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생명이다
신명기 30:15-20, 주현절후 여섯째 주일, 2011년 2월13일
오늘 설교 본문인 신명기는 모세의 설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40년을 유목민으로 살다가 이제 가나안을 목전에 둔 모압에서 행한 설교라는 것입니다. 전체가 34장입니다. 이 긴 연설문을 모세가 한 자리에서 행한 설교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사실 신명기는 어떤 한 사람이 쓴 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온 겁니다. 그 이스라엘의 역사를 전제하지 않으면 이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역사는 구체적으로 바벨론 포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당연히 지켜주신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패망했습니다. 왕족과 많은 지도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고, 이스라엘 지역은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이런 역사적 사실 앞에서 두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여호와 하나님이 누군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창세기가 진술하고 있듯이 창조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스라엘의 몰락 원인은 이스라엘 쪽에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 관점을 가리켜 신학은 신명기사관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고유한 역사이해입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 신 30:16-18절이 이를 명시적으로 진술합니다. 너무 간단한 논리라고 생각되나요? 결론은 간단하지만 거기에 이른 과정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을 읽을 수 있어야만 성서의 세계가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우선 이렇게 질문해보십시오. 신명기의 역사 이해는 옳은가요?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명령을 지키면 ‘생존하며 번성’할까요? 그리고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기면 ‘반드시’ 망할까요? 인류 역사가 이렇게 흘러왔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이 수천 년 동안 시련을 많이 당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라를 지키는 걸 보니 신명기의 보도가 옳은 것 같다고 말입니다. 심지어는 미국이 저렇게 세계 초일류 국가로 힘을 발휘하는 걸 보니 하나님을 믿는 나라답다고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큰 능력을 발휘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예수를 잘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순박하고 순진한 믿음이긴 하지만 정확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은 제국이었지만 결국 망했습니다. 이스라엘도 인류 역사에서 잘 나간 적이 별로 없습니다. 거꾸로 일본은 예수 믿는 사람이 별로 없어도 반듯한 나라가 되었고, 중국도 지금 미국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해서 세상에서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못 믿는다고 해서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생명을 얻는다는 신명기의 역사관은 잘못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바르게 대답하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우상을 섬기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눈에 확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게 드러난다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읽고, 착하게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한 표시는 될 수 있지만 참된 믿음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포로가 되고 식민지가 된, 그야말로 완전히 쪽박을 찼던 당시의 이스라엘도 나름으로 믿음생활을 잘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기적으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소와 양이 번제로 바쳐졌습니다. 마틴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1517년 어간의 로마가톨릭교회도 종교적인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엄청난 돈을 들여서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했습니다. 20세기 초 볼셰비키 혁명에 의해서 무너진 러시아 짜르 제국 시대에도 러시아 정교회의 활동은 눈이 부셨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신앙생활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사실이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우상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우상을 타종교로 여깁니다. 법당의 부처 형상을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을 깨부수기 위해서 온갖 종류의 퍼포먼스를 행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로마가톨릭교회의 마리아 형상을 우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뮌처처럼 극단적인 사람들은 종교를 개혁한다면 미명으로 성당의 모든 예술작품을 파괴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사실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불교는 부처상을 법당에 들여놓고 있지만 그것 자체를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상이 이런 형상이나 그림으로 나타난다면 우상을 걸러내는 일은 간단합니다. 우상은 그런 형상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상은 오히려 보이지 않게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 힘입니다. 때로는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지만 본질은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이런 우상에게 사로잡혀 있다면 그가 아무리 그리스도교 경건생활에 철저하다고 하더라도 우상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보이지 않게 우리의 영혼과 삶을 지배하고 있는 우상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상이 제공하는 것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과 광야생활 이후에 들어가서 살던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을 섬겼습니다. 바알의 특성은 풍요와 다산이었습니다. 일종의 물신숭배입니다. 가나안은 근동에서 보기 드물게 농경이 가능한 지역이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바알이 농사를 주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풍년이 들었을 때와 흉년이 들었을 때의 삶은 천지차이였습니다. 그들은 곡식을 거두고 축제를 열었으면 먹고 마시면서 성적인 쾌락에 빠져들었습니다. 후손을 많이 보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삶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가나안의 문화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풍요와 다산이 하나님 신앙과 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풍요와 다산이라는 가나안의 물신숭배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영적인 상태도 이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걸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성장제일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P교단이 몇 년 전에 총회의 차원에서 300만 신자 달성을 한 해의 목표로 정한 적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도 어떤 목표를 정할 수는 있지만 기업이 수출 목표를 정하듯이 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포기하는 태도입니다. 교회가 기업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제가 일례를 들었지만 이와 비슷한 일은 교회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아니라 성장논리라는 우상을 섬기는 겁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신앙과 우상숭배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양자는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없습니다. 성령과 악령의 차이도 종이 한 장입니다. 양쪽 모두 영적인 힘입니다. 악령도 놀라운 능력을 보입니다. 아니 능력이 더 있어 보입니다. 그럴 듯해 보입니다. 사이비 이단도 그럴듯해 보입니다. 대중적인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서 하루 종일 그런 요구를 듣고 삽니다.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를 아시지요? 선악과는 매력적인 어떤 힘입니다. 지혜롭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의 힘이 그럴듯해 보이지요? 잘 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 나라에는 교양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속성을 그대로 버리지 못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이라크 침략을 반성하지 않습니다. 물론 중국도 티베트를 무력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국제정치를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중입니다. 우리 눈에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들이 우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그걸 분간하기가 우리의 능력으로는 아예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천사와 마귀를 구분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이 고백했듯이 우리 자신도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신앙과 우상숭배가 우리 안에 뒤섞여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영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살이만 해도 골치 아프니 이런 문제에는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사실만은 잊지 마십시오. 신명기가 기록되던 시대의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그냥 쉽게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결과가 우상숭배였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그냥 내버려두면 우상숭배의 길을 가게 됩니다. 겉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죄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닦달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영혼을 투명하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게 우리의 영적인 딜레마입니다. 우리 눈에 확 드러나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헤아려야 하니까 말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서는 우리를 일부러 피곤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지 않습니다.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여호와께서 우리의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는 분이며, 생명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이 당연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생명을 도구처럼 다룬다고 생각하면서 삽니다. 성서는 일관되게 하나님이 생명 창조주이시며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거꾸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곧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생명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 지향적 삶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생명 아닌 것을 섬기는 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물론 우상도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어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이비 생명입니다. 사이비 생명을 약속하는 힘이 우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풀어야 할 마지막 영적 숙제는 우리가 어떻게 참된 생명과 사이비 생명을 분별해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단 그것이 분명하게 우리의 영적 인식에 들어와야만 생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생명은 무엇인가? 나는 생명을 경험했나? 만약 이런 질문에 실감이 가지 않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아직 성서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한 분입니다. 샘터교회 교우들 중에는 그런 분이 한 분도 없을 줄로 믿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당신은 아시는가, 하고 저에게 묻고 싶으신가요? 그것을 완전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어떤 철학 선생도, 생명공학자도, 영웅도 모릅니다. 인류 역사에서 한 분만 제외하고 그렇습니다. 그분은 생명 자체이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분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삶과 그 내용들은 모두 무상합니다. 지나갑니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하다는 말은 이 세상의 생명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종말에 완성될 그 궁극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예수의 운명에서 선취의 방식으로 실행하셨습니다. 이를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요?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를 전제합니다. 여기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기와 인내심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더 깊이 들어가십시오. 거기서 여러분은 하나님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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