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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하늘 시민, 땅의 책임 - 루터에서 본회퍼, 그리고 오늘 우리 - (빌 3 : 17 – 4 : 1)

2025년 8월 17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2EzUu42PWcQ?si=79GJ6hFnOqZna4zo

▣ 들어가는 말

- 광복 80주년

1919년 4월 11일, 3.1운동 직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후 임시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을 통합하고, 임시헌장과 임시헌법을 제정하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선언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지요. 바로 이 순간부터 80년이 흘러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1948년 같은 날(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됩니다. 제헌헌법 전문에서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명시합니다. 이는 해방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단순히 미군정의 후계나 새로 만들어진 국가가 아니라, 1919년의 3.1운동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선언입니다.

생각해보면, 3.1운동이야말로 민주주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저는 감히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는 1789년 프랑스혁명보다 더 위대한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상상할 수 있습니까? 총칼 앞에 어떤 저항도 없이, 목숨을 걸고서 남녀노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온몸을 바쳐 자유를 외치는 일이 지구상 어디에서 일어난 적이 있었던가요. 저는 그 자유의 힘, 민중의 힘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이라 믿습니다.

 

- 민주공화국

우리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 짧은 문장 속에는, 조선 왕조 500년의 군주제와 일제 35년 식민 지배를 끝내고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세우겠다는 우리 조상들의 놀라운 꿈이 담겨 있습니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선포한 헌장 제1조에도 같은 선언이 있습니다. 이는 3.1운동의 충격과 감격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것은 권력을 왕이나 군주가 차지하던 시대와의 단절이자,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새로운 나라를 향한 인간 영혼의 절규, 마치 신을 향한 신앙의 고백과도 같은 것입니다.

민주(民主)란 백성이 주인이라는 뜻이며, 공화(共和)란 ‘모두의 합의와 법에 의해, 공공의 선을 위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민주공화국’은 “국민이 주인이며, 모두가 함께 법과 제도로 나라를 운영하는 나라”라는 뜻이 되지요. 그것이 바로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정신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나라는 존재할 수 없다. 나를 버리고 나라를 먼저 생각하라.” 그의 이 말은 민주공화국이란 단지 법과 제도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기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사랑으로 자라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시인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 속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고백은,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기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직과 양심임을 상기시킵니다. 권력이든 자유든, 부끄럼 없는 인간의 영혼, 양심 위에서만 빛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우리는 이와 닮은 그림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파라오의 노예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출 19:5-6).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며,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레 26:12) 선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지요. 한 사람의 권력자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권자가 되는, 모든 백성이 그 통치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지배를 벗어나 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은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오롯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선언 아닐까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깨뜨릴 수 없는 고귀한 존엄성을 가진 존재라는 말입니다. 신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무릎 꿇지 않는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국가든, 이데올로기이던, 문화나 심지어 종교, 가족이라 할지라도 절대고 인간의 존엄성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 하늘나라 시민

1938년, 평양에서 주기철 목사가 재판을 받습니다. “신사참배는 국가 의식이니 종교 문제가 아니다. 하겠다고만 하면 석방해주겠다.”라는 판사의 말에, 주 목사는 단호히 말합니다. “나는 하늘나라의 신민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국가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며, 달라진 대한민국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국제적 위상을 봅니다. 이런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습니다. 정말이지 충분히 자부심을 느껴도 좋습니다. 이 국가와 민족이 더 근사하고 멋있어지도록 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지요.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과 국가 사이의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주기철 목사나 카잔차키스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너는 하늘 시민으로서 땅의 나라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 두 왕국 이론

- 두 왕국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 성경의 권위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회복합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인이 현실 정치와 사회질서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고민하지요. 루터의 ‘두 왕국 이론’(Two Kingdoms Doctrine)은 바로 이러한 고민 속에서 탄생합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 신앙과 정치의 분리 또는 협력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신학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지요.

루터는 하나님이 두 가지 방식으로 인간 사회를 통치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말씀과 복음으로 다스리는 ‘영적 왕국’과 법과 권력으로 다스리는 ‘세속적 왕국’입니다. 교회가 주체가 되는 영적 왕국의 목적은 내면의 회심과 구원입니다. 국가가 주체인 세속적 왕국의 목적은 외적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세상을 두 가지 방식으로 다스리신다. 하나는 복음을 통해, 다른 하나는 율법과 권력을 통해서다.” 루터는 이 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되지만, 둘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두 영역 모두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 역사적 배경

왜 루터는 이러한 이론을 주장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종교개혁 시기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세속 권력을 장악하고 남용하는 것에 반발합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유럽 왕들을 임명하거나 파문하고, 세금을 걷고 전쟁을 주도합니다. 말씀과 복음으로 사람들을 구원해야 할 교회가 정치적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동시에 법과 권력을 가지고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해야 하는 세속 권력, 정부의 권위와 역할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이를 통해, 교회의 독립성과 영적 권위를 보호하고, 세속 정부의 정당한 권력을 인정하면서 두 왕국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한 것입니다.

 

- 의미와 확장

루터의 이론은 ‘정치와 종교를 완전히 분리하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에 따르면, 신자는 두 왕국 모두에 속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자, 세상의 시민입니다. 둘은 분리되되, 서로를 위하여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국가의 칼을 빌리지 않아야 하며, 복음은 사랑과 자유로 전해야 합니다. 강제로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복음에 어긋난다는 것이지요. 아울러 국가는 교회의 양심을 침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국가는 사회질서를 위해 필요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두 왕국’ 개념은 정교분리의 신학적 근거로 이해되지만, 루터는 단순 분리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을 주장한 것입니다. 교회는 국가의 부패를 예언자적으로 비판할 권리와 책임이 있으며, 국가는 교회의 신앙을 강제하거나 방해하지 않아야 하지요. 루터의 두 왕국론은 오늘날 공적 신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시민으로서 세속 왕국의 법과 제도 속에서 정의, 평화, 인권을 위해 일하며, 동시에 교회의 선교적 사명에도 헌신해야 하지요.

그러나 루터는 농민 전쟁 당시 “국가는 폭력을 써서라도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말하며, 세속 권력을 지나치게 정당화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루터파 교회가 나치 독일에 순응했던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 이론은 때때로 잘못 적용되어, 불의한 권력 앞에서 교회가 침묵하는 명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반면, 본회퍼는 국가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 ‘국가의 올바른 역할을 묻고 감시하는 것’ 국가가 정의를 실현하는지 감시하는 역할입니다. 둘째, ‘국가의 피해자들을 돕기’ 국가 권력에 짓밟힌 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이지요. 마지막으로 ‘국가의 바큇살에 쐐기를 박기’ 국가가 복음을 침해할 때 교회는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퀴 밑에 깔린 피해자를 감싸줄 뿐 아니라, 그 바퀴 자체를 멈춰야 한다.”

 

▣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 역사적/사회적 상황

본문의 핵심 단어는 ‘시민권’입니다. 헬라어로 ‘폴리테우마’라 하는데, 이는 단순히 ‘국적’이 아니라 어느 공동체에 속해 살며 그 법과 질서에 따라 행동하는 삶의 방식을 뜻합니다. ‘폴리스’(도시, polis)에서 나온 말로, 로마 시대에는 특정 도시·제국의 법과 특권을 누리는 정치적 신분을 포함합니다. 빌립보는 원래 마케도니아 지방의 도시였는데, 로마 제국의 식민도시(colonia)가 된 후 특별한 지위를 누리게 됩니다. 로마는 군인 출신들을 이주시키고 로마법을 적용하여, 빌립보 시민들이 로마 본토 시민권자와 같은 법적 특권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빌립보 사람들은 “우리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로마식 건물, 로마식 복장, 라틴어 사용까지 적극적으로 모방했습니다.

이런 도시의 교회에 바울이 편지를 씁니다. 당시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었고, 빌립보 교인들은 로마 제국의 충성 요구와 복음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의 시민권은 로마가 아니라 하늘에 있다.” 이는 정치적·신학적 혁명적 선언이었습니다. “너희의 참된 소속과 충성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땅에서 그 가치와 질서를 살아내라.” 이 말은 단순한 종교적 위안이 아니라, 충성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하라는 선언입니다. 하늘 시민권은 미래의 천국 입장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정체성과 책임을 규정하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바울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3:20) 선언할 때, 그것은 로마 시민권에 대한 ‘저항 선언’이자 정체성 재정립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황제 숭배를 강요했고, ‘카이사르가 주(Lord)’라는 고백을 정치적 충성의 표현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고 고백하도록 가르쳤습니다(2:11). 이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선언이었으며, 실제로 황제 숭배 거부는 사회적 고립과 법적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바울의 “하늘 시민권” 선언은 단순한 영적 비유가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급진적인 신앙고백이었던 것이지요.

 

- 하늘 시민

“함께 나를 본받으라”(3:17) 바울이 말하는 ‘본받음’은 단순히 인간을 따르라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모델을 따르라는 의미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외부의 잘못된 가르침과 생활 방식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살아 있는 본보기’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너희들의 고통과 고뇌와 갈등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먼저 앞장서겠다. 그러니 나의 뒤를 따르라는 헌신과 애타는 심정을 보여줍니다.

내부적으로는 교회 지도자 간 불화(4:2의 유오디아와 순두게), 거짓 교사들의 영향(3:2의 ‘개들’, ‘행악하는 자들’)이라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특히 3:18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는 율법주의자(유대주의 기독교인)일 수도 있고, 반대로 방종적인 신앙인(육체 욕망을 따르는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가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분열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디에 소속감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를 향해 눈물을 흘리며 경고합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3:19) 그들은 자기 욕망, 육체적 쾌락, 땅의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들의 결말은 결국 멸망일 것이라는 말이지요.

“우리의 시민권(πολίτευμα)은 하늘에 있다”(3:20)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의 삶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입니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3:21) 예수야말로 우리의 생각과 정신, 영혼을 온전히 변화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다. 아울러 우리의 몸마저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지금은 비로 이쪽과 저쪽, 안과 밖, 로마와 조국, 황제와 하나님 사이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며 흔들리고 있지만, 예수의 ‘영광의 몸’과 같이 될 믿음, 소망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 주 안에서 서라”(4:1) 하늘 시민으로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분명한 정체성과 삶을 통해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라는 말입니다.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분열 속에서도 주 안에서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 나가는 말

- 하늘의 가치로 땅을 변화시키는 삶

광복절은 단순한 정치적 독립의 날이 아닙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지키고, 민족의 자유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그리고 순교를 당하지요. 수많은 신앙인 독립운동가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들의 삶은 두 왕국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조국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의 연장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졌지만, 동시에 땅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책임 있는 시민이었습니다. 광복의 기쁨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단지 교회 울타리 안이 아니라, 민족과 역사 속에서도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임을 배웁니다.

오늘 우리는 식민지나 독재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신앙과 국가의 관계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하늘 시민권을 가진 우리는, 법을 존중하되, 불의한 법에 침묵하지 않아야 합니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언자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사회 정의, 환경 보호, 약자 보호를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하셨습니다. 빛은 어둠을 드러내고, 소금은 썩음을 막습니다. 이것이 하늘 시민권자의 사회적 소명입니다. 교회는 정치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증언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하늘의 시민은 땅을 사랑하되, 그 사랑이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로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 시민권을 가진 존재이기에, 세속 왕국 속에서도 하나님의 가치와 정의를 살아내야 합니다. 루터처럼, 본회퍼처럼, 그리고 광복의 신앙인들처럼 말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우리의 사명은 하늘의 가치로 땅을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권이자 책임입니다.

 

 

주님,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루터의 분별과 본회퍼의 용기, 광복의 신앙인들의 헌신을 본받아,

오늘 한국 사회 속에서 복음의 빛을 비추게 하소서.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하늘의 가치를 땅에서 살아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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