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r::bec483ba-d204-47d4-afbd-8005746530c3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1:43-51, 주현절 후 둘째 주일, 2018114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나다나엘

1:43-51절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뒤에 갈릴리로 자리를 옮기려고 했습니다. 갈릴리는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길을 떠나려고 하는 순간에 빌립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제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앞 단락에서는 안드레와 베드로 형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빌립은 그의 친구로 추정되는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다.’(45).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아주 특별한 존재로 경험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에 대한 빌립의 말 중에서 한 가지를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나사렛은 무식한 촌놈들이 사는 시골입니다. 나사렛에서 괜찮은 인물이 나온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노골적으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 문장은 하나의 속담처럼 전해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와서 보라.’고 말합니다. 선입관을 버리고 직접 예수님을 만나보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빌립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나다나엘은 빌립의 권면에 따라서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47절부터 51절까지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나다나엘을 가리켜서 진실한 이스라엘 사람이며, 그 내면에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듣자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는 나를 어떻게 아시느냐?’고 예수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데리고 오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얼마 전에 무화과나무 옆을 지나치다가 그 밑에 앉아있던 나다나엘을 유심히 보았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나다나엘도 이미 예수님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설명이 본문에는 없습니다. 성서주석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말은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볼 수 있는 초능력이 예수님에게 있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이런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특별한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당신은 메시아입니다.’라고 반응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다나엘은 이미 빌립에게서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며, 예수님에게 와서도 여러 대화를 나누었을 겁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나다나엘의 이런 고백은 그 순간에 벌어진 것이라기보다는 훨씬 후대에 형성된 제자들의 신앙이 나다나엘의 이야기에 포함된 것으로 봐야합니다. 만약 처음 만나서 한두 마디를 나눈 즉시 메시아라고 고백했다면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마술사나 독심술사에 불과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많은 이야기가 생략되고 비약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린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다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는 말을 듣고 나를 메시아로 믿는 모양인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건을 앞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오.’(50). 사람의 중심을 뚫어보는 초자연적인 능력보다 더 중요한 사건을 믿음의 토대로 삼아야한다는 뜻입니다. 그 중요한 사건이 51절에 나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28:10절 이하에 위 본문이 묘사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 명분을 가로챈 야곱은 죽여버리겠다는 형의 위협을 피해서 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도망가는 도중에 벧엘 들판에서 노숙하다가 꿈을 꿉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사닥다리가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사닥다리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야곱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잠에서 깹니다. 28장에서는 천사들이 사닥다리 위로 움직인 반면에 요 1장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 위로 움직였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묘사는 마 3:16절에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천사들이 나타났다거나 하늘이 열렸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성경에 자주 묘사된 이런 것들을 오해하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갈등을 겪거나 신앙 성장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수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요한계시록 18장을 공부했습니다. 18:1절이 위에서 인용한 구절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이 구절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마술이 아니라 일상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영적인 깊이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현상 중에서 두 가지만 짚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자, 또는 천사로 일컬어지는 존재는 모든 이들이 똑같이 경험할 수 있는 객관적인 대상이 아닙니다. 천사는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만 볼 수 있는 대상입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대구샘터교회는 15년 전에 경산시 하양에서 2,3, 그리고 진량에서 2,3년 있다가 대구로 거처를 옮긴지 10년이 다 되어갑니다. 처음에는 대구로 나올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우연한 일들이 계기가 되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인도해준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2) 천사의 영광으로 땅이 환해졌다는 표현은 그림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어둔 길을 가는데 하늘에서 전조등 같은 빛이 그들의 앞길을 비춰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걸 마술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술적인 것이며, 시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여러분이 마음 깊은 곳에서 아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서 빛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손자가 다니는 초등학교를 방문했다고 합시다. 여러 학생들이 한 교실에 앉아 있습니다. 그중에 손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빛이 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연인들 사이에는 그게 더 강력합니다. 대구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동성로 어디에서 만나자고 해서 거기로 나가 기다립니다. 약속 시간이 지났습니다. 눈이 빠지게 기다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림자처럼 지나칠 뿐입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대상이 나타났습니다. 빛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서 세상이 환해지는 걸 실질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술가들과 시인들은 일상에서 이런 경험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것의 극치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빛입니다.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걸 볼 눈이 있어야 하고, 들을 귀가 있어야 하고,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있어야 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세상을 피상적으로 대하기 때문에 이런 결정적인 것을, 즉 천사와 빛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놓칩니다. 지금 함께 예배드리는 이 자리와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경험은 다 다릅니다. 제가 여러분 마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구체적으로 짚어낼 수는 없지만 대충은 압니다. 저도 그럴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다른 생각을 합니다. 직장 일이나 가정 일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배 빨리 마치고 약속 장소로 나갈 생각을 합니다. 교회 안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단점을 찾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다른 신자의 옷차림에 자꾸 신경이 쓰입니다. 교회 걱정도 많이 합니다. 오늘 예배에 빠진 아무개 집사를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 떨어져 있는 한 천사와 하늘이 열리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과 빛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공간에 앉아서 함께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읽고 설교 듣는 것 자체에서 신비로운 기쁨을 느낍니다. 이런 시간과 공간 안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를 황홀하게 느낍니다. 그런 느낌이 가득하게 되면 자기에 대한 생각은 한없이 줄어듭니다. 걱정과 근심과 욕심 등등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예배 사건에 푹 빠져듭니다. 베토벤이 귀가 먹었는데도 음악 소리가 자기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웠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경험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이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날이 갈수록 건조해질 것이며, 우리의 신앙 역시 메말라갈 것입니다.

 

빛 경험

오늘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하늘과 천사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천사들이 인자 위로 오르락내리락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생명을 심판하는 분이며 생명 자체라는 뜻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11:25,26)는 말씀도 이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을 실제로 믿고 경험하는지를 질문해보십시오. 그런 믿음에 근거해서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질문해보십시오. 저는 앞에서 일상의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나 사건이 빛으로 경험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거기에 대비해서 생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자신의 인생과 세상을 환하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빛의 반대는 어둠이며, 어둠의 반대는 빛입니다. 우리 인생을 어둡게 하는 것은 죄와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죽음이 우리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요와 욕망에 빠지는 것이며, 죽음은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아무리 높은 지위를 획득해도, 온갖 세련된 것들을 누린다고 해도 죄와 죽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21세기 현대인의 삶도 죄와 죽음으로 인해서 파괴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인생은 즐거운 것이라고, 어둠이 아니라 빛이 찬란하다고 말입니다. 그런 느낌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장난감이 많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K 주간지 <정윤수의 서문이라고 읽자’> 코너에 보들레르 산문시 장난꾸러기가 소개되었습니다. 1862년 프랑스 파리에 사는 도시인들의 모습을 비관적으로 묘사한 시입니다. 정윤수가 쓴 글의 제목이 채찍질당하는 나귀 신세가 된 도시인들입니다. 보들레르의 시를 압축한 제목으로 보입니다. 오늘 대한민국 대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채찍질당하는 나귀처럼 삽니다. 정신없이 바쁘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갈 여유를 찾기도 힘듭니다. 장사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대기업 직원들과 학교 교사들, 그리고 교회 목사마저 혹사당한다는 말이 하나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우리교회 K 집사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이 직장에 나가 있으면 노예처럼 느껴진다는 겁니다. 잔업 수당을 높이 책정함으로써 노동에 더 매달리게 하는 세상입니다. 사회 전체가 총체적으로 죄와 죽음의 두려움에 묶여 있기에 경쟁력이 남보다 앞서봤자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삶의 방향을 전적으로 새롭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삼일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최선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방향전환을 가리킵니다. 1)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완성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거칠게 말해서 출세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이런 말을 허튼 소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채찍질을 당하더라도 경쟁에서 무조건 이기려고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겉으로만 그럴듯하지 내용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세상 논리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면, 교회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작지만 신앙의 본질에 천착하면서 평화와 기쁨과 종말론적 희망을 나누는 교회와 더 이상 복음의 능력으로 작동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메가 처치 중에서 어떤 교회가 생명 충만할까요? 어떤 교회에 나가고 싶으신가요? 세상살이도 똑같습니다.


2)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생명으로 살려내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알려면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시작되고 유지되고 완성된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 삶에 대한 선입견이 너무 강합니다. 우리가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매달리는 삶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생명 완성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생물학적인 관점으로도 이것은 옳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자궁에서 살던 시절이 있습니다. 난자에 정자가 결합되어 배아로 살던 시절이 있습니다. 배아가 성장해서 사람 모양을 갖춘 뒤에 자궁 밖으로 나와서 지금처럼 살아가리라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잠시 지구에 살다가 우리의 몸은 다시 원소로 해체됩니다. 생명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완전히 탈바꿈한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곧 생명 완성은 피조물인 우리가 아니라 창조주인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독교 신앙에 집중하면 현실을 도피하게 될지 모른다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걸 하나님이 알아서 해결해주실 터이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우리는 오로지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는 자세로 살면 된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고유한 능력으로 우리 생명을 완성시키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 연민에 떨어지지 않고 인생을 치열하게, 그리고 불의와 우상숭배에 저항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의 체제 아래서 그렇게 투쟁적으로 살았습니다. 극한 상황에서는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삶의 능력은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 사람에게서 가능합니다.

설교듣기: https://youtu.be/BmFpVaxSxH0

설교보기는 예배실황 아프리카티브이를 참조하세요.  http://afreecatv.com/nfermata 이 영상은 한 달 뒤에 사라집니다.


요한복음 1:43-51
https://youtu.be/BmFpVaxSxH0

설교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