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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하나님이 오신다.

35:1-10, 대림절 셋째 주일, 20161211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오늘이 1211일 두 번째 주일이니 2016년 역시 거의 다 흘러간 셈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여러분들의 삶은 어땠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어떻습니까? 행복하셨는지요? 각각 다를 겁니다. 사람은 개인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어울려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사회 분위기에도 큰 영향을 받습니다. 요즘 대한민국은 크게 혼란스럽습니다. 지난 두달 동안 전국적으로 촛불 집회가 계속되었고, 129일에는 대통령 탄핵안의 압도적으로 가결되었다. 시국도 어수선하고 경제도 어렵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언제인들 힘들지 않을 때가 있었겠습니까만 요즘이 유독 혼란스러운 시절이라는 건 분명해보입니다. 이럴 때 기독교인은 어떤 자세로 살아할는지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처세술을 말하거나 심리적인 힐링의 방법론을 전하지 않겠습니다. 성경에 운명을 건 목사로서 성경이 지시하는 것만을 말씀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대림절 셋째 주일의 제1독서는 사 35:1-10절입니다. 이 본문의 배경은 바벨론 포로 귀환입니다.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 당했고,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거나 종의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렇게 50년쯤 흐른 뒤에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누구나 다 기꺼운 마음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예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50년 전에 바벨론으로 처음 포로로 잡혀온 1세대 사람들은 대개 죽었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은 포로 2세나 3세입니다. 그들은 이미 바벨론에서 삶의 터전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구미를 당길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비해서 경제 수준도 떨어지고 문명도 훨씬 낙후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다시 삶의 터전을 잡는다는 게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웬만하면 바벨론에 남는 게 현실적으로 훨씬 좋은 선택입니다. 당시 그들의 심정이 실제적으로 어땠을까요?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이사야가 무슨 대답을 하는지 귀를 기울여봅시다. 우선 사 35:3,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이사야는 유대 백성들을 향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외칩니다. 이사야가 이런 말로 격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시 고대 유대인들의 삶에 두려움이 숙명처럼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는 저 멀리 믿음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에게까지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아내 사래와 조카 롯을 데리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내려옵니다.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다고 성경이 말하지만 고향을 떠나 떠돌이처럼 가나안 땅에 발을 딛는 건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다가 아브라함에는 나이 늙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훗날 백세가 되어서 가까스로 아들을 낳았지만 그것으로 모든 두려움이 해소되는 게 아닙니다. 이삭이 중간에 죽기라도 한다면 대가 끊어지는 겁니다. 그는 어느 날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직접 내릴 정도로 잔인한 분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명령이 생존과 미래를 극단적으로 두려워하던 아브라함이 궁여지책으로 시도한 영적인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가 불확실하니 자기 자식을 신에게 바쳐서라도 확실성을 담보하려는 모험 말입니다. 고대인들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예를 들어 자연재해가 극심하다거나 힘든 전쟁 앞에서 사람을 신에게 바치곤 했습니다. 신라 시대에 에밀레종 설화에도 자식을 바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자기 운명에 놓인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이 문서로 수집되던 바벨론 포로 전후 시대에 유대인들이 경험한 두려움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기존의 모든 토대가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신앙까지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바벨론의 우상이 더 우월해보였으니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서 이사야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유대 백성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을 겁니다. 이사야의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별로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당신이나 하나님을 믿고 잘 살아봐. 나는 내 식대로 살 테니까.’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사야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지요. 아니면 나는 지금 만사가 잘 풀리고 있으니까 두려움이고 뭐고 하나도 없다. 살만하다.’ 하면서 이사야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시는지요? 각각 처한 형편에 따라서 서로 생각이 다를 겁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자신의 형편이 괜찮다고 해서 자신과 상관없는 말씀으로 흘려보낼 수 없습니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외면한 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복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근거가 무엇일까요? ‘두려워하지 말라.’에 이어서 본문이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하나님이 오신다.’는 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근본 이유입니다. 대림절에 적절한 말씀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바벨론 포로 전후 시대에는 하나님이 부정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다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미래에 아무런 보장이 없었습니다. 바벨론의 문명에 적응하는 것이, 그리고 신흥제국 페르시아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사야는 하나님이 오신다고 외쳤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사야의 이 말이 들렸을까요? 선지자들은 어떻게 보면 몽상주의자들, 아무리 좋게 봐도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게 선지자와 대중 사이에 놓인 갭입니다. 선지자들은 대중들에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현실(reality of God)을 눈여겨본 반면에 대중들은 실제 손에 잡히는 것만을 현실로 보았습니다. 선지자들의 말은 대중들에게 외면받기 좋았습니다. 실제로 외면 받은 선지자들이 고대 유대 역사에 훨씬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역사 과정을 통해서 결국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대목이 세계 여러 민족 중에서 유대인들의 뛰어난 점입니다.


하나님이 와서 보복하고 갚으시고 구원하신다고 이사야는 선포했습니다. 보복한다거나 원수를 갚아준다는 표현이 구약에는 자주 나옵니다. 고대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비록 표현은 그렇지만 선지자들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원수 갚아주는 것이라기보다는 훨씬 근원적인 변혁에 대한 희망이자 염원이자 절규였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사 35:5-9절은 묵시문학 형식으로 묘사했습니다. 5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여기에 열거된 이들을 보십시오. 맹인, 귀 먹은 자, 저는 자, 말 못하는 자입니다. 세상에서 경쟁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앞에서 이사야가 두려워하지 말라.’ 했다고 말씀드렸는데, 여기서 열거된 이들이 바로 두려움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표자들입니다. 이사야는 유대민족이 바벨론 포로 시대에 이런 장애인들처럼 살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바로 이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국의 채찍과 당근 앞에서는 봐도 보지 못하는 거와 같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처럼 살아야만 했습니다. 극심한 불평등이, 겉으로는 합법적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불법이 압도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장애인처럼 행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절실한 것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고 보고 듣고 말하고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는 자유입니다. 악한 권력이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행하실 보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보복이라면 저도 보복하고 싶습니다.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히틀러 체제에 부역한 사람을 단죄하고 있습니다. 몇 달 전에는 재판을 통해서 90세가 넘은 사람에게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너무 심하다 싶겠지만 이게 인류 정의와 평화를 위한 하나님의 보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보복으로 인해서 이제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35: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기쁨과 즐거움을 얻고,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시각 장애인이 보게 되고, 못 듣던 사람이 듣게 되는 것은 곧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오셔서 보복하고 갚아주실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정말 가슴 벅찬 일입니다. 이런 때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그것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나와 가족이 살아가기에도 힘든 마당에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탄식까지 배려하면서 살아갈 수 있냐?’ 하는 겁니다. 이해가 갑니다. 개인의 도덕적인 의지만으로 정의롭게 살아가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힘들기도 하고, 개인의 능력에 한계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구조를 정의롭게 만들어가는 게 필요합니다.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개인들의 의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사람이 최소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가는 일에 서로 힘을 합해야 할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맹인의 눈이 밝아지며 못 듣던 사람의 귀가 열린다는 이사야의 외침을 가슴 떨리는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메시야 예수

초기 기독교인들도 이사야 35장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오심으로써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다는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3독서인 마 11:2-11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서 오실 자가 당신인지 아닌지, 당신이 메시아인지 아닌지, 당신이 바로 이사야가 35장에서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 와서 보복하고 갚아 주고 구원하실 그 하나님인지 대답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직접적인 답변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간접적인 답변을 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11:5, 7:22, 참조 눅 4:18).

 

35:5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에 의해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 무슨 근거가 있을까요? 정말 예수가 오시는 하나님이신가요? 왜 예수가 하나님의 보복일까요? 예수가 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일까요? 우선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많은 장애인들을 고치거나 병든 사람을 고치신 것은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 자체가 복음서의 핵심은 아닙니다. 현대에 이런 일들은 의사들이 하는 업무입니다. 예수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오실 때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전인 구원을 가리킵니다. 슬픔과 탄식이 없어지는 삶을 가리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슬픔과 탄식은 맹인, 말 못하는 자, 다리 저는 자로 묘사된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인들은 장애가 없고 권력이 크고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사야의 예언은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갔지만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남았습니다. 세상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탄식과 슬픔도 여전했습니다. 예수는 그런 기준으로 사람과 그의 운명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는 것이 그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영혼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잘 생기지 않아도 좋습니다. 세리와 죄인이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 선포를 근거로 해서 율법을 수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이제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이 오신다는 사실에, 그가 보복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에 상응하는 삶의 태도가 되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삶의 태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억압과 자기 성취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슬픔과 탄식이 없어지는 삶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만 타당하지 실제 삶에서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 삶의 능력입니다. 여러분들이 실질적으로 느끼면 좋겠다는 뜻으로 저를 예로 들겠습니다. 저는 평생 작은 교회서만 목회를 했습니다. 교회의 크기로 목사의 능력을 평가한다면 저는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기준으로 목회를 했습니다. 그것은 가까이 임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로 산다는 사실 자체에 천착했습니다. 교회의 크기가 저에게 별로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저의 목회생활에서는 슬픔과 탄식이 없습니다. 아쉬움이 없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실제 목회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목사의 자유가 보장됩니다. 이게 단순히 목회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 해당됩니다. 여기서 관건은 하나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예수가 바로 이미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자신이 얼마나 절실하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35:1-10
https://youtu.be/J6G0ltt-h5I
https://youtu.be/NZE3Kjwa0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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