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창조절 넷째 주일, 2022년 9월25일
눅 16:19~31절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부자는 호화롭게 살았으나 죽어서 ‘하데스’(음부)에 떨어지고, 거의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던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고 합니다. 너무 큰 반전이라서 충격적이기도 하고, 그 내용의 전개가 어딘지 불편하게 읽히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부자의 운명과 거지 나사로의 운명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당연히 거지 나사로라고 대답할 분들이 있겠으나 솔직한 대답을 들어보면 예상외의 결과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부자의 운명을 선택할 겁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죽음 이후에 벌어질 일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19절에 따르면 이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고 합니다. 죽은 다음에는 어찌 되든지 모르겠고, 살아있을 동안에 이렇게 산다면 멋진 인생이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많지 않겠습니까. 교회 나오는 이들도 속으로는 세상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만에 하나 죽음 이후에 실제로 이 부자처럼 저주스러운 운명이 기다릴지 모른다는 걱정은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겠지요.
이 부자는 하데스에서 너무 목말라서 물 한 방울만이라도 혀를 적시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살아있을 때 겪었던 운명이 이제 거꾸로 이 부자에게 들이닥친 겁니다. 나사로는 부잣집 상에서 떨어진 빵을 먹고 지냈고, 심한 피부병으로 고통당했습니다. 개들이 그의 상처를 핥을 정도였습니다. 개와 비슷한 운명으로 살았습니다. 이제 두 사람의 운명은 죽음 후에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이런 대목에서 양쪽의 좋은 점만 취하고 싶은 분들이 있겠지요. 세상에서는 이 부자처럼 호화롭게 살고, 죽어서는 거지 나사로처럼 천국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지냈으면 좋다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어떤 객관적 사실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어떤 궁극적인 진리를 전하려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이 이야기를 죽음 이후의 삶에 그대로 적용하면 곤란합니다. 이 비유는 재물에 대한 탐욕이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16장 전체가 이를 주제로 합니다. 16:1~13절에 나오는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 마지막 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어지는 14~18절 “율법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 단락 첫 구절인 14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부자의 잘못?
이 비유에서 부자는 무엇을 잘못했기에 죽은 다음에 이런 끔찍한 고통을 당한다는 말인가요? 그가 재산을 불법으로 모았다는 말은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악덕 기업가라는 증거도 없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원성을 샀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의 책임을 간접적으로는 물을 수는 있습니다. 자기 집 대문 앞에서 거지로 사는 나사로를 왜 적극적으로 돌보지 않았냐고 말입니다. 나사로가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었다고 하는데, 그 빵은 부자가 손을 씻을 때 사용하던 것입니다. 그런 빵은 개나 먹습니다. 아니면 음식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겠지요. 부자가 나사로를 긍휼히 여겨서 도와주었다면 좋았겠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무조건 파렴치범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평범하게 사는 우리 역시 어려운 사람들을 늘 돌보면서 살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만약 부자의 인간성이 지옥에 떨어질 정도로 악했다면 자기 집 대문이 지저분해진다거나, 매일 거지를 보는 게 불편하다고 여겨서 하인들을 시켜서 나사로를 멀리 쫓아냈을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이 부자가 죽어서 이렇게 끔찍한 고통을 받을 이유가 무엇일까요? 긍휼을 베풀어달라는 부자의 요구를 듣고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25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얘!’라는 호칭이 재미있습니다. 그리스어 성경에는 ‘Τέκνον’이라고 나옵니다. 자기 자녀를 부르는 애정 어린 호칭입니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라고 한다면 ‘야, 이놈아!’라 할만한데 뜻밖의 호칭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고생했으니 저세상에서 즐겁게 살아야 하고, 부자는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살았으니 저세상에서 괴로움을 당해야 한다는 판단을 정당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저런 식으로 선고를 내리는 판사가 있다면 그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몰릴 겁니다. 조금 폭넓게 생각해서, 거지 나사로는 너무 고생했으니 죽어서라도 뭔가 보상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능합니다. 우리 모두 불쌍한 사람에게 연민이 느껴지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부자가 인생을 편히 살았다 해서 죽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는 건 생각의 폭을 아무리 넓혀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의 이 발언은 우리 삶의 정곡을 찌르기에 충분합니다.
저는 앞에서 이 비유가 부자들을 향한 경고인 16장 전체 주제와 관련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의 이 부자는 재물을 섬기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가 착한지 아닌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인격이 고상한지 그렇지 못한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이 부자의 인격에 관해서 직접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종종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도덕적으로 얼마나 우월한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사람 사이에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거짓말을 일주일에 열 번 하고, 다른 사람은 한 번 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볼 때는 극과 극의 차이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그 차이가 미미합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사건 앞에서는 영국 여왕이나 영국의 식민자였던 아프리카 어느 가난한 나라의 이름 없는 노인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거와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점은 재물을 섬기며 살았는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는지에 관한 것뿐입니다. 실제 삶은 불성실해도 괜찮고 교회만 잘 다니면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은 실제 삶에서도 분명히 구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일상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그 약속을 향해서 한 걸음씩이나마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정작 중요한 사실은 다음입니다. 죽음 이후에 부자에게 임한 극심한 고통은 죽음 이후가 아니라 지금 살아있을 때 이미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도(마 19:16~30, 막 10:17~31, 눅 18:18~30)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은 재산이 많아서 근심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금 여기서 괴로움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참된 만족에 이를 수 없는 물질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한순간 나름으로 즐거울지 모르나 거기에 매달릴수록 삶 전체는 천천히, 또는 급속하게 황폐화합니다. 이런 말이 현실에서는 실감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가난이 저주라는 생각이 강고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런 정도의 수준에서 삶을 이해해도 괜찮은 걸까요? 도대체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맞나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은 재물에 대한 환상에 빠져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이 시대가 그렇게 작동하기에 무엇이 문제인지도 눈치채기 힘듭니다. 서울 강남 지역의 아파트는 수십억 원씩이나 합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으나 그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남이 부러워할 만한 고급 아파트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그 순간 온 세상을 다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겠지요. 그런 기분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돈으로 마련할 수 있는 그 외의 모든 행복한 조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으로 결코 만족하지 못해서 두리번거리면서 대체물을 계속 찾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풍족한 삶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닙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 중에서도 부자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전도하자 귀부인들이 바울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들은 상류층 인사들입니다. 문제는 그런 부와 재물과 자본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삶의 행태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이미 하데스, 즉 죽음의 나라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목마름이 갈수록 더 심해집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는 부자의 절규가 그들의 삶에서 이미 나타납니다. 그런 삶이 지옥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게 오늘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아실 겁니다.
물질 숭배적 삶의 특징
물질을 숭배하듯이 매달리는 삶과 어느 정도 여유를 누리는 삶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모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시겠지요. 저는 본문을 통해서 이를 판단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지는 않으나 전체 문맥에서 유추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이 부자의 눈에 나사로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핵심입니다. 재물에 절대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의 눈에는 다른 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재물에 관계된 일과 자신에게 직접 관계된 일만 크게 확대될 뿐입니다.
「창작과 비평」 이번 가을호의 책 소개 코너에 ‘잡초와 인간의 상호작용의 역사’를 다룬 『미움받는 식물들』(존 카디너)이라는 책이 소개되었습니다. 현대 농법은 기계식 경운과 농약을 통한 잡초 제거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잡초는 내성이 생깁니다. 그 잡초를 잡으려고 새로운 농약을 개발합니다. 해충에 강한 유전자 변형 종자 개발도 한몫합니다. 종자와 농약 개발은 미국 중심의 대형 회사가 독점합니다. 작은 나라는 가격 경쟁력이 없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식민 구조가 자리를 잡은 겁니다. 내성이 생긴 잡초를 제거할 농약을 개발한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해치는 바이러스를 방어하려고 백신을 아무리 개발해도 다시 새로운 바이러스가 나오는 형국과 같습니다. 잡초를 무조건 제거하는 이유는 대량 생산을 통해서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이윤 극대화가 자본주의의 속성입니다. 민중들은 이런 도도한 물결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공장식 가축 사육 문제와 곡물 대량 생산의 악순환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삼겹살과 비프스테이크를 현재 가격보다 두세 배 비싼 가격으로 기꺼이 사 먹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대량 생산을 통한 가격 경쟁력 제고를 원리로 삼은 이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일정한 대상을 제거하거나 무시합니다. 그 대상이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고, 가축일 수도 있고, 잡초(인간이 잡초라고 규정한 식물)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여러 차원에서의 소수자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의 눈에 거지 나사로가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의 삶이 너무 팍팍해서 다른 이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면 그런대로 이해가 가지만, 여유가 충분한데도 그런 생각과 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매주 수요일 오전에 저는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외르크 칭크의 기도문을 동영상으로 올립니다. 21일 자 영상에는 “나와 이웃을 기도하는 자리에 함께 세운다”라는 제목의 글이 나옵니다. 칭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는 살아가기에 필요한 모든 것에서 부요합니다. 나는 곤궁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생각합니다. 내게는 입을 옷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나는 주위에 떠는 이들과 보호받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생각합니다. 내게는 발에 신을 신발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맨발로 거리와 먼지 구덩이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나는 생각합니다. 저는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쟁 무기로 짓밟히고 깨어진 사람들을 나는 생각합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이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힘닿는 데까지 찾아 나설 겁니다.
하나님의 위로
오늘 이야기 후반부에 약간 이상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부자는 나사로를 아직 살아있는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서 모든 실상을 깨닫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브라함은 거절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말해도 곧이듣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물질 숭배에 마음이 고정된 사람은 웬만해서는 그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다 느끼다시피 사람의 마음은 마음먹는다고 해서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간혹 장례식을 가거나 주위에서 시한부 진단을 받은 사람들을 만나면 인생이 얼마나 짧고 허망한지 절감합니다. 돈으로 우리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물질 숭배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그런 삶의 행태를 반복합니다. 그런 삶의 귀결은 “내가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는 이 부자의 운명입니다. 우리가 다 알지만 외면할 뿐입니다.
저는 오늘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이 자본주의 속성인 물질 숭배에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그런 물질 숭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분들입니다. 이 문제는 아주 엄중해서 조금 노력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영혼을 거는 결단인 회심이 필요합니다. 거지 나사로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위로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실제로 거지 나사로처럼 살아야 한다거나, 그렇게 살아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삶의 태도와 방향성만은 거지 나사로와 같아야 합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우리 자녀들에게 ‘너도 거지 나사로의 영혼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나요?
나사로는 하나님 외에는 위로받을 대상이 없었던 인물을 대표합니다. 친구들에게서 이해받지 못했고, 아내에게서도 공감을 얻지 못했던 구약의 욥처럼 거지 나사로는 그 누구에게서도 위로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럴 때만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납니다. 그 하나님의 위로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이고 안식이고 평화이며 희망입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거꾸로 위로받을 대상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좋은 친구가 많은 걸 너무 자랑하지 마세요. 다양한 취미활동에도 너무 치우치지 마세요. 적당하게 즐기십시오. 사람들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는 게 좋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너무 사랑스럽고 가까우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교인들은 목사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말고, 목사도 교우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즉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한 위로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은, 즉 오늘 본문에서 나사로가 받았던 참된 위로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자로서 사람의 위로나 재물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만’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위로‘만’ 갈망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권면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위로야말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토로할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하나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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