 저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저의 이런 신앙에서 핵심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는 소리가 났다고 복음서 기자가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세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과 하나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인생은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예수와 더 긴밀히 하나가 되는 과정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이런 길을 가는 우리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멘.


이사야 62:1-5
https://youtu.be/AyBg3L9ef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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