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막 1:40-45)
나병 치유
오늘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나병치유 사건은 모든 공관복음서가 다루고 있습니다. 각각의 복음서가 이 사건을 초반부에 배치한 걸 보면 아마 예수의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가 초기 공동체 안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는 의미이겠지요. 특히 마가는 예수의 메시아성에 관한 일련의 보도인 1-3장 안에 이 이야기를 배치했습니다. 예컨대 마가복음 1:21-28에는 악령 들린 사람을 고친 이야기가, 1:29-34에는 열병 걸린 시모의 장모를 고친 이야기를 비롯해서 많은 환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친 이야기가, 1:35-39에도 역시 회당에서 전도하시며 마귀를 쫓아낸 이야기가 나옵니다. 2:1-12에는 중풍병자 치유사건, 3:1-6에는 손 오그라든 사람 치유사건이 나옵니다. 이렇게 마마복음 1-3장에는 주로 질병 치유와 축귀 사건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나병환자의 치유 사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에게 와서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이 나병환자가 어떤 연유로 예수를 찾아왔는지 궁금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병은 고대인들에게 아주 저주스러운 병이었습니다. 요즘은 한센씨 병이라고 불리는 나병은 천형이라는 말이 붙은 병인데, 이스라엘에서는 죽은 사람과 다를 게 없다고들 여겼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습니다. <벤허>라는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나병환자들은 아주 외딴 곳, 사람들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절벽 아래에 모여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어쩌다가 마을로 들어오려면 사람들이 미리 피할 수 있도록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윗수염을 가린 채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하고 외쳐야만 했습니다.(레 13:45,46). 왜 이스라엘 사회에 이런 율법전통이 세워졌는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병이 그만큼 두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나병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지난날에는 자기 가족이며, 친구였을 겁니다. 그러니 완전히 정을 끊을 수 있나요? 이런 정에 끌려서 조금씩 만나다 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병에 걸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여기서 나병의 전염성 여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병과 악성 피부질환을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두려운 병일뿐입니다.
이런 상황에 놓인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에게 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친구나 가족에게서 전해 들었겠지요. 이 사람이 예수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고 합니다. 나병환자가 성한 사람인 예수에게 가까이 온다는 것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의 주변에 아무도 없었을까요?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때 군중들이 예수를 따랐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의 상황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 상황은 매우 급박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일반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었던 사람이지만 여하한 연유로 그는 성한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 나타나 예수에게 고쳐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본문은 예수의 반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째, 예수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둘째, 그에게 손을 갖다 대셨다. 셋째, 깨끗이 되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각각 마음의 움직임, 몸의 움직임, 말의 움직임으로, 혹은 마음의 동일시, 몸의 동일시, 말의 동일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 예수는 나병환자의 요구에 전폭적으로 응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에 따라서 결국 나병 증세가 사라지고 깨끗이 나았다고 합니다.
침묵 요구
우리는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 중에도 나병환자 치유가 실제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본문을 사실보도로만 생각한다면 나병이 분명히 치료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 텍스트는 그런 사실 여부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치료행위 자체만 갖고 우리가 논란을 벌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세요. 나병치유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다른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사건입니다. 그 어떤 다른 사실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치유 사건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병 증세가 사라진 이 사람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44절). 마가는 예수가 아주 엄하게 이르셨다고 묘사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 일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 둘째, 사제에게 몸을 보이라. 셋째, 예물을 드려서 깨끗해진 것을 증명하여라. 예수가 병을 치료한 후에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런 건 흡사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고 처방한 다음에, 혹은 수술을 끝낸 후에 준수해야 할 규칙을 설명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궁금증이 생깁니다. 예수는 왜 이 사건을 숨기시려 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나병환자를 고쳤다는 사실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구약성서에도 간혹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미리암의 치유입니다. 모세의 권위에 반항했다가 나병에 걸린 미리암을 위해서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일주 일만에 미리암의 나병이 치료되었습니다.(민 12:4-6). 다른 하나는 엘리사가 시리아 장군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준 사건입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한 다음에 치유되었습니다.(왕하 5:8-14). 학자들은 예수의 나병 치유 사건을 엘리사 전승의 배경에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는 카리스마적인 치유 능력을 지난 종말론적 예언자라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예수의 능력을 나타내는 사건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음 같은 설명이 가능합니다. 첫째, 예수는 나병환자의 입장에서 일을 처리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미 나병이 나았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일입니다. 그래야만 이 사람이 마을로 돌아와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일단 제사장에게 가서 치료된 사실을 인정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를 제사장에게 보낸 것입니다. 만약 자기가 치료된 것을 먼저 떠들어댄다면 중간에 무슨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죠.
둘째, 조금 더 타당한 이유는 예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병환자를 치료하긴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예수가 정작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 사람이 예수의 말을 듣지 않고 나발을 불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나병 치료된 사건이 알려진 일과 예수가 동네에 들어가지 못한 일과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사람들이 몰려들면 피곤하다는 게 그 이유일까요? 아니면 이런 일로 인해서 바리새파와 제사장들에게서 요시찰 인물로 선정될까 염려한 것일까요? 무엇이 실체적 진실인지 우리가 지금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나병 치유 사건이 지금 알려지는 걸 예수가 원치 않았다는 건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감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이런 감춤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과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히려 자신을 숨기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이신 예수님은 시작부터 이런 감춤의 방식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아무도 모르는 어떤 날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이 그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을 눈치 챈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마태복음은 동방박사들을 이야기하고, 누가복음은 목동들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아름답게 꾸며진 일종의 전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오심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만이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그 십자가가 곧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부활 사건도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그 사건은 원래 은폐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진리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요즘도 참된 것은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합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예술적 능력을 인정받기도 하지만, 그 시대에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가도 많습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죽은 예술가와 문학가들도 많습니다. 과학의 세계도 역시 그럴지 모릅니다. 황우석 사태에서 그 면모를 약간 엿볼 수 있지만, 겉으로 굉장한 업적인 것 같아도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원자폭탄을 만든 과학자의 능력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수십만 명의 생명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진리와는 거리가 멉니다. 실제로 생명을 살리는 과학은 아직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살아가나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어떻게 증거되고 있나요? 오늘 우리는 신앙마저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교회도 역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만 추구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메시아적 사건마저 감추려고 했던 예수의 생각과 달리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자기를 드러내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미 앞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그 대답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은폐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하지 않으면 우리는 대신 자기 자신을 내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공허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만나는 기쁨, 사랑, 평화의 힘이 나를 지배하지 않으면 결국 자기를 내세우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드러남
하나님 나라는 기본적으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흡사 땅 속에 묻혀 있는 보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닙니다. 땅에 묻혔어도 보물은 보물로 남아있습니다. 그것이 어느 날 드러납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에 의해서 보물은 사람들에게 알려집니다. 이 드러남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속성입니다.
예수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나병환자의 입을 엄하게 단속했지만 그는 예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는 물러가서 이 일을 널리 선전하며 퍼뜨렸기 때문에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께 모여 들었다.” 이 사람이 예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은 잘못일까요, 아닐까요? 이런 질문은 의미 없습니다. 성서 기자도 그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잘못이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이 나병치유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 사건이 알려지자 예수는 외딴 곳으로 피하셨다고 합니다. 외딴 곳은 바로 나병환자들이 가야할 곳입니다. 이제 나병환자는 동네서 나발을 불고 다니는 반면에 예수는 외딴 곳으로 물러나셨습니다.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곳까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왔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는 예수의 감춤과 드러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교를 들은 여러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 어쩌라는 말인가? 여러분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감춤이며 동시에 드러남인 것처럼, 어느 때는 숨은 방식으로, 어느 때는 보이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삶에 개입할 것입니다. 그것을 분간하는 것은 모두 여러분 각자의 몫입니다. 때로는 보이지 않은 방식으로, 때로는 보이는 방식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참된 기쁨과 평화와 사랑의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참여할 수 있는지, 그것은 여러분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의 인생 전체는 바로 이것을 분간할 수 있는 영성의 심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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