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씨
막 4:26~34, 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 2021년 6월13일
초등학교 교사였던 이오덕(1925~2003) 선생의 책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와 『우리글 바로 쓰기』를 제가 젊은 시절에 읽고 초등학교 교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절감했습니다. 최근에는 역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몇 권 읽으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저도 한때 초등학교 교사가 꿈이었습니다. 이오덕과 나태주 선생 외에도 존경받을만한 교사들은 많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이들을 교육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인격체로 대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을 어른이 설정한 틀에 억지로 짜 맞추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고유한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다는 뜻입니다.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을 고유한 인격으로 대하고 싶은 교사들에게 중요한 관점의 하나는 아이들을 미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미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열려있는 가능성입니다. 흔한 말로 그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미래에 노벨상을 탈 수도 있고, 인류의 위기를 막아내는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실은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들은 미래의 아인슈타인을, 미래의 마더 테레사를, 미래의 위대한 시인과 화가와 신학자와 철학자를, 그리고 미래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교사는 두렵고 떨리는 직업입니다.
교사들만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이처럼 두렵고 떨리는 어떤 사태 앞에서 살아갑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고, 무감각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두렵고 떨림의 절정 가운데서 자기 삶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럴 때 우리의 인생은 거룩한 영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소위 ‘성령 충만’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인생을 산다는 사실이 무슨 뜻인지를 예수님의 비유를 텍스트로 삼아 설명하겠습니다.
막 4장에서 예수님은 씨와 씨 뿌림과 땅과 열매 맺음과 거둠을 주제로 하는 몇 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막 4:1-9절에 나오는 네 가지 땅 비유는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렸습니다. 일부는 길가에 떨어졌고, 일부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졌으며, 일부는 가시떨기에 떨어졌고, 일부는 기름진 밭에 떨어졌습니다. 기름진 밭에 떨어진 씨만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이어서 10~20절에는 그 비유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26~29절에 다시 씨 뿌리는 이야기가 나오고, 이어지는 30~32절에도 다시 씨와 결실이라는 비유가 나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땅에 씨를 뿌리는 일과 비슷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더 웅장하고 거룩하고 특별해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 가장 거룩한 일들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 씨 비유
오늘 설교 본문에 해당하는 26~29절에는 씨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묘사됩니다. 씨에서 싹이 트고 자라는 현상을 농부는 알아채지 못합니다. 27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씨가 땅에 뿌려져 썩고, 거기서 싹이 나와 자라고 꽃을 피우고 결실을 보는 과정을 농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 다음에야 보이지 그 순간은 보이지 않습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28절) 맺기 때문입니다. 여기 직접 농사를 짓거나 텃밭을 가꿔본 분들은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절감하실 겁니다. 컴퓨터는 사람이 만들 수 있습니다. 아파트도 사람이 짓습니다. 그러나 씨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땅이 합니다. 그 일을 사람이 하려면 인쇄소에서 책을 찍어내듯이 공장에서 참외와 오이와 토마토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가능하지가 않기에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말하는 겁니다. 정말 신비로운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 토마토가 앞에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토마토를 잘게 부수면 여러 원소로 나뉩니다. 산소, 수소, 탄소, 칼륨, 구리, 인 등등 여러 원소가 있습니다. 자연과학자에게 한 개 토마토에서 나올 만큼의 원소 덩어리를 주고 실험실에서 토마토를 만들어보라고 하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요? 그런 일이 가능하면 공장에서 소고기나 고등어도 만들어낼 수 있겠지요. 현실에서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생명은 생명 자체의 힘으로만 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도 이와 같습니다.
가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자고 외치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라면 그 말이 맞지만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건설할 수 있을 것처럼 주장한다면 그건 착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주기도’에서 하나님 나라가 여기에 오게 하시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건설하고 싶어도 건설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그런 일을 수행할만한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한 가지이고,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하나님 나라가 너무 특별하다는 사실이 다른 한 가지입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일단 사랑 실천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면 세상을 사랑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런 꿈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 혁명도 그런 꿈입니다. 모든 혁명은 사랑을 실현하려는 열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해방신학도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공산주의 혁명과 해방신학이 이 세상을 실제로 얼마나 바꿨을까요? 그들의 열망과 노력을 저는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도 여전히 빈부격차를 줄여나가야 하고,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사회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혁명은 지금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그걸 실현할만한 능력이 사람에게는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 아름다운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체제가 세계 역사에서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작동되었는지를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수도승이 사는 수도원에도 사랑의 나라가 온전하게 실현되지 않습니다. 수녀복을 입은 수녀들의 수녀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완성할 터이니,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으니 각자도생하듯이 열심히 살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지를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민감해지고 거기에 기꺼이 동참하게 됩니다.
둘째 씨 비유
30~32절에는 겨자씨 비유가 나옵니다. 겨자씨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기가 작지만 자라면 새들이 깃들 정도로 크다고 합니다. 아주 작은 씨에서 아주 커다란 풀이 나왔습니다. 완전한 변화라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외계인이 지구에 처음 방문해서 씨와 꽃을 각각 따로 보았다고 합시다. 그는 씨와 꽃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구의 씨 현상은 그야말로 모든 생명의 원천입니다. 인간도 사실은 씨를 통해서 후손을 이어갑니다. 어머니 자궁 안에서 배아라는 씨로 출발하여 사지와 오장육부가 생기고, 때가 되어 밖으로 나옵니다. 어머니의 자궁 안과 밖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물리학의 빅뱅 이론에 따르면 한 개의 점이 폭발하여 이 어마어마한 우주가 나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주보 표지에는 맨드라미 씨 사진이 있습니다. 저 작고 검은 씨앗에서 강렬한 주홍 색깔의 맨드라미가 나온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듯이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도 지금 여기서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부활 문제를 설명하면서 씨를 언급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고전 15:38)라고 했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생명 형식은 씨와 같습니다. 이 씨는 죽어야만 합니다. 죽지 않으면 꽃이라는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죽음으로써 얻게 될 생명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생명입니다. 완전히 변화된 생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 52). 이 변화된 생명을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요한계시록은 초현실주의 그림으로 형상화해서 전달합니다. 계 21, 22장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고, 새 예루살렘입니다. 인간이 묘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입니다. 계 21:10, 11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이런 장면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너무 달라서 상상하기 어렵기는 합니다. 믿기도 힘듭니다. 상상이 안 된다고 해서 무조건 부정하는 일은 어리석은 겁니다. 맨드라미 씨가 자신의 미래인 꽃을 상상할 수 없다고 부정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배아였다가 지금의 이런 모습의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씨가 자기의 현재에만 묶인다면 꽃의 미래는 없습니다. 만약 태아가 어머니 자궁만을 고집한다면 그 태아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사건 안에서 벌어지는 그 미래의 생명을 꽃처럼 피워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 여기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어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을 인생 목표로 삼으면 됩니다. 오늘의 시대정신은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우리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경험한 그 하나님 나라 안으로, 즉 부활 생명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습니다. 비록 씨 같은 세상에서 살지만, 그 미래인 꽃을 실감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아직 현실로 나타나지 않은 그 미래의 생명 안으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깊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이 막연하게 들리십니까? 우리는 미래의 생명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즉 알리셨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계시를 세상에 알린 사람들이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이며, 신약의 사도들입니다. 그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성경에서 우리는 씨의 미래인 꽃을, 즉 우리의 미래인 참된 생명을 부분적으로,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호 6:6절은 이렇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자비롭고 사랑이 넘치며 용서할 줄 알고 정의와 공의를 찾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똑똑한 사람만이 아니라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 사람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세상을 향해서 노력하는 삶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배우고 맛본 이들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또는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하나님의 미래를 갈망하고 기다릴 겁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게 될 겁니다.(마 7:7) 거기에서만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외에 어디에서 여러분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
이 대목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여러분이 꼭 기억해야 합니다. 씨가 썩어야만 싹이 나고 꽃을 피우듯이 우리가 죽어야만 미래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이런 생각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해야 합니다. 씨의 미래인 꽃은 이미 씨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여기서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지 못하면 미래의 생명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현재 삶에 가까이 왔다고, 이미 그 안으로 들어왔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은폐의 방식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다시 씨를 보십시오. 씨 안에는 꽃이 실체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꽃이 씨 안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은 느낍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아이들의 미래를 상상할 줄 아는 교사가 되어야만 아이들을 고유한 인격체로 대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이들의 미래가 오늘의 그 미숙한 아이들 인격 안에 숨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보석이 가득한 원석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지금 전시회를 열고 있는 김길연 집사의 그림에서 저는 그런 시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꽃과 나무와 구름과 노을과 밤하늘과 별에서 숨은 세계를 봅니다. 그런 시각이 없다면 예술가가 될 수 없었겠지요. 지금 이미 여기서 하나님의 미래를, 그 자유와 평화를, 그 기쁨과 안식을 미래 내다볼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질적으로 새로워집니다. 바울이 말하듯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을 봐야 합니다.(고후 5:17) 그런 경험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어느 정도로 강렬한지는 개인에 따라서 다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살아가는 과정에서 높낮이가 달라집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영원한 평화를 강렬하게 느끼다가도 어느 때는 혼미한 어둠 속으로 떨어집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사는 한, 즉 우리가 씨와 같은 세상을 사는 한 우리의 삶에서 답답한 일들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미없고 짜증 나는 일도 많습니다. 답답해서 숨쉬기 힘들기도 할 겁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도 이런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생명 완성이나 충만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질 때마다 허무하고 불안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더라도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아무도 이런 어둠의 실존을 손쉽게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과 비슷하게 삽니다.
지금 저를 포함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격려의 말씀을 드릴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설교하는 이 순간이 저에게 영적으로 고양되는 순간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두려움과 불안과 안타까움을 너무 겁내지 마십시오. 씨 같은 우리 삶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숨어 있으니까요. 우리가 그 생명을 기독교 신앙 안에서 갈망하면서 배워나간다면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가 우리 영혼을 강렬한 빛으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이미 꽃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저는 기다려집니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