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자유 (눅 4:16-21)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에 비해서 찬양이나 또는 구약을 인용한 구원 시(詩)가 많습니다. 그것은 주로 앞부분에 집중해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46-56절에는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 부른 찬양이 나옵니다. 그 찬양의 핵심은 51-53절입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1장67-79절에는 세례 요한이 출생한 다음에 그의 아버지 스가랴가 부르는 찬양이 나옵니다. 내용은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입니다. 2장29-32절에는 예수의 부모들이 신생아인 예수에게 정결예식을 치르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갔을 때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므온이 이 어린 예수를 보고 부른 찬양이 나옵니다. 이 주제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입니다. 세례 요한이 공식적으로 예언을 선포하기 시작했을 때 누가복음 기자는 요한의 사명을 3장4-6절에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해서 설명했습니다. 이 말씀의 주제도 역시 모든 사람들의 구원입니다. 이렇게 누가복음은 1-3장 사이에서 마리아, 스가랴, 시므온의 찬양을 진술했고, 세례 요한의 활동에 대해서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서 전달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찬양과 시가 똑같이 해방, 자유, 구원을 주제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의 예언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제 앞서 인용한 모든 것들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의 찬양과 시는 오늘의 본문을 위한 사전 준비라는 말씀이죠. 모든 복음서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에 들르셨습니다. 당분간 그곳에 묵다가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회당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두루마리 성서를 받아들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예언서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61:1,2절에 해당되는 부분을 읽으셨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앞서 읽은 그것인데, 그중에서 중요한 것만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몇 대목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가난은 2천5백 년 전이나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을 가장 황폐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그것은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흡사 괴물처럼 등장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반대로 부자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만약 모두가 가난하다면 가난은 별로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좀 역설적이지만 총체적으로 가난한 인도나 파키스탄 같은 나라의 사람들이 느끼는 가난과 한국이나 미국 사람들이 느끼는 가난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런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는 제가 더 긴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들은 돈이 필요합니다. 가난을 벗을 수 있는 직장이 필요합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먹을 게 없고, 적절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것이 시급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건 좀 우습지 않은가요? 당장 배고픈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만 하면 된다는 건가요?
가난과 복음의 관계는 좀 까다롭습니다. 저도 이 시간에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없지만 여러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조금 도움을 드릴 수는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가난은 가난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라 훨씬 많은 문제와 결탁해 있습니다. 병을 키우게 되는 것도 역시 가난입니다. 학력이 떨어지는 것도 역시 가난이 원인일 경우가 많습니다. 장애인이 될 확률도 사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높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냉소적인 표현이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 본문에서 기록된 가난한 사람의 그 상황은 그 뒤로 언급될 모든 불행의 근원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진 복음이, 즉 그들에게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그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2.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묶인 사람들을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그 말은 옳습니다. 이유가 어디 있든지 묶인 사람들에게 복음은, 즉 기쁜 소식은 풀려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묶인다는 건 단순히 가시적인 감옥만을 뜻한다기보다는 인간을 결박해버리는 모든 악한 질서를 가리킨다고 보아야겠지요. 인간을 묶는 힘들이 무엇일까요? 앞서 가난의 문제가 그 뒤로 나오는 모든 불행의 뿌리인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렸지만, 가난도 역시 인간을 묶는 세력입니다. 현대인들이 물질적인 억압에 얼마나 심각하게 묶여있는지 제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3.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실제적인 시각장애인들의 고통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들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 곧 복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눈먼 사람은 실제적으로 육체적인 시각을 잃은 사람만이 아니라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까지 포함합니다. 이런 점에서 삶의 의미를 뚫어본다는 것은 복음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의 눈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를 조금씩 볼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곧 복음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시각장애인이 시력을 회복한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4.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억눌린 사람은 아마 그 당시에 노예를 가리킨다고 보아야겠지요. 자기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할 그런 사람의 삶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억눌렸다는 건 단순히 사회구조에서 벌어진 노예의 상태만을 뜻한다기보다는 자유를 상실한 모든 인간의 조건을 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억눌린 사람은 앞에 나온 묶인 사람과 비슷합니다. 이 둘의 상태를 구분해서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묶였다는 건 수평적인 억압이며, 억눌렸다는 건 수직적인 억압입니다. 전자는 외면적인 억압구조에 불과하다면 후자는 내면적인, 혹은 내재화한 억압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전자에 비해서 후자는 훨씬 심각한 상태이겠지요. 어쨌든지 우리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인 이 억누름의 상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복음입니다.
은총의 해
위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읽으신 이사야의 예언에서 4가지 주제를 정리했습니다. 그것은 곧 가난과 복음, 묶임과 해방, 눈 멈과 봄, 억눌림과 자유입니다. 이것을 다시 요약하면 해방과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바로 해방과 자유가 핵심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 게 있을까요? 오늘 우리에게 이 해방과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정치, 경제, 문화적인 해방과 자유만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인 해방과 자유까지 포함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선택한 기독교 신앙의 구원도 역시 해방과 자유를 가리킵니다.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도 역시 인간의 해방과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읽으신 이사야의 예언서를 누가는 19절에 이렇게 요약합니다.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주제, 그리고 그것의 요약인 해방과 자유는 곧 주님의 ‘은총의 해’에 일어날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은총의 해는 곧 희년(year of jubilee)을 가리킵니다. 희년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해, 즉 50번째 되는 해입니다. 희년에는 그동안 인간사회에서 벌어졌던 온갖 왜곡된 구조와 질서가 제자리를 잡습니다. 노예도 해방되고, 팔린 땅도 제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경제 구조가 양극화라는 특징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아주 복잡한 역학관계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경제에 대해서 문외한이 제가 여기에 대해 코멘트를 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서 어떤 방향만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하게 되는 이 사회현상은 사회학적으로 질병일 뿐만 아니라 성서적으로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자기가 자리하고 있는 그곳에서 이런 구조적인 병든 질서를 바로잡는데 일익을 감당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해방과 자유를 실질적으로 선포하지 않는다면 칼 마르크스가 비판했듯이 기독교는 민중의 의식을 잠들게 하는 아편으로 기능할지 모릅니다.
최소한 상식이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교회가 이런 희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동의할 겁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서로 부분합니다. 해방과 자유를 정치, 경제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해방신학과 흑인신학과 민중신학이 그런 입장을 대변합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는 무장투쟁까지 감행하는 쪽도 있습니다. 또 다른 입장은 해방과 자유의 주체인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며, 그런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쪽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투쟁과 소극적인 기다림의 태도는 기독교 신앙의 두 얼굴입니다. 이 땅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열정이 필요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무능력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결정적인 대답을 모릅니다. 그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성서가 그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사회과학이든지 아니면 개인의 종교적 경험에 머물지 않고 성서의 고유한 영적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희년의 현실화!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신 다음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해방과 자유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 과연 옳습니까? 이 세상에는 여전히 옥에 갇힌 사람, 눈 먼 사람, 억눌린 사람들이 많은데, 해방과 자유가 이루어졌다고 말해도 괜찮은 겁니까?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은 가시화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된 것으로, 혹은 이미 성취된 것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아직(not yet)과 이미(already)의 긴장에서 이 세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처음 만난 젊은 남자와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첫 눈에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직 그들은 모르는 게 많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것이라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팝송 중에서 이런 가사가 있던가요? “You mean everything to me.” 남자가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한 겁니다. 아직 실제적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두 사람은 그것을 미리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도 이와 비슷합니다. 희년의 내용인 해방과 자유가 이 역사에서 아직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실증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은, 또는 이 역사를 기계적인 발전으로만 보는 사람들은 이런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을 순수 이성의 눈으로만 보는 사람들에게 남녀의 뜨거운 사랑이 이해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해방과 자유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기독교 신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믿습니다.
누가복음 기자가 증언하고 있는 ‘이 자리’는 무엇을 말하나요? 그 자리는 예수님이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을 선포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이사야의 예언이 현실화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이야말로 곧 해방과 자유가 현실화하는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을 너무 종교적 관념으로만 이해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해방과 자유를 매우 심층적으로 이해한 데서 나온 매우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그의 고난, 그의 행위, 그의 가르침, 그의 십자가와 부활, 그의 운명이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하게 하는 근원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운명 전체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기자와 함께 그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걸 경험한 사람들은 해방과 자유가 이웃에게도, 이 사회 안에도 구체화할 수 있도록 투쟁하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기다리면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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