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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하늘이 열리고 … (요 1:43-51)

하늘이 열리고

1:43~51, 주현절 후 둘째 주일, 2021117

 

 

예수님은 대략 3년의 공생애를 사는 중에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좋은 관계를 맺은 사람도 있고 악연인 이들도 없지 않습니다. 공생애 초반에는 주로 제자가 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열두 제자 명단에는 없으나 그들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들도 있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나다나엘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요 1:43-51절은 나다나엘과 얽힌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나기에 앞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안드레가 먼저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자기 형인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안드레가 사는 동네에 빌립도 살았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중의 한 사람이 빌립에게 예수님을 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1:43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나다나엘

빌립은 지인인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재미있습니다. 빌립이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과 나다나엘은 평소에 종교적인 대화를 많이 나눈 관계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언급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반응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이라고 모를까 나사렛은 주목할만한 동네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의 발언이 지역적인 편견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구약과 유대교 전통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의 발언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합니다. 나다나엘의 반응에 빌립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판단할 수 있긴 하나 일단 와서 보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시니컬하게 여기던 나다나엘이 빌립과의 친분 때문이었는지 일단은 예수를 만나보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후 47절부터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크게 인정합니다. 나다나엘은 간사하지 않은 진실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간사하지 않다는 말은 위선적이지 않다는 뜻이겠지요. 예수님이 이미 빌립에게서 나다나엘이 어떤 사람인지를 전해 들었을 수도 있고, 첫인상에서 나다나엘의 됨됨이를 꿰뚫어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의 발언은 단순한 덕담이 아니라 한 인간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평가입니다. 이런 평가를 받을만한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경험합니다. 평소에 구도적인 태도로 살지 않으면 이런 경지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어떻게 알고 그렇게 말씀하시냐는 나다나엘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제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하기 전에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이미 알아보았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진실한 사람의 눈에는 진실한 사람이 이심전심으로 눈에 들어온다는 뜻일까요.

나다나엘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 예수의 몇 마디 말만 듣고 나다나엘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조금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이 대화가 선승들의 선문답처럼 압축적이고 상징적이라서 그렇습니다. 나다나엘의 이 말은 초기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받는 장면에서도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라는 소리가 울렸다고 합니다.(1:11) 복음서 여러 곳에서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베드로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16:16)라고 고백했고, 사도신경에도 그의 유일하신 아들을 믿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더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일이 바로 나다나엘 이야기를 통해서 요한복음 기자가 전하고 싶었던 중심 메시지입니다. 5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헬라어 아멘 아멘 레고 휘민의 번역 문장입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자주 사용하는 문장입니다. 이 문장이 요한복음에 자그마치 스무 번이나 나옵니다. 나다나엘에게 하는 말인데도 너희라는 복수형 인칭대명사가 사용된 걸 보면 51절의 내용이 나다나엘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에게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복음서에 나오는 하늘이라는 단어를 우주 공간으로서의 하늘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2천 년 전 사람들의 세계관을 배경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남편을 지아비나 바깥양반이라고도 말했으나 요즘은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처럼 언어는 그 시대의 표상으로 읽어야 합니다. 성경 시대 당시 사람들에게 하늘은 비밀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생명의 근원이 놓여 있었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비밀 가득한 생명 세계가 열린다는 뜻입니다. 만약 땅에 사는 사람이나 생명체가 하늘과 관련 없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면 굳이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도 생명의 비밀은 여전합니다. 그 비밀에 관심이 가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하늘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믿을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살아가면서 생명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절실하게 느끼실 겁니다.

생명 이전에 우선 물질을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의 모든 것은 물질로 구성됩니다. 지구도 물질이고, 연필도 물질입니다. 그 물질의 성격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학문이 물리학입니다. 물리학자들을 통해서 관성의 법칙이나 질량보존의 법칙, 또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 등등이 알려졌습니다. 그 물리학이 걸어온 과정은 길고 험난합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길입니다. 신을 찾는 수도승이나 물질을 변화시키려는 연금술사가 가는 길과 같습니다. 옛날에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원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자현미경이 발명되면서 원소보다 더 작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소를 구성하는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 등등입니다. 그것들은 또 쿼크라는 소립자로 이뤄집니다. 그런 소립자에서 나타나는 최소물리량을 양자라고 합니다.

양자가 입자인지 파동인지도 우리는 지금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양자는 상대적으로 커다란 물질과는 전혀 다른 현상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전의 기계적 역학에서는 어떤 입자가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까지 가려면 중간에 흔적이 남습니다. 그 길을 계산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의 공전을 계산해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양자의 세계에서는 그런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양자는 파동으로 존재하다가 관찰자가 관찰을 시작해야만 입자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귀신 현상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고 말해도 잘못이 아닙니다. 이런 양자가 기본인 이 세상은 알면 알수록 더 비밀이 늘어날 뿐입니다. 뉴턴,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슈레딩거, 하이젠베르크 같은 위대한 물리학자들 역시 정확한 답을 알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현대 물리학은 곤경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큰 물질은 기계적인 역학으로 계산되지만, 양자는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기계역학과 양자역학을 통합할 수 있는 통일장 원리를 찾아내려고 수많은 물리학자가 애를 썼으나 여전히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답을 찾으리라 생각하는 물리학자들도 있긴 하겠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통일장 원리에 따라서 작동하는 그 물질의 세계가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는 우리 인간의 인식능력을 넘어선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고양이에게 양자역학의 세계가 인식 불가능하듯이 말입니다. 그만큼 세상의 물질은 신비롭기 그지없다는 뜻입니다. 이에 관해서 좀 더 알기 원하는 분들은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짐 홀트 지음, 노태복 번역)를 참고하십시오.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읽고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고도 재미있게 쓴 책입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생물학에 관한 이야기를 한 가지만 하겠습니다. 요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것입니다. 너무 작아서 특수한 현미경으로만 확인이 가능한 바이러스에는 생물과 무생물의 특징이 모두 들어있다고 합니다. 숙주 안에 들어갔을 때만 생물이 된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파동과 입자의 성격이 다 들어있는 물리학의 양자와 성격이 비슷합니다. 우리를 괴롭히기에 얄밉기는 하지만 그 현상만 놓고 본다면 바이러스는 아주 특이하고 소중한 미생물입니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이런 현상을 보면 도대체 생명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더 절실해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짧은 순간을 우리의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본인의 전공 분야도 아닌 양자와 바이러스 이야기를 제가 설교 시간에 이렇게 길게 말한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창조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그 생명을 가능한 한 더 깊이 알고 싶어지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세상과 생명과 역사가 얼마나 신비로운지를, 즉 우리의 계산표대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성경의 전통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얻는 순간

하늘이 열리고 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예수 이후에서 여전히 사람은 죽고, 불행과 재난이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 인생살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구원받았다는 명백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보다는 오히려 돈이나 가족이나 친구가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더 절실합니다. 이런 마당에 예수를 생명의 실체라고 주장하는 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정말 궁금합니다. 당시 모든 기독교인과 더불어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에게서 무엇을 경험했기에 하늘이 열린다고 말한 것일까요? 그들처럼 우리도 하늘이 열리는 걸 보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세상 마지막 때 세상에 와서 생명 심판을 실행할 이를 가리키는 인자(人子)는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개념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구원이 발생했다고 보았습니다. 종말론적인 관점을 놓치면 예수의 가르침과 운명은 이상해집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도 예수 사건이 실질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이런 종말론적인 시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사람은 그런 시각 없이 삽니다. 종말보다는 지금 여기서 어떻게 멋지게 사는지, 남에게 칭찬받으면서 보람되게 사는지만을 생각합니다. 그런 삶이 이상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정상적인 일상입니다. 다만 이런 데에 치우쳐 있다 보니 종말은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생각하면 이 종말이 멀지 않다는 걸 모두 압니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는 제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절감합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엄청난 힘을 자랑했던 제국들도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압니다.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헬라, 로마 왕조가 당대에는 큰소리쳤으나 얼마 가지 않아 멸망했습니다. 아시아 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의 중국이나 미국이나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2~3천 년만 지나면 이런 나라는 무의미해집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름으로 남는다고 해도 지금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개인과 사회와 국가도 모두 종말을 맞습니다.

종말론적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는 말의 더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능력이 이미 현재의 삶에 개입해 있다는 관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종말에 세상을 완성하시겠으나 그 생명 심판을 통한 완성이 이미 여기서 일어났다고 말입니다. 그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가 뚫어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가 여기 가까이 왔다고,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라고, 즉 회개하라고 부단히 외쳤습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요즘 인문학 용어로 바꾸면 패러다임 시프트(사유 틀 전환)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미 발생한 하나님 나라를 찾는 삶으로의 방향 전환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 나라를 찾으라고, 구하라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어릴 적 소풍 놀이인 보물찾기와 비슷합니다. 그런 놀이를 하는 동안에는 오직 거기에만 집중합니다. 찾으면 기뻐합니다. 소풍에서의 보물찾기는 경쟁적이지만, 하늘나라의 보물찾기에서는 승패를 가르는 경쟁 없이 모두가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 기쁨이 곧 하늘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경험되는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런 경험이 실제로 있습니까?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자기 재산을 다 처분해서 그 밭을 샀다는 비유 말씀을(13:44) 여러분은 인생살이에서 얼마나 절실하게 느끼십니까? 그런 보물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쌓아놓은 여러 종류의 재산만 부둥켜안고 살겠지요.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하나님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저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실제로 믿습니다. 제가 반드시 건강해야 하고, 외롭지 말아야 하고, 가난해지지 않아야만 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 떨어져도 하나님이 저를 돌보신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게 저에게 보물이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2019년에 저는 통풍 발작으로 밤을 지새운 적이 많았습니다. 다시 발작할지는 모르겠으나 2020년에는 좋았습니다. 통풍 발작 시에 즐거운 경험도 있었습니다. 한밤중에 의자를 휠체어 삼아 혼자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화장실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뿌듯했습니다. 통증이 어느 정도 괜찮아졌을 때 두 발로 버젓이 걷는 기쁨도 아주 특별하게 맛볼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호스피스에 들어간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힘들기는 하겠으나 어느 순간에는 죽을병에서 해방되는 큰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을 흔들림 없이 맞이하려고 저는 지금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는 일에 몰두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결정적인 그 순간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2021년에도 저는 이런 믿음의 길을 여러분과 함께 걷고 싶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요한복음 1:43-51
https://youtu.be/8OwlOrPc9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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