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4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W3nzK9PW3r8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가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순례자의 길 (미가서 6:6-8, 롬 14:17-18 누가 6:20-26)
I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여행을 싫어하는 분이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 접어두고 여행만 다닐 수 있기를 바라는 분은 없습니까? 여름철에 여행을 다녀온 분과 여행을 하지 못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연구한 보고서에 따르면 여름 휴가철에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다녀오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삶의 하ᅟᅢᆼ복지수가 훨씬 높았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국내 여행이든 혹은 해외 여행이든 그곳이 어떤 곳인지 그곳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그곳에서 내려오고 있는 전설이나 전래동화 등을 찾아본 후, 작은 안내 자료집을 만들어 여행을 하곤 합니다. 특히 저는 여행을 통하여 그곳의 땅을 밟아보면서 그곳의 역사와 문화와 풍습 등을 배우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자신의 삶을 조용히 둘러보며 나의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서 새로운 통찰력도 배우고 새로운 각오를 하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행이 돈을 쓰며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인생을 배우며 나 자신의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여행 곧 순례(巡禮, pilgrimage)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계획을 해서 함께 떠나는 여행을 “정경호교수와 함께 하는 생명평화순례”란 제목으로 중국 동북3성 지역의 독립운동지역, 블라디보스토크지역의독립운동지역 및 고려인 강제추방 현장 탐사, 나가사키 지역, 오키나와 지역, 몽골지역, 태국 치앙마이의 난민지역, 필리핀 마닐라 근교에 있는 쓰레기 마을로 가서 평화봉사하면서 인생을 배우곤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저를 여행신학자라고도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있어서 여행은 단지 자신이 사는 지역을 떠나 아름다운 경치나 이름난 장소를 두루 돌아보는 여행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 새로운 곳도 구경하지만 동시에 여행을 통해 나를 둘러 보고 나를 새롭게 하고 나에게 새로운 사명을 불러일으키는 순례라고 고집합니다. 순례란 말은 종교적인 성지나 의미 있는 곳들을 여행을 통해 찾아다니면서 그곳의 종교적-신앙적 의미나 또는 당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떠한 고민을 하였으며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대안적 삶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되새겨 나가면서 나를 새롭게 하고 나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곤 합니다. 그렇기에 나는 이러한 여행을 생명평화 순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야말로 도보 여행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의 길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여행 방법은 당연히 걸어서 가는 도보 여행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과 마차가지로 예수님은 여러차례 팔레스타인 지역을 두루 다니셨습니다. 추측하건대, 예수님은 당시 유다의 3대 절기인 유월절, 맥추절, 장막절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 세 번은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에까지 걸어서 가셨을 것입니다.
이 거리는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사마리아지역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갈 경우 대략 121km이지만 그들이 불결하다고 해서 접촉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으려면 요단강을 따라 여리고로 간 다음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이 길은 40km를 더 가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운동 곧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를 시작하기 전까지 예수님은 2만1800km를 걸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인천에서 남미의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의 거리가 19446km라니 하니 엄청난 도보 여행 도보순례를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II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예수님은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평지를 군중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을 때, 어디에서부터 사람들이 왔는지는 모르지만 빽빽하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는 산 위에서 군중들에게 8복을 선포하셨다고 합니다만 누가복음 6장 20-26절은 네가지의 복과 네가지의 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본문 누가복음 6장20-26절의 말씀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8복의 말씀 에 가리어져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누가복음의 4복 4화가 더 원문에 가까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누가복음에 6장 20-26절에 의하면, 예수님을 둘러싼 군중들을 힐끗보아도 가난한 사람들,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굶주린 사람들,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 의롭고 선한 일을 말없이 이행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있었습니다. 반면에 언듯 보기에 지금 부요하게 보이는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즐겁게 웃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책망을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본문의 말씀을 조금 바꾸어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찬송에 가사를 넣어보았습니다.
지금 가난한 사람 행복하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 행복하다. 너희가 참 기쁨을 얻을 것이다.
지금 의를 위해 고난받는 사람 행복하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크리라.
지금 부요한 사람 나누어라. 모두가 함께 넉넉할 때까지
지금 배부른 사람 봉사하라. 모두가 함께 만족할 때까지
지금 즐겁게 웃는 사람 보살펴라. 모두가 함께 행복할 때까지
지금 모든이 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 낮아져라. 모두가 함께 생명정의평화
누릴 때 까지
예수님은 도보여행 하시다가 무더위에 지쳤을 땐 길가에 심어진 무화과나무의 그늘에 앉아 쉬기도 하였고 시장할 때면 길가 무화과 열매를 따 먹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여름에 따먹는 여름 과일입니다. 유다 나라의 여름은 무화과나무를 비롯하여 모든 과일이 익어가는 우리의 가을과 같은 계절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1장 18-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익어 따먹는 여름철에 길가에 심어진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맺혀 있지 않을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무화과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곧 나무가 말라 죽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철학자 버틀런드 럿셀은 "Why I am not a Christian"이란 책을 통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나무를 저주하신 자기 중심적인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중요한 포인트는 예수께서는 잎은 무성하나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통해 신앙의 말은 무성하지만, 아무런 신앙의 내용이 없이 열매 하나 맺지 못하는 사람을 잇대어 하신 예언의 말씀이 더욱 중요한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5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도보 여행을 하다가 기쁨과 사랑과 자선이라는 꽃말을 지닌 포도원의 포도나무를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힘주어 말씀하시면서 “내게 붙어 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쓸모없고 무익한 포도나무는 잘라 제거해 버릴 것이지만”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룰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도보여행 중 포도나무를 보고 깨닫고서 그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서 말씀을 선포하고 있으니 예수님의 도보 여행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순례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또 다른 도보여행을 하셨는데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말씀을 들으려고 군중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들의 백합화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면서 갈릴리 지역에 살아가는 극빈의 이웃들과 병자들을 머리에 떠올리며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먹을 것을 주지 않았음에도 하늘을 힘차게 날아다니는 새들도 날마다 생명을 힘차게 이어가고 있음을 말씀하신 후, 누군가 들판에서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았음에도 잘 자라나는 야생 꽃들 그 중에서 도 야생 백합화야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지혜롭고 가장 화려하고 가장 성공했다고 생각한 솔로몬 왕이 지닌 그 어떤 영광보다도 더 나으며 더 가치있는 것임을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아무데도 없는 하나님이기에 실망했던 군중들에게 아무데도 없는 것 같으나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임을 깨닫게 해주었고 엄청난 삶의 의미와 삶의 용기와 새힘을 부여해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순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한번은 도보여행을 하시다가 배를 타고 갈리리 호수를 건너가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적대시하거나 인간 이하의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발도 밟지 않았던 두꺼운 사회적-문화적-종교적 장벽을 넘어 직접 사마리아 수가지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곳 입구 우물가에서 물을 긷던 여성과 댜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불가능한 일이었는 물을 좀 달라는 이야기에서 가정의 이야기그리고 종교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주었고 유다와 사마리아의 장벽을 넘어서서 하나님은 모두의 하나님인 것을 깨달은 그 여인은 물을 긷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수기성으로 뛰어들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언한 첫 여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상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례의 길을 성서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을 대하는 우리들이야말로 모두가 순례자가 되어 성서말씀을 통해 당시의 역사와 그들이 당면했던 독특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떠한 신앙의 삶을 살아내었는지 그 깊은 뜻을 찾아내게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떠한 신앙적 삶을 살아가야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생명정의평화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기쁨으로 걸어가는 순례자(pilgrim)가 될 수 있을 것인지를 조용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III
우리 한국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온 동네 온 마을이 하나가 되어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을 온 마음 다해 걸어갔던 사람을 말하라고 한다면 저는 서슴없이 지금은 중국 땅, 옛북간도 지역의 명동촌 마을, 명동학교 명동교회를 능가할 교회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교회는 윤동주의 큰 외삼촌이었던 김약연(61세에 장로교 목사가됨)이라고 하는 평신도 지도자를 중심으로 낙원동, 구세동, 영생동, 명신동 등의 동네를 만들어 기독교적 이상사회를 만들어 나가고자 했던 명동교회를 빠뜨릴 수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김약연은 고종 5년, 1868년 9월 12일 함북 회령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실학파 유학에 심취하여 향리의 발전에 앞장을 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민족의 때는 기울어지고 있어 암흑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 떨어져 있을 때인 1899년 2월 18일, 그는 31세의 청년으로서 동지적 결속을 한 회령의 김하규(문익환 목사의 모친인 김신묵 권사의 조부) 그와 사돈이 된 종성의 문치정(문익환 목사의 조부)과 남위언 등, 4가문 24가구 141명을 데리고 함께 용정의 장재촌에 집단 이주합니다. 1900년에는 1866년에 덕신 문암골에 먼저 정착한 윤재옥(윤동주의 증조부) 일행이 명동촌에 합류하여 더욱 민족애를 다져 나가면서 이상적인 사회를 형성해 나갑니다.
김약연을 중심으로 그 일행들이 이곳에 한인촌을 이루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한편, 1901년에는 김약연은 자신의 호를 따른 규암재라는 서당을 만들어 그곳에서 맹자의 정치철학에 입각하여 신, 식, 병(信, 食, 兵)의 이념을 교육하고 몸소 실천하여 문맹퇴치와 계몽의 선구자가 됩니다. 그는 다섯 가문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중국인의 임야를 300만평을 사들여 한인촌을 이룩하는데 성공하여 중국식 이름 장재촌을 우리의 이름, 명동촌으로 고쳤습니다.
김약연은 1906년 이웃 용정의 대불동에서 민족의 지도자인 이상설에 의해서 설립된 신식 교육기관인 서전(瑞甸)의숙에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이때 서전의숙이란 학교는 북간도 지역에서 근대 민족교육의 첫 학교였는데, 그곳에서 역사,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공법, 헌법, 실업, 영어, 성경 등의 교과목을 개설하였습니다. 이상설의 신식학교였던 서전서숙이 문을 열자, 나라를 이끌어 나가고 백성을 깨우치려는 서전의숙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점점 더 늘어 갔습니다. 이때 신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김약연은 문하생들을 서전서숙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고 그리고 서전의숙에 재정적 지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설이 만국 헤이그 밀사로 대표로 참속한 것 때문에 일제는 서전서숙을 폐교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김약연은 1908년, 40세 되던 해에 규암제라는 자신이 설립한 학교의 이름을 명동서숙이라 개명하고 서전서숙의 정신을 이어받는 학교로 재출발하였는데 1909년 이름을 바꾸어 그 유명한 명동학교가 된 것입니다. 다섯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1909년 명동교회를 설립하였고 김약연선생을통해 김동을 받았던 온 동네 사람들이 100% 기독교에 입신하였고 김약연선생은 그곳에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독교적 이상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김약연선생은 북간도의 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북간도 사회는 물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온 삶을 살있으며 나라를 빼앗겨 절망적인 삶을 살았던 당시의 사회에 꿈과 희망과 믿음을 심어준 지도자였습니다. 그 후 그는 61세의 나이로 늦깎이 목사가 되어 명동교회를 섬겨나가다가 1942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김약연 목사의 이상촌(理想寸)운동과 명동학교 : 김약연을 이야기하자면 명동촌을 빠뜨릴 수 없고 명동촌을 이야기하자면 김약연을 빠뜨릴 수가 없을 정도로 명동촌과 김약연은 떼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명동촌에서 규암재를 설립하여 유학을 토대로 한 구식교육을 시도하고자 하였던 김약연은 이상설의 신식교육의 서전서숙의 영향을 받아 명동서숙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가 1909년 4월 27일 개교기념일에 교명을 명동서숙에서 명동학교로 그 이름을 바꿉니다. 그 후 김약연이 교장에 취임하고 교감에는 정재면이 취임하면서 이 시기 명동학교는 한 차례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때부터 “신, 식, 병”(信, 食 兵)을 토대로 하던 명동학교의 민족교육이 “신, 망, 애”(信, 望, 愛)의 기독정신을 토대로 한 민족교육으로 전환하였고 그 후 1910년에는 명동중학교, 1911년에는 명동 여학교까지 설립하였던 것이다.
김약연은 정재면이 성경을 학교의 과목으로 가르치는 것을 조건으로 명동학교의 교감으로 취임하던 해인 1909년, 41세의 나이로 기독교로 개종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의 나이로 봐서 유교사상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민족교육을 통하여 구국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신문화와 신사상이 절실히 요청되었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라고 버ᅟᅩᆯ 수 있습니다.
김약연의 개종은 명동촌 온 지역에 기독교로 입신하였고 만주지역의 민족지도자들이 집단으로 입신하는 요인이 되었습이다. 그의 개종은 학교에서는 신앙교육이 실시되고 마을에서는 교회가 설립되어 명동촌은 차츰 기독교적 사회로 변모해 나갔음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에 북간도 명동촌의 김약연은 명동촌마을 이름을 구세동(救世洞), 영생동(永生洞), 명신동(明信洞), 낙원동(樂園洞) 등으로 명명하여 그들 사회의 성격이 기독교적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명동마을을 “천당골”로 만들어 가고자 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공경하고”, “예수를 독실하게 믿고”, “성령으로 감화”를 받은 “천당골” 사람들이란 첫째로 훌륭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며, 둘째로 “의”를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며, 셋째로 참 애국자로서 삶을 살아가야만 “천당골”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함께 집을 짓고 함께 살면서 상부상조하는 “천당골”의 삶 즉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상생(相生)의 삶을 살아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집단농장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추수를 거두어들였고 그들의 이익은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과, 지역사회를 위한 일에 앞장서 나갔습니다. 또한 명동한인사회의 회장인 그는 야학을 세워 문맹을 퇴치하고 부녀자들에게는 양봉과 양잠을 권장하여 소득증대를 꾀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복지 공동체를 통해서 이상사회를 만들어보고자 1910년 “회원 및 부근 한농들에게 농사자금을 대부, 공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길동식산회사(吉東殖産會社)를 설립하였기에 명동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협동조합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조합은 명동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및 학부형들이 그리고 명동교회의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된 것으로서 명동촌의 한 사람은 명동촌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명동촌의 모든 사람은 명동촌의 한 사람을 위하여 섬기고 나누어 가지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이상적인 사회, “천당골”을 이룩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민족과 함께 울며 아파하던 명동교회 : 명동의 이상촌운동에 1909년에 세워진 명동교회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김약연은 정재면과 더불어 기독교신앙과 민족운동을 연결시켜 독립운동으로 나아갔으며 명동학교에서는 예배를 수업시간에 포함시켜 신앙과 민족사랑을 연결시켜 나갔습니다. 명동교회는 이렇게 명동학교를 후원하고 명동의 젊은 신앙의 인재를 양성해 나갔으며 민족독립을 이룩해 나가는 구국을 명동교회의 가장 중요한 선교목록으로 설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제하, 고난받는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생각하면서 매일 밤 모임을 열어 조국을 위한 기도회와 함께 성서연구를 하였고 기독교적 이상사회를-기독교적 복지사회를 만들어 간 교회였습니다. 이런 명동교회에 명동 촌락 전체가 한꺼번에 공동 입신하게 되었다는 것은 교회의 영향력이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명동교회는 의료선교를 통한 민중운동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당시 명동을 비롯하여 북간도에서 병이 걸리게 되면 점을 치고 굿거리를 하였는데 캐나다 선교부에서 설립한 제창(濟昌)병원을 의료선교의 센터로 활용하여, 이주한 한인들에게 환영을 받았던 것입니다.
둘째, 교회는 신자를 얻는 방법으로 한인들에게 기독교의 특색을 설교하였고 전도회 등 집회를 많이 가졌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교인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한인이면 누구든지 교회에 나왔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가 세워지면 교회 바로 옆에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셋째, 교회는 청년지도력의 일환으로 토론회를 자주 개최하였습니다. 토론회의 주제들은 일화배척운동, 금주, 금연의 삼단운동(三斷運動)과 더불어 아편, 매음 금지의 사회윤리운동과 여성운동 등이 힘차게 벌려나갔습니다. 당시 기독교여자청년회는 이런 삼단운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던 대표적인 단체였습니다.
넷째, 교회는 기독청년회 운동을 펴나갔는데 기독청년회는 교회학교 등 기독청년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든 남녀별로 조직되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토론하며 다루었던 주제들은 “신문화와 간도”, “간도의 교육을 위하여”, “간도 동포의 희망과 눈물”, “청년의 사명과 할 일”, “내지 동포에게 호소함”, “미국자본유입설”등을 들 수 있습니다. 명동교회와 용정교회는 토요일마다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모임에는 신앙에 관계없이 청년 남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또한 교회청년회는 야구, 배구, 축구, 육상 운동경기를 청소년에게 보급하였고 정기적으로 운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섯째, 교회는 연극활동을 통한 계몽운동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간도에는 “간도용정 고학생 순극단(巡劇團)”과 “은진중학교 고학생 연예단”이 있었고 교회 내에도 연극부가 있어서 “배일의 풍자극” 또는 성극을 주로 무대에 올렸습니다.
여섯째, 교회는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에 앞장서 나갔으며 사회교육의 일익까지 담당하여 나갔습이다. 당시 필요한 중국어, 일어 등의 외국어와 주산, 부기 등 실업교육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일곱째, 교회는 일제에 의해서 초토화되어 버린 마을들을 찾아가서 굶주린 이웃들을 찾아내어 도와주었고, 일제에 의해 집이 불타버린 이웃에게는 거처할 곳을 알선하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기와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북간도의 김약연목사가 설립한 명동교회를 통하여 기독교 이상촌을 통하여 천당골로 만들어 나갔으며 그가 설립한 명동학교를 통하여 민족의 지도자와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냈습니다. 그리하여 명동교회가 명동촌 마을을 구세동, 영생동, 낙원동과 명신동을 천당골로 만들고자 한, 기독교적 이상촌운동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멋진 순례자의 모범이 된 것이었습니다. 북간도 지역이 중심이 된 명동교회는 모두가 하나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순례자의 길을 걸어갔던 그 발자욱들을 우리 모두는 배워고 우리의 교회를 통해서도 이룩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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