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창조절 열둘째 주일, 2016년 11월20일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여러분들은 간혹 ‘내가 예수 믿는 사람 맞아?’ 하는 자괴감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런 의식조차 없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자기 성찰을 합니다. 가장 큰 자괴감은 예수 믿는 사람인데도 세상의 온갖 일로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불안해할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구체적인 어려움을 당하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가족이 시한부 병에 걸렸다거나 사업이 부도를 맞게 되었다면 잠이 오지 않을 겁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기대치에 크게 못 미치게 행동하면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런 구체적인 어려움이 없는데도 마음의 평화가 쉽게 깨지고 심지어는 공연한 불안에 빠진다는 겁니다. 삶의 바탕에 존재론적 기쁨이 없는 거지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어떻게 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빌 4:4절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어떻게 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우선 사람의 깊은 무의식 속에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합니다. 그 불안의 뿌리는 죽음에 닿아 있습니다. 그런 불안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상태를 벗어나는 순간이 있긴 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가 그렇습니다. 오랜 세월 알뜰살뜰 돈을 모아서 자기 집을 장만했을 때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쁩니다. 비슷한 일들은 많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떤 경우에 즐거운지를 보면 답은 다 나옵니다. 문제는 이런 것으로 기쁨과 평화의 상태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쁨과 평화로 경험되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우리 손에서 다 떠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새옹지마라는 고사가 나왔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우리가 놀라운 기쁨으로 경험했던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평범한 일상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었든지 그 결과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우리의 인생살이이기에 사람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일상의 반복 가운데서 일희일비 하면서 살아갑니다. 기쁨과 평화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집니다. 삶의 진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이런 데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 곤혹스러운 겁니다. 앞에서 드린 질문을 다시 드립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왜 반복해서 흔들리는 것일까요? 인생살이에서 기독교 신앙은 아무런 능력이 없는 걸까요?
하나님의 평화와 누스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빌립보 교회 교우들도 우리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들도 여전히 먹고 살아야 하고, 자식 키워야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면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어 마음과 생각이 복잡해지곤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충고하고 권면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는 말은 우리의 내면세계가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심장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고대인들은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고통스런 일을 당하면 심장이 뛰고 답답해집니다. ‘생각’은 인간의 의식을 감당하는 요소입니다. 마틴 루터는 생각을 독일어 Sinn(진)으로 번역했는데, 그 단어는 지각, 의식, 감각기관 등을 가리킵니다. 뭔가를 깨닫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생각이 자주 흔들리곤 합니다. 불교 용어로 번뇌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괴롭게 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동물들에게는 이런 현상이 없습니다. 사람만 망상, 억측에 빠져서 괴로움을 느낍니다. 바울은 그 마음과 정신을 하나님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신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바울의 이 말은 단순히 신앙적인 덕담에 불과한 건 아닐까요?
7절(전)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의 이 번역은 모호합니다. 루터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모든 이성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평화’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이성’을 가리키는 헬라어는 ‘누스’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아낙사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초기 기독교 당시에 유럽 철학을 주도했던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사상적 토대입니다. 헬라어 누스는 일반적으로 마음, 이성이라는 단어로 번역이 가능한데, 세계의 근원적 원리라고 보면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평화가 당시 철학자들이 세계의 근원적 원리라고 본 누스, 즉 이성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요즘도 세상은 모두 세상의 근본 원리인 ‘누스’를 중심 개념으로 작동됩니다. 물리학이나 사회학, 인문학과 철학, 정치와 경제,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세상살이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현대인들이 추종하고 있는 힐링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치유라는 뜻의 힐링은 상처 받은 현대인들에게 절대적인 가치가, 즉 근본 원리가 되었습니다. 클래식 음악이나 대중음악도 힐링을 목표로 합니다. 어느 유명 가수의 노래와 연주를 들으면서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고 공감합니다. 그런 공감을 통해서 사람들은 상처 받기 쉬운 내면이 위로받고 치유되는 경험을 합니다. 티브이에서 방송되는 연예 프로그램도 사람들에게 위로와 치유의 기회로 작용합니다. 그런 방식의 위로와 치유가 그들에게는 구원 경험입니다. 그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오기에,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기도 하고 교양인에게 어울리기도 하고, 뭔가 감각적으로도 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지기에 현대인들이 거기에 몰두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저도 그런 삶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간혹 그런 데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여러분이 취향에 따라서 선택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제시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그것과 차원을 달리합니다. 그는 당시 헬라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주장한 세계 원리인 ‘누스’보다 더 크고 위대한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게 바로 ‘헤 에이레네 투 데우’, 즉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여기에 바로 성서 신앙과 세상 철학이 어떻게 다른지가 드러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평화를 붙들고 있다면 세상 철학은 누스의 평화를 붙들고 있습니다. 평화가 하나님에 의해서 가능하냐, 누스에 의해서 가능하냐 하는 논쟁이자 질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이가 하나님이냐, 누스냐 하는 겁니다. 열광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따르는 이들은 이게 무슨 사태인지를 전혀 알지도 못한 채 무조건 하나님이라고 우길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누스를 선택하겠지요. 양쪽 모두 하나님의 평화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지 못한 채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평화를 구약은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샬롬이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그들이 샬롬을 인사말로 삼았다는 것은 그들의 삶이 평화가 아니라 반(反)평화에, 전쟁에 시달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은 나라였던 유대와 이스라엘은 주변의 강력한 제국에게 끊임없이 시달려 왔습니다. 한 시도 마음 편하게 산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이 나름으로 평화를 위해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른 나라와 평화 조약을 맺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쟁을 불사하면서 나라의 평화를 위해서 매진했습니다. 그런 노력이 일시적으로는 효과를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평화는 오래가지 못하고 쉽게 깨졌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 조직인 유엔이 활동한다고 해서 세계 평화가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남북분단 체제로 살아가는 우리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 나쁩니다. 어렵게 시작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이 이렇게 쉽게 중단되리라는 걸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저는 사회학자나 정치평론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것에 대해서 더 이상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평화는 말만 갖고 되는 것도 아니고, 행동으로 옮긴다고 해서 정착되는 게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국가 사이만이 아니라 여러 이해 집단들 사이도 그렇고, 종교 사이도 그렇고, 가족 사이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샬롬이 사람의 노력으로만 달성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평화를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마음의 평화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마음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마음 훈련만 잘 해도 웬만해서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 훈련을 받는 명상 센터가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불교 가르침도 비슷합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세상이 부처로 보이기도 하고, 거꾸로 악귀로 보인다는 겁니다. 성경은 이런 점에서 훨씬 단호하고 엄격합니다. 사람이 마음을 먹는다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공부보다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의와 평화를 선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봐도 잘 안 되더라,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지금 여기에 있을까요? 이런 사람은 성경을 진정성 있게 읽지 않은 채 성경을 믿기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테니스 연습을 잘 하지 않으면서 테니스가 재미없다고 주장하는 거와 같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능력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단순히 세상 원리인 ‘누스’만 의존해서 산다면 기독교인으로서는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평화
다시 바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바울은 구약의 샬롬 사상에 머물지 않고 한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 교우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평화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화가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골 3:15절에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는 오늘 본문과 똑같은 권면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은 ‘구원자 예수’라는 뜻입니다. 예수가 구원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한 분도 없을 겁니다. 다만 그것을 실감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다시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두 가지 힘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종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평화를 얻을 것으로 여겼던 성전과 율법 신앙은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판단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로마인의 정치입니다. 그들이 세계 평화의 토대라 생각한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 이데올로기는 예수를 사회질서 파괴자로 판단했습니다. 그런 자는 십자가에 달려야 합니다. 원래 유대 종교는 선한 뜻으로 시작되었지만 세월과 더불어서 자기를 절대화하게 되었고, 로마의 정치 이데올로기도 역시 선한 뜻으로 시작되었으나 세월과 더불어서 자기를 절대화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그 역사와 문명의 숙명입니다. 이들에 의해서 예수는 버림받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세상의 절대 종교와 절대 정치에 의해 버림받은 예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로 인해서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을, 즉 참된 평화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구원의 길인 것은 하나님이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부활은 종말에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질 궁극적인 생명입니다. 세상을 절대적인 능력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세상 마지막 때 완성하실 생명이 예수님의 운명에서 선취의 방식으로 발생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부활 신앙입니다. 그걸 증명해보라고 말하고 싶은 분들이 계신가요? 세상 사람들은 대다수가 그렇게 말할 거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인격과 가르침은 좋지만 그를 구원자로 믿는 기독교 교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결단이 필요합니다. 선택이 필요합니다. 궁극적인 진리 앞에서는 증명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선택하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 밖에서 사는 것입니다. 밖에서 사는 것을 좋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아도 좋습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의 근원적 원리인 누스에 의지해서 살면 됩니다. 그들을 향해서 우리가 뭐라 불평할 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주님으로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라고 생각하고 그를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든든히 지킨다는 사실에 운명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수행의 기초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이왕 이런 길을 선택했다면 그것의 능력을 실제 삶으로 살아낼 수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마음과 생각이 든든해지는 경험 없이 형식적인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평생 교회에서만 생활했기에 여러분들이 마음과 생각의 흔들림 없이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의 삶이 너무 척박하고 거칠다는 사실을 똑같은 무게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살이를 기독교 신앙으로 뚫고 나가기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서 마음과 생각의 평화를 얻기기 힘들 겁니다. 저도 여전히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목사이기에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삶의 근거를, 신앙의 본질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의 운명은 침몰하고 있는 난파선에서 승객들을 향해서 당황하지 말고 구명보트를 내려 올라타야 한다고 호소하는 선장과 비슷합니다. 저 스스로 약하고 두렵지만 맡은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 심정으로 말씀드립니다. 바울이 빌 4:7절에서 권면한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평화는 이 세상의 모든 이성과 원리와 삶의 요령과 힐링 방법론보다 더 크고 더 뛰어납니다. 그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즉 여러분의 인격과 삶과 운명과 미래를 굳게 지키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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