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부터 …
막 1:4~11, 주현절 후 첫째 주일, 2021년 1월10일
예수 세례
네 복음서에서 다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분명해 보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이 사실은 곤혹스러웠을 겁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신성에 자칫 흠집이 날 수도 있는 종교의식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세례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그 곤혹스러운 상황을 극복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설교의 성경 본문인 막 1:4~11절에 나옵니다.
이 본문은 두 단락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단락은 막 1:4~8절입니다. 여기에는 세례 요한의 활동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계 로마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역사책에도 거론될 정도로 매우 특별한 인물입니다. 제가 보기에 요한에게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의 선지자 전통이고, 둘째는 뛰어난 도덕성이고, 셋째는 압도적인 리더십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요한이 출중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짚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길잡이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7절과 8절에서 세례 요한의 입을 빌려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이 진술은 당시 기독교인들이 생각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둘째 단락은 9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에서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요단강까지 왔습니다.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핵심은 아닙니다. 그 세례 장면에 나타난 어떤 특별한 현상이 중요합니다.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나는 시각적인 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청각적인 현상입니다. 먼저 눈에 보이게 나타난 현상은 10절에 나옵니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세례받는 예수님이 요단강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순간에 하늘이 갈라지면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림같이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장면입니다. 지난 2천 년 기독교 예술사에서 수많은 화가가 이 광경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실제로 하늘이 갈라졌다고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하늘이 갈라졌다는 표현은 어떤 영적인 계기를 가리키는 문학적인 은유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하늘은 손이 닿지 않는 생명의 비밀 창고와 같았습니다. 해와 달과 별은 모두 하늘에 있습니다.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동지가 지나고 태양 빛이 따뜻한 봄이 오면서 대지에 온갖 곡식과 채소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비도 하늘에서 내립니다. 하늘 너머에는 물이 가득합니다. 물 저장고의 문이 열리는 현상이 비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체가 하늘에 전적으로 기대서 살아가는 게 분명하니까 그 하늘은 생명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늘은 우주를 창조하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내려왔다고 합니다. 비둘기는 성령의 오심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에 성령이 불꽃으로 묘사된 것처럼 말입니다(행 2:3). 성령이 예수님에게 내려왔다는 말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이 사람의 노력이나 조작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살아가면서 그런 경험을 종종 할 겁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영이 인도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깨달음을 얻을 때도 성령을 생각하게 됩니다. 거꾸로 사람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의 이끌림을 받기도 합니다. 어떤 행동은 사람이 아니라 악령의 지배를 받는 거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성령과 악령이 따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우리가 그 영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살인의 도구로 쓰느냐, 음식 만드는 데 쓰느냐에 따라서 칼의 용도가 달라지듯이 말입니다.
하늘의 소리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일어난 둘째 현상은 청각적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11절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1절의 현상도 10절과 마찬가지로 “하늘로부터” 나타났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이라는 개념이 아직 멀게 느껴지면 생명의 미래라고 바꿔서 생각하면 됩니다. 그 미래는 우리의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입니다. 그 하늘로부터 두 가지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입니다. 누가복음(3:22)도 똑같은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런 문장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별로 낯설지 않았을 겁니다. 시편 2:7절에 비슷한 문장이 나옵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늘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을 경험했기에, 즉 생명 완성인 구원을 경험했기에 “너는 내 아들이라.”라는 시편 기자의 그 표현을 빌렸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럴만한 눈과 귀가 있으면 하늘이 갈라지는 걸 보고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을 언제 하십니까? 각각 다를 겁니다. 일단 성경의 의미에 앞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생명체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신비에 대한 경험이 바로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입니다. 이를 물리학 용어로 말하면 역장(force field)입니다. 역장은 개별 사물이나 현상의 규칙성보다 더 포괄적이고 더 근본적인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 차원은 우리의 오성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우리의 삶과 무관해 보입니다.
일상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여기 설교하는 설교단 위에 성경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의 책이라는 사물로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성냥 하나로 다 태워서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체를 뚫어본다면 우주 전체가 이 성경이라는 책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종이 한 장이 이미 우주의 무게를 담고 있습니다. 한 장의 종이를 따라가다 보면 태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제 손에 들린 이 성경책 안에는 무한한 태양 에너지가 들어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신비로운 현상입니다. 특히 이 책이 성경이라고 한다면 인류 역사의 수많은 사연이 들어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 아브라함도 만나고, 모세도 만나고, 예수와 제자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허투루 대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실체를 뚫어본다면 아주 놀라운 세상을 볼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몇 대 조상과 여러분의 몇 대 조상이 친구나 연인이었을지도 모르고, 주인과 하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진화론에 따르면 지구에 사는 생명체는 한 조상에서 나왔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빅뱅을 일으킨 한 점에서 나왔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보더라도 우리와 다른 생명체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모두 한 형제이며 한 가족입니다. 신비롭습니다. 이런 존재의 신비를 느끼는 경험이 곧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를 듣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는 사람은 영혼이 풍성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신비
오늘 성경 본문이 말하는 하늘의 소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구원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신비가 막연한 어떤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나온 설명으로 충분히 전달되었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건을 신비라고 말한 이유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먹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여기 있는 종이는 곧 태양이야, 하는 말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구원의 신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아들일까요? 우리 기독교인은 무슨 근거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했다고 말합니까?
저는 먼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기 힘든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자고로 전지전능이고 무소불위의 존재자입니다. 그는 세상을 창조했고, 지금도 보존하며, 앞으로 완성하실 겁니다. 그는 승리자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도 당연히 승리자여야 합니다. 로마 군대를 하늘의 불벼락으로 박살 내고, 예루살렘 성전의 위선자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모든 병자를 당장 고치고 모든 불행을 물리쳐야 합니다. 뭔가 초월적인 권능으로 세상의 모든 악을 정화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메시아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바울은 고전 1:22절 이하에서 이런 사태를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종교적인 차원에서나 정치적인 차원에서 메시아와는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믿기 힘듭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구원의 신비를 실제로 안다기보다는 막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다음의 질문에 대답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가 예수처럼 살겠다고 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이렇다 할 직업도 없었고, 사람들에게 크게 인정받지도 못했으며, 최후에는 정치범으로 죽었습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자녀가 수도원에서 평생 살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동의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냐, 하고 저에게 묻고 싶으신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그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이 믿음은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를 들을 때 가능합니다. 구원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본질을 뚫어봐야 합니다. 쉬운 말로 우리 인생살이의 궁극적인 의미를 새롭게 바라볼 때만 그런 믿음이 가능합니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언젠가 설교하면서 저는 행복 전도자가 아니라 복음 설교자라고 말씀드리긴 했습니다. 그때 말한 행복은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수준의 행복이나 힐링캠프에서 배우는 행복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행복을 선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지금 여기서 말씀드리는 행복은 마 5장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에 해당합니다. 소위 ‘팔복’이 말하는 행복은 가난하고 외롭고 울고 갇힌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오늘 우리는 상대적으로 풍족하게 살기에 성경의 복을 누리기는 틀렸구나, 하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 팔복의 중심 메시지는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에 대한 강조이지 가난을 미화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끔찍하게 여기는 가난과 고독과 실패 가운데서도 궁극적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사실이 이해가 되고 믿어지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늘의 소리를 듣는 사건입니다.
하늘의 소리를 못 듣는 이유
여기서 왜 자신에게는 하늘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말은 곧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솔직하게 질문해보세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으신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인생이 충분히 만족스러우신가요? 많은 분이 그렇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런 경험이 부분적으로 있다고 해도 어느 순간에 들쑥날쑥 다 사라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도 생명 충만감을 누리지 못하는 걸까요? 우리는 왜 구원의 확신이 없는 걸까요?
가장 기초적인 기독교 교리로 대답하면 죄가 그 이유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면 당연히 하나님의 생명과 소통이 안 됩니다. 죄는 하나님 없이 자기의 힘으로 삶을 완성해야겠다는 강요와 유혹에 떨어지는 사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기독교의 위대한 스승들은 조금씩 다른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교만이라고 했고, 아퀴나스는 자기 사랑이라고 했고, 판넨베르크는 자기 집중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삶의 중심에 놓으려는 욕망을 가리킵니다. 세상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헷갈리면서 삽니다.
똑바로 정신 차리고 자기 인생을 완성해나가는 게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니체와 프로이트가 이미 충분할 정도로 비판했듯이 기독교 신앙을 노예의식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자유로우면서 성숙하고, 책임감이 강한 삶과 성경이 말하는 죄는 질적으로 다른 겁니다. 죄의 힘은 인생의 주인을 자기라고 설득합니다. 착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런 착각에 사로잡히면 자기를 우상으로 만듭니다. 자기 우상화가 오늘날 어떻게 나타나는지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끝없는 소비로 자기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로 자기 인생을 채워도 공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겉은 멀쩡해도 내면의 삶이 병들어가는 겁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즉 생명의 근원이라는 하늘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하늘의 소리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자기를 중심에 놓으려는 죄의 속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선의 삶은 하늘의 소리를 들었던 사람의 경험을 바짝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가 무슨 말을 했는지, 예수 운명에서 일어난 사건이 무엇인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근거가 무엇인지를 시험공부 하듯이 구도적인 자세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 배움의 수준만큼 하늘에서 울리는 생명의 소리가 여러분의 귀에 들릴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b)라는 말씀처럼 우리 영혼이 기쁨으로 충만해지겠지요. 이런 충만감 외에 우리 인생에서 더 귀한 것이 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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