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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

http://wms.kehc.org/d/dabia/06.07.16.MP32006. 7.16. 마태 20:1-16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예수님은 천국 비유를 자주 들려주셨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포도원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마태복음의 독자 전승입니다.(마 20:1-16)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그 비유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마 20:1) 이 주인이 직접 일꾼을 찾아 나섰다는 걸 보면 매사를 꼼꼼하게 처리하는 성격의 사람인지 모르겠군요. 어쨌든지 그는 대략 아침 6시, 혹은 7시 쯤 노동시장에 나가서 필요한 만큼의 노동자들을 일당 한 데나리온에 포도원 일꾼으로 채용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잠시 후 아침 9시에 다시 이 노동시장에 나갔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거리가 많아서 일꾼이 더 필요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인은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일꾼 채용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닙니다. 낮 12시와 오후 3시에도 일꾼을 데리고 왔습니다. 저녁 5시가 되었습니다. 이제 시나브로 하루의 일을 마쳐야 할 시간입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포도원 주인은 그 시간에도 다시 노동시장으로 나갔습니다. 그때까지 그곳에서 빈둥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포도원 주인은 다시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마 20:7b) 여기까지가 이 비유의 제 1막에 해당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아름답다고 하기보다는 눈물 없으면 읽기 힘든, 가슴 뭉클한 이야기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저녁 5시까지 놀고 있는 사람에게 왜 종일토록 놀고 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 노동자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일용직입니다. 그날은 그에게 재수가 없는 날이었겠지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일할 거리가 없는 날이었으니까 말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놀고 있는가, 왜 장터에서 빌빌대고 있는가, 하루를 공쳤으면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지낼 일이지 이게 뭔가? 이 사람은 무슨 이유로 그 시간까지 장터에서 어정거렸을까요? 오늘도 끼니가 없다는 아내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을까, 아니면 병든 아내와 노환에 드러누운 부모님을 보기가 민망했을까요? 포도원 주인은 이 사람을 기꺼이 자기 포도원 일꾼으로 채용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기껏해야 한 시간밖에 일할 수 없었지만 주인은 그에게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는 이 말을 구원론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요? 거의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에게 마저 하나님은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으셨다는 말은 아닐까요? 물론 성서는 이와 정반대의 사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미 천국 문이 닫힌 다음에는 아무리 울고불고해도 아무도 그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의 잣대로, 우리의 시간표대로 천국이 재단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으로만 본다면 오후 5시까지 놀던 사람에게도 주인은 포도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은총을 허락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계산법
포도원 주인의 비유 제 2막은 포도원의 하루가 끝난 사무실에서 시작됩니다. 주인은 청지기를 시켜서 오후 5시에 온 품꾼들부터 일당을 지급하라고 시켰습니다. 겨우 1시간 밖에 일한 게 없기 때문에 푼돈이나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 이 품꾼들은 놀랍게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기쁨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상상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들은 하루의 생명을 연장 받는 것과 마찬가지의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예상 밖의 즐거운 이야기가 그 이후로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뀝니다. 그 단초는 오후 3시, 정오, 아침 9시, 아침 7시에 온 사람들이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그들의 불평을 들은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마 20: 13-15)
포도원 주인을 향한 이 사람들의 불평은 터무니없는 게 아닙니다. 누가 보더라도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열 시간 일한 사람을 동일하게 대우한다는 건 정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불평을 쏟아 부었을지 모릅니다. 아니 현재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나보다 능력 없는 사람이 나와 똑같은 대우받는 걸 못 견뎌합니다. 우리는 가능한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 사람의 능력만큼 대우하는 것이 곧 정의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회과학이나 경제문제는 잘 모르지만, 오늘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바로 우리의 이런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아닐까요? 개인과 개인 사이에, 기업과 기업 사이에 이제는 정부와 국가가 개입하지 말고 그들이 무한 경쟁할 수 있는 체제로 가자는 것이 FTA 아닌가요?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로 자본주의 일원 체제로 움직이는 오늘의 세계는 이런 경쟁력과 생산성만을 목표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방식으로 파이를 키움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경제적인 지위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이 오늘 본문에서 투덜대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그렇게 터무니없는 건 아닙니다. 만약 이 포도원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소문이 난다면 앞으로 이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며, 그뿐만 아니라 다른 포도원의 운영도 근본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런 현실은 교회에도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대개 교회 신자들 사이의 문제들은 신학적이거나 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데에 대한 불만에 기인합니다. 그것이 어쩌면 교회의 평화를 깨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인지 모릅니다. 간혹 장로 투표에서 떨어졌다는 이유로 교회나 나가지 않는다든지 파당을 만들어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상류층에 속한 사람인데도 그런 해괴한 일들을 저지릅니다. 이런 사건들은 그 한 사람의 경우만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어느 교회에나 그 여파의 차이가 다를 뿐이지 흔하게 일어납니다. 왜 그런가요?
모든 인간에게는 포도원 비유에서 볼 수 있는 불평이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인간의 숙명이겠지요.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런 인간의 숙명을 죄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 개인의 내적인 평화와 교회의 평화와 사회의 평화를 깨는 장본인은 죄, 즉 인간의 자기 집중입니다. 저는 오늘 불평과 죄의 관계에 대해서는 깊이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대신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조금 더 따라가려고 합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귀를 기울여봅시다.

꼴찌와 첫째의 전복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20:16) 나중에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은 꼴찌로서 첫째가 되고,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하던 일꾼은 첫째로서 꼴찌가 된 셈입니다. 그런데 이 결론은 이 비유 바로 앞에서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마태 19:3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고 꼴찌였다가 첫째가 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두 아포리즘은 단지 첫째와 꼴찌의 순서가 다를 뿐이지 내용은 판박이입니다.
우리가 흔하게 듣는 “첫째와 꼴찌” 이야기는 단지 교회에 먼저 나왔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전복(顚覆)성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합리적이고 정당하다고 생각하던 모든 질서가 하나님의 질서에 의해서 전복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역사의 점진적인 발전이나 개량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철저하게 오늘의 것과는 다른 방식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철저하게 초월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는 설명합니다. 그것은 이 역사 너머에서 이 역사를 뚫고 그분의 재림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마 19:30절의 아포리즘이 나오게 된 배경은 예수님을 찾아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한 어느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완벽하게 지켰다고 자신감에 차 있던 이 청년은 예수님에게서 그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받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 19:21) 마태의 보도에 따르면 이 청년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사건 뒤에 예수님은 부자와 약대 이야기를 하셨고, 아무도 구원받기 힘들겠다며 놀라워하는 제자들에게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9:26) 그 뒤로 제자들과의 대화 끝에 첫째와 꼴찌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0장에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썩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예수를 따르라는 명령에 실망하고 돌아갔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떼제의 로제 수사, 마더 테레사를 비롯한 그런 수도자들 이외에 누가 자신의 소유를 완전히 포기하고 예수를 따른다는 말입니까? 과연 예수님이 그걸 실제로 요구하신 걸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도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소유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그가 소유를 포기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그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영생을, 또는 구원을 얻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는 그것의 무모성을 깨기 위해서 이 청년이 지키지 못할 요구를 하셨습니다. 앞서 읽은 26절 말씀처럼 구원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용건이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일은 우리의 눈에 첫째가 꼴찌가 되기도 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포도원 주인의 뜻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주인에게 불평을 쏟아놓은 이 사람들의 논리가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이고 정의롭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주인과 한 데나리온으로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잘못된 게 아닙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 받은 한 데나리온 때문에 그들의 심사가 뒤틀린 것입니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라는 주인의 말은 옳습니다.
오늘 인간사회는 하나님의 은총을 폐기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불만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합리성은 하나님의 은총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의 삶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이 보기에 자격이 없는 다른 사람도 똑같이 받았다는 사실이 분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지식인들도 그렇고,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그렇고, 선진국들도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더 심한 무기를 보유하고 실험하면서도 북한의 미사일 실험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북한의 미사일 실험이 괜찮다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작은 차이를 부풀려서 자기들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그런 인간의 내면적 자만심을 지적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은총의 질서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철저한 전복성을 내다보아야 합니다. 이게 현실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전혀 다른 질서를 꿈꿀 수 있어야겠지요.
마태복음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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