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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때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때

(렘 31:1-6)


2010년 새해 첫 주일입니다. 21세기의 첫 10년이 지나고 이제 두 번째 10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금년은 한민족의 현대사와 깊은 연관이 되는 해입니다. 100년 전인 1910년은 한일합방이 일어난 해입니다. 경술국치의 해라고 말합니다. 60년 전인 1950년은 6.25 남북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입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전쟁이 내전이나 국제전이냐 하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 올해는 1960년에 일어난 4.19 50주년 되는 해이고, 광주 민주화운동 30주년 되는 해이며,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10주년 되는 해입니다. 위에서 열거된 다섯 가지 현대사 중에서 두 가지는 대한민국 내부의 문제이고, 다른 세 가지는 한민족 전체의 문제입니다. 양쪽 모두 중요한 사건이지만, 한민족 전체에 연루된 문제가 더 중요하겠지요.

지금 한민족은 세계 200개 가까운 나라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입니다. 타의에 의해서 분단되었다는 사실에서 이 분단은 특별합니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국제 정치적 목적에 따라서 38선 이남은 미국이, 이북은 소련이 점령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한민족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은 분단의 비극이 여기서 시작되었고, 그런 분단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분단으로 인해 벌어지는 문제가 어느 정도인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국방비만 해도 엄청난 부담이자 모순입니다. 남북은 분단체제로 인해서 과도하게 국방비를 사용합니다. 그걸 사회복지로 돌릴 수 있다면 삶의 질이 몇 단계 올라갈 겁니다.

2010년은 남북문제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게 될까요? 남북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방향일까요, 아니면 분단고착화의 방향일까요? 어떤 분들은 지금 먹고 살기도 힘들어 그런 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거나, 기독교 신앙은 영혼 구원에만 신경 쓰는 거지 민족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순수하고 소박한 신앙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런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와 분리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구약 예언자들의 구원 신탁을 오해하거나 외면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분열 역사

오늘 설교의 본문인 예레미야의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렘 31:1) 여기서 ‘모든 종족’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남북 왕조를 가리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분열왕조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정착한 유대 민족은 사울, 다윗, 솔로몬의 통일 왕조를 거쳐 기원전 10세기 초에 남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솔로몬과 그의 아들 르호보암의 책임이 결정적입니다.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위를 이어받자 북쪽 지역의 지파들이 솔로몬의 전제적이고 강압적인 통치를 거둬들이라고 요구했습니다. 르호보암은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선왕 솔로몬보다 더 강압적인 정치를 펼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결국 북쪽 지파들은 남쪽과 선을 긋고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것이 남북 분열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 상태가 수백 년간 계속되었고, 결국 북왕조가 앗시리아에 의해서 기원전 722/1년에 멸망당했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아주 작은 나라로 명맥을 유지하던 남유다도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기원전 587년에 멸망당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0년경부터 시작해서 580년경까지, 대략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그의 활동 시기는 바로 위에서 설명한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이 있었던 때입니다. 북왕조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100년 전에 이미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남유다도 풍전등화 같은 신세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의 미래를 어느 정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희망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거의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외쳤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주변에서 악담을 많이 들었습니다. 공연히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거였습니다. 가족들도 예레미야를 비난할 정도였습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많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심정이 어땠을지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예언자들은 점쟁이들처럼 남의 운명을 점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역사를 뚫어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예언자 전통에 선 예레미야는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왜 구차한 신세로 전락했는지에 대한 대답을 역사에서 찾았습니다. 그 출발이 남북분열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라는 말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북분열과 그런 상태가 지속된 데에는 나름으로 이유가 있습니다. 분열의 시작이 솔로몬의 강압정치와 아들 르호보암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일단 남북이 분열된 다음에는 각각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이념들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남유대는 다윗 왕조의 정통성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그들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를 칠만 했습니다. 반면에 북이스라엘은 대중성이 있었습니다. 열두 지파 중에서 남유다를 따르는 지파는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밖에 되지 않는 반면에 나머지 열 지파는 모두 북이스라엘을 따랐습니다. 땅도 북이스라엘이 훨씬 넓었습니다. 그들의 시작이 솔로몬의 철권통치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 민중의 대중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각각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각각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가 볼 때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기고 서로 대적하던 분열의 역사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유다에 속한 지파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지파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선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지역 갈등이라는 것은 쉽게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말씀을 선포하던 때는 이미 남북 분열의 역사가 백년이 훨씬 넘었을 때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이미 멸망했지만 지파들 사이의 갈등은 전혀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포로가 끝난 뒤에서 그런 상처는 씻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처가 예수님 당시에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당시에 남쪽 유대 지역의 사람들은 사마리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동족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무시했습니다.

6.25 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정신적 외상인 트라우마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60년 동안 남북 모두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남북분단 상황이 앞으로 100년, 200년을 간다고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물론 통일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닙니다. 세상살이에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오히려 분단 상황을 이용해서 이익을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은 문제가 많은 집단입니다. 통일이 되어봐야 골치 아픈 일만 많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저는 남북분단 문제를 정치나 이념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세상을 해명하고 방향을 제시한 예언자들의 영성에서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이런 분단 상황의 지속으로 우리의 영성이 훼손된다는 점이 가장 우려스럽습니다.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즉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은 남쪽 사람들만이 아니라 북쪽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한민족 전체의 하나님입니다.   

예레미야의 이런 영성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나름으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굳어진 세계관은 혁명적인 충격이 없으면 변경이 불가능합니다. 진화론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은 아무리 과학적으로 설명해줘도, 진화론 문제는 신앙과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지동설이 아니라 천동설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한국의 보수적인 신자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현대신학을 모두 자유주의로 매도합니다. 타종교를 무조건 매도합니다. 예레미야도 자기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민중들이 예언자들의 말을 받아들인 시대는 흔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의 말을 기억할 뿐입니다. 아무리 예언자들의 말을 거부하는 시대라 하더라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남북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지파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가 설명하는 관점으로 우리의 영적 시야를 넓힐 수 있다면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고정관념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광야의 은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근원적인 사건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는 겁니다.(렘 31:2) 이 문장이 가리키는 역사적 사건이 구약성서 전체의 가장 중요한 배경인 출애굽과 광야 사건입니다. 출애굽은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민족 해방 사건입니다. 그걸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지역갈등이 없었습니다. 남북분열의 이념들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사람들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들은 출애굽이라는 큰 사건 안에 녹아들 수 있었습니다. 광야는 생존이 급선무인 시절입니다. 거기에서도 성격 차이로 갈등이 적지 않았겠지요. 마실 물과 먹을거리가 없을 때 서로 다퉜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생존을 허락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생존을 보장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과 만나 사건은 이스라엘의 생존과 연결된 것입니다. 생존 문제는 이스라엘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생존을 보장했습니다. 그들에게 정치적 해방과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 사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 기억은 희미해졌습니다. 아무도 그것에 대한 열정이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오래 전에 망했습니다. 남유다도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아무도 하나님이 행하신 출애굽과 광야의 만나를 통한 은혜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달랐습니다. 그는 과거의 구원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신다는 사실을 외롭게 전하고 있습니다. 한편의 시처럼 노래합니다.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렘 31:4)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때마다 이스라엘 여자들은 소고를 들고 춤을 추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두 지명을 언급합니다. 하나는 사마리아입니다. 사마리아 산에 포도나무를 심게 될 것이고, 그 열매를 따먹게 된다고 했습니다. 평화로운 일상이 시작된다는 약속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에브라임입니다.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하나님 여호와께 나가자고 외치게 된다는 겁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 지역이고, 에브라임은 남유다 지역입니다. 우리로 바꾸면 사마리아는 평양이고, 에브라임은 서울입니다.

예레미야의 영성은 놀랍습니다. 일반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훨씬 근원적인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예언자만 홀로 남북왕조의 몰락이라는 상황에서 소고를 들고 노래하고 춤을 추게 된다는 사실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남북이 분열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로 나가는 그 미래를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 미래가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때라는 겁니다. 60년 이상 분열의 역사를 살아오는 한민족 앞에서 한국교회는 이런 영적 시야를 확보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때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때가,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주시는 때가 온다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안타깝지만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 후로 이스라엘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결국 모든 것이 파멸로 끝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들의 좌절이며, 한계이며, 불안이며 고독입니다. 예언자들이라고 해서 늘 확신에 찬 게 아닙니다. 그들은 역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몰랐습니다. 다만 지난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앞으로 나가야 할 길을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걸 아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이루시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선포할 뿐입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이 선포되고 600년이 지난 뒤에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사건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든 실존적인 고통과 좌절과 분노와 불안과 고독과 한계를 그대로 살았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죄와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셨습니다. 종말에 우리가 참여하게 될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승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온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가 바로 예레미야가 외친 그때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그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 세상이 여전히 어둡고 교만하고 사치스럽다 해도, 또한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실 영적 생명의 세계를 외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노래합니다. 분열과 적개심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2010년 새해에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성탄절 후 둘째 주일, 2010년 1월3일)

예레미야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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