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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2008.11.9.(마태 25:14-30)

마태복음 25:14-30절에 나오는 소위 ‘달란트의 비유’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돈을 맡겼습니다. 그 돈이 상당한 액수입니다. 그 당시 금은의 중량인 한 달란트는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7억 원이라고 합니다. 한 종에는 다섯 달란트, 다른 종에게는 두 달란트, 또 다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이렇게 차이를 둔 이유는 종들의 능력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종들은 단순히 힘든 일만 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이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큰돈을 맡길 리가 없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 돈으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를 맡은 종도 두 달란트의 이익을 거뒀습니다. 오랜 만에 돌아온 주인은 그들을 향해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걸 땅에 묻어두었다가 주인에게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주인은 이 종을 향해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면서 이 종이 갖고 있던 한 달란트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원래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주었습니다. 주인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

주인의 태도에 대해

여러분은 이 주인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단순히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이 주인의 태도는 아주 당연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살려서 많은 일을 한 사람은 칭찬을 받아 마땅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은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이 주인의 태도가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닙니다. 이 주인은 종들에게 돈을 맡기면서 무얼 어떻게 하라고 지침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속으로는 장사를 해서 돈을 남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지시를 내렸다면 한 달란트를 맡은 종도 장사를 했을 겁니다. 이 한 달란트를 맡은 사람을 너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는 자기의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겁니다. 공연히 잘 할 줄도 모르는 장사를 했다가 한 달란트마저 잃는 것은 주인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요즘처럼 중국 펀드에 가입했다가 순식간에 재산이 반 토막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었습니다. 재산을 땅에 감추는 것은 그 당시에 재산을 가장 안전하게 지키는 일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돈을 벌지 못했으니 잘한 게 아니지만 그 동기만은 일단 순수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 사람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크게 꾸짖었습니다. 동기의 순수성을 인정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주인의 책망에는 돈을 굴리는 방법도 들어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은행에 넣어서 이자라도 받게 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유대의 율법 정신에 따르면 이자를 받는 건 옳은 행동이 아닙니다. 이자 운운한 걸 보면 이 주인은 스크루지 영감처럼 돈에 환장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한 달란트마저 빼앗았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종은 갑절의 돈을 남긴 동료들이 칭찬을 받은 걸 보면서 뭔가 부끄러운 마음으로 자책하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만약 제가 주인이라고 한다면 이미 다른 두 종들이 돈을 충분히 남겨서 기분도 좋고 하니 이 세 번째 종을 그렇게 몰아붙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괜찮아, 다음에 잘 하면 돼, 하고 말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런 비유를 일반적인 이야기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 공동체가 처한 특별한 상황을 전제합니다. 이런 상황을 전제하지 않으면 두 가지 문제가 벌어집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편견입니다. 여기서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은 완전히 수전노이며 폭군입니다. 성서가 이런 방식으로 오용되는 일은 흔합니다. 예컨대 여리고 성과 아이 성에 사는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집단 살해하는 게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진술하는 여호수아의 이야기는 아주 특별한 상황을 전제할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은사론의 왜곡입니다. 이런 달란트 비유를 읽는 신자들은 자기도 달란트를 남겨야 한다는, 그렇지 않으면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휩싸이는 일이 많습니다. 이 달란트 비유는 우리의 일반적 신앙생황의 어떤 기준을 제공하는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 공동체가 처한 아주 특별한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특별한 상황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재림의 지연과 바리새파 운동

이 달란트 비유는 독립적인 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이야기와 한 묶음에 속합니다. 본문의 앞 구절인 마 25:1-13절에는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오고, 뒤 구절인 마 25:31-46절에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한 이 세 이야기는 모두 재림 및 심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신랑이 왔을 때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는 영벌에 해당되는 왼편으로 분류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묻어두었던 종은 어두운 곳으로 쫓겨납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왜 이런 이야기를 이 대목에서 집중적으로 제시하고 있을까요?
예수 재림의 지연으로 인한 신앙심의 이완이 그 대답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바로 이것으로 인해서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재림 공동체라고 이름을 붙여도 좋을 정도입니다. 바울의 편지에도 그 날이 가까이 임했다는 표현은 흔합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징조는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다가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고,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느슨하지만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던 유대교에서 바리새운동이 과격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종교 체제를 잡지 못한 어린 기독교의 입장에서 이런 모든 현상들은 위기입니다. 그들 안에서 유대교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아예 신앙을 포기하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들에게 재림과 심판 신앙이 공수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주인이 곧 돌아온다고 말입니다. 그 주인은 우리와 계산을 할 거라고 말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마태복음 공동체의 특별한 상황에서만 효력이 있지 지금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의 특별한 상황을 전제하고 있지만 분명히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제가 예로 든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집단 살해가 고대 유대인들의 특별한 삶을 전제하고 있지만 고유한 하나님 경험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 달란트의 비유도 역시 그렇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개인과 공동체가 처한 자리는 늘 특별합니다. 그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고유한 방식으로 그들을 만납니다. 마태복음 공동체의 특별한 상황에서 그들과 만나신 바로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신가요? 하늘나라의 주인인 그분은 우리와 어떻게 계산, 또는 계시하는 분인가요?

유일하고 배타적 셈법

마태 25장에 나오는 세 비유에서 논점은 하늘나라에서 거절당한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특별히 이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이 너무 늦게 오는 바람에 어려움을 당한 것이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에 속한 이들은 나름으로 주님을 섬겼으며, 오늘 본문인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역시 자기 딴에는 최선으로 재산을 지켰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속으로 억울하게 생각할 겁니다. 뭐가 문제냐, 하고 말입니다. 주인이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호소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일정한 기준으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형평성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반 법정에서는 살인자에게 어느 정도의 구형이 선고되어야 하는지 대략적으로라도 정해져 있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그런 일반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는 우리가 참고할만한 판례도 없습니다. 천명 모이는 교회를 목회했는지, 백 명 모이는, 또는 오십 명 모인 교회를 목회했는지에 따라서 일괄적으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신앙적 기준에 올라섰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오직 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기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형평 운운하지 마세요. 그렇게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객관적 기준으로가 아니라 개별적인 기준으로 행해진다는 말은 그분이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본다는 뜻입니다. 그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속을 정확하게 뚫어보십니다. 그런 분 앞에서 우리가 어찌 객관적인 기준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에게 내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고, 그리고 한 달란트마저 빼앗기는 선고는 사람의 중심을 정확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고유하고 배타적인 판단입니다. 사람은 그 중심을 못 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중심을 정확하게 보십니다.  
이 종의 중심에 무엇이 있을까요? 주인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잘 보십시오. 그는 주인을 가리켜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인을 판단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도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헌금을 낸 것만큼 받으려고 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보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권선징악의 장본인처럼 규정합니다. 율법주의가 바로 그런 태도입니다. 자신의 업적으로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안에 담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뜻에 맞는 행동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전혀 다른 기준으로,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고유한 기준으로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을 난폭한 분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고유한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분의 자비이며, 은총입니다. 만약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따진다면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차는 것은 아닙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거꾸로 세상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해 있던 세리 같은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배타적 판단은 폭력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계산의 순간

위의 설교를 듣고 좀 막막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하나님의 판단이 배타적이고, 따라서 우리가 거기에 맞춤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지금 우리가 무얼 어떻게 하라는 거냐, 하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공동체의 삶을 다시 보십시오. 저는 앞에서 그들에게 영적인 위기가 닥쳤다고 했습니다. 안으로는 신앙의 매너리즘이고, 밖으로는 실제적인 불이익입니다. 밖의 문제는 종속변수입니다. 안의 문제가 핵심입니다. 그들은 예수 재림의 지연으로 인해서 종말론적 신앙의 긴장과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주인의 속성이 어떻고 하면서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면서 말입니다. 주인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안도감에 빠져 있었겠지요. 그것은 자기기만이며, 허위의식입니다. 결국 졸지에 주인을 돌아왔고, 그는 쫓겨났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태복음 공동체와 동일한 영적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의 실체를 못 보고 있을 뿐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 재림의 지연이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마태공동체는 그나마 불안감이래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것마저 망각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업적을 쌓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해체되고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셈법으로 계산해야 할 날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거나 때로는 못들은 척 외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과 그의 고유한 계산법이라는 말이 좀 막연한 것처럼 들리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신앙과 삶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겁니다. 신앙은 둘째 치고 삶만이라도 직관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십시오. 지난주에 안경모 교우가 부친상을 당해서 서울을 다녀왔는데, 우리 모두에게 죽음의 그날은 도적같이 임합니다. 무덤에 묻히는 자나 그를 묻고 있는 자나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죽음이 실제로 이르기 전에도 우리는 그 날이 속히 임한다는 사실을 아주 실증적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피부와 머리카락이 생기를 잃어가면서 우리의 생명 에너지가 소진되고 있습니다. 지금 젊음을 만끽하는 청소년들도 우리 나이든 사람들의 길을 속히 따라옵니다. 이것이 절대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 어떤 노력으로도 늙음과 죽음을 막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인류라는 종도 그렇고, 지구가 포함된 태양계도 그렇고, 우주 전체가 그렇습니다.
성서는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인 그분의 고유한 셈법으로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사건입니다. 이 땅의 생명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계산대에 올려지는 때입니다. 그 날은 우리에게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쁨의 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참된 생명으로 해방 받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마태복음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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