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생명의 밥
오병이어 이후
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에 관한 요한복음 기자의 해석입니다. 요한 6장1-15절에 기록되어 있는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어른만 오천 명 이상이 되는 많은 사람들을 배부를 정도로 먹게 하고, 남은 것을 모았는데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예수님은 검은 상자에서 비둘기, 시계, 포도주를 꺼내는 마술사처럼 마술을 부린 겁니까? 아니면 성서기자들이 꾸며서 보도하는 걸까요? 오늘 우리는 이 오병이어 자체를 말씀의 주제로 삼는 게 아니니까 더 자세한 내막으로 들어가지는 맙시다. 다만 이 사건이 그들에게 분명한 경험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크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삼으려 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런 낌새를 눈치 채신 예수님은 산으로 피하셨고요.(요 6:15)
오늘 본문은 민중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숨고 찾는 숨바꼭질이 이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 번 허탕을 친 그들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서야 예수님을 찾아내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언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25절) ‘언제’라는 의문부사에 강조점이 있는 이런 질문은 그 상황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왜 우리를 피하시는가, 왜 이곳으로 오셨는가, 하는 질문이 적합하겠지요. 또는 솔직하게 우리와 같이 메시아 왕국을 세우자고 요구하는 게 옳겠지요. 그들은 지금 당장 예수님이 자신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주실 분으로 생각하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본심을 숨긴 채 넌지시 질문합니다. “언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변죽을 울리는 일이 없고, 언제나 정곡을 찌릅니다. ‘언제’ 여기에 왔느냐 하고 묻는 민중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무슨 뜻인가요? 당신들의 관심은 빵이 아니냐? 배부름이 아니냐? 예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 찾아온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생존하는데 필수적인 건 먹을거리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굶주림 앞에서 의연할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라온 민중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는지는 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속되게 표현해서 오병이어 사건 앞에서 그들은 눈이 확 뒤집어졌겠지요. 사람들의 굶주림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예수야말로 그들의 메시아, 그들의 왕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눈에 불을 키고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본문의 민중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경제 문제가 우리의 최대관심사입니다. 민중들이 현 정부를 불신하는 이유도 역시 옛날보다 살기 어렵다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WTO, FTA로 대표되는 세계화도 역시 경제적으로 잘사는 세계로 나가자는 욕망의 산물입니다. 인간이 먹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는 한 ‘오병이어’의 환상은 앞으로도 숙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먹어야 산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민중을 향한 질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민중의 그런 태도를 칭찬한 것도 아닙니다. 빵을 찾아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며,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혼동입니다. 종교적인 차원과 경제적인 차원의 혼동입니다. 오병이어의 영적인 차원을 외면하고 무조건 물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지적은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오병이어가 단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려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임한 징표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27a절)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는 두 가지 양식을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는 썩어 없어질 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썩어 없어질 양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걸 얻으려고 힘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제가 ‘썩어 없어질 양식’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오병이어의 대상인 빵과 생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건 물리적 차원에서도 옳습니다. 오늘 아침에 먹은 밥과 빵은 우리 몸속에서 분해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똥이 됩니다. “인간은 똥 만드는 공장”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모든 먹을거리는 우리의 몸을 통해서 썩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먹고 살아야 할 밥과 빵, 물, 반찬이 하찮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셨고, 먹고 마시며 배설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하셨다면 이건 귀한 것들입니다. 이런 물적인 토대에 관한 것들은 우리가 나름으로 지혜롭게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사회 시스템을 통해서 이런 것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정신적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연봉이 높은 사람들이 낮은 사람보다, 사회복지가 잘된 나라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는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살아갈지 모르지만 그 차이라는 건 별로 크지 않습니다. 어쩌면 최소한의 의식주 문제만 해결된다면 그렇게 배가 부르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다른 데 있을 겁니다. 이런 현상들은 이미 사회학자들이 여러 사례를 통해서 증명한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얼까요? 무엇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라는 겁니까? 이미 여러분들은 대답을 알고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양식이라는 대답 말입니다. 그 대답은 옳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왜’ 그런가, 하는 질문 앞에서는 별로 자신이 없을 겁니다. 신약성서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 대답이라는 게 수학이나 물리학, 사회학이 아니라 신학적인 방식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그것을 따라가기가 약간 까다롭습니다. 그래도 그리스도 신앙의 깊이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은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고등학생들이 어떤 방정식 문제를 대했을 때 선생님이 풀어준 정답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푸는 과정을 배우는 게 중요하듯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설명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봅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권능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에게 그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다.”(27b절) 이 말씀대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십니다. 잠시 먹고 배부른, 그러나 곧 똥으로 배설된 그런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인 양식을 주님이 주십니다. 이런 표현이 추상적으로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도대체 썩지 않는다거나 영원히 산다는 게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거겠지요.
바로 이 대목부터 설교하는 저도 답답해집니다. 우리의 경험은 썩는 것과 변하는 것과 유한한 것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을 설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영원하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실제로 와 닿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영원한 것처럼 보이는 태양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이 우주의 시작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으며, 이 우주가 사라진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는지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결정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다음에 시작된 시간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 너머의 사태인 영원을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본 반면에 구약성서 기자들은, 그리고 신약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타당한 개념이며 세계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실증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걸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궁극적인 실존입니다. 하나님의 리얼리티를 믿지만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현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태양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러나 태양빛이 오늘 우리 삶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은 알게 되겠지요. 이처럼 지금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런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권능을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줄 수 있는 권능을 의미합니다. 이해하시겠지요? 영원한 생명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빵입니다. 우리의 밥입니다. 그는 사람이 먹고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오병이어가 아니라 썩지 않고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밥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런 권능이 주어졌습니다. 그 권능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바로 그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늘생명의 밥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민중들이 이해했을까요? 그들이 이해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언제’ 오셨는가, 하고 약간 엉뚱한 질문을 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엉뚱하게 질문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우문현답의 과정이 오늘 본문에 이어 59절까지 계속됩니다. 어쩌면 복음서 전체가 바로 이런 과정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정된 세계관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전통을 이어받은 유대인답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언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29절)
그러자 그들은 다시 묻습니다. 여전히 유대인다운 기질이 드러나는 질문입니다. “무슨 기적을 보여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겠습니까?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30절) 그리고 이어서 광야의 만나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기적을 우리에게 다시 행하면 우리가 당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믿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양식에 대해서 한참 들었는데도 이 사람들은 다시 만나를 들먹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런 기적이야말로 인간을 살리는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발상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잘 들어 두어라.”하면서 자세하게 설명하십니다. 하늘의 빵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35절) 하늘의 빵은 곧 생명의 빵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은 52-59절에서 생명의 빵을 성만찬과 연결해서 해석합니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54,55절) 마지막으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8절)
혹시 지금 우리는 여전히 오병이어의 기적, 만나의 기적에 마음을 묶어두고 있는 유대인들은 아닌가요? 그런 기적을 행하는 영웅들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는 건 아닌가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영원한 하늘생명의 밥이라는 복음서 기자의 증언을 믿으십시오. 가능하다면 그런 영원한 생명을 현실에서 누릴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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