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26. (마 23:1-12)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느끼는 예수님에 대한 인상은 온화하고 따뜻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자기의 안전을 안중에 두지 않는 목자처럼 늘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책망하기보다는 위로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설명하고 있는 예수님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구약의 예언자처럼 사람들의 위선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책망을 받는 사람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요즘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거룩한 책들을 바르게 해석하고, 필사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려면 학문적인 업적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 합니다. 마치 요즘 신학대학교 교수들이 박사 학위를 받고 신학 논문을 많이 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전문적인 업적이 있는 사람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인정을 받기 마련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요즘으로 말하면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에서 가장 모범적인 목사나 장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단어의 뜻은 ‘구별된 사람’입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을 ‘구별된 무리’라는 뜻의 하기오스, 즉 성도라고 불렀는데, 의미가 비슷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실제의 삶에서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중요했지만 바리새인들의 율법 준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성문 율법만이 아니라 구전율법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율법학자들은 학문적으로 권위가 있었다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실천에서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의 책망
예수님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들을 불러서 넌지시 충고한 게 아니라 공개적으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한 그들의 잘못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 그들은 말만 하고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3b) 남을 가르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앎이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삶의 태도입니다. 저에게도 이런 태도는 흔하게 일어납니다. 말은 학자 연, 도사 연 하는데 실천은 잘 따르지 않습니다.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선생 티를 내는 사람들은 똑같습니다.
2) 그들은 무거운 짐을 남의 어깨에 메워주기만 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합니다.(4절)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임무를 맡긴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원래 그렇습니다. 무언가 다른 사람보다 성취한 게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것을 요구합니다. 남에게 내세울 게 많은 부모들은 일반적으로 자식들에게도 그런 종류의 부담을 줍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목사들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신자들에게 신앙적 짐을 떠맡깁니다. 기도하라, 헌금하라, 전도하라, 순종하라고 말입니다. 그런 강요로 인해서 그들은 그야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5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적힌 천을 옷에 달고 다니고, 집에서 곳곳에 달았습니다. 요즘 식으로 바꾸면 목사 가운이나 박사 가운을 입고 길거리를 다니는 형국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기도와 성서일과와 금식과 십일조 헌금에 투철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모든 신앙적인 노력이 자랑의 구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4) 마지막으로 이들은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6절)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합니다. 이건 아주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칠 때는 지금 예배에서 목사가 앞에 나서듯이 회중들을 압도할 수 있는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야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높은 자리가 바로 자기의 권위를 지켜주는 것처럼 확신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마태복음의 이런 보도에 따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철면피하고 몰염치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상대적으로 모범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따진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평균적으로 본다면 그들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로 유대교가 지탱되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유대교의 경전과 경건생활이 그들의 손에 의해서 전승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와 유대 공동체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기자는 왜 이렇게 이들을 매도하고 있을까요?
마태복음의 이 진술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속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 당시가 아니라 훨씬 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찾는다고 했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 유대 사회에서 이럴 정도로 주도적인 자리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사회력 영향력은 기원후 70년에 유대전쟁에서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함락당하고 유대 공동체가 파괴된 이후 불기 시작한 바리새파 운동에서 강화되었습니다.
그런 문제가 초기 기독교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마태복음 기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이렇게 정색하고 비난하는 걸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2천 년 전 팔레스틴을 중심으로 한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유대-기독교가 바리새파 운동이 벌어지기 전에는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유대교와 큰 마찰 없이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그 유대-기독교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와 제자인 베드로 같은 이들이 중심으로 활동한 공동체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었지만 유대교로부터 떨어져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유대교 측에서도 이 유대-기독교를 굳이 내쫓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유대교 안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등이 있듯이 유대-기독교는 나사렛파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함락 이후 벌어진 바리새파 운동으로 인해서 유대교와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던 유대-기독교는 큰 시련을 맞게 되었습니다. 유대교가 이들에게 선택을 강요했습니다. 완전히 유대교 안으로 들어오든지 아니면 아예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로 뛰쳐나가라고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미 갈라디아, 마케도니아, 로마 등지에 유대교와 완전히 다른 이방인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이 유대-기독교를 어떻게 하든 정리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기독교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강도로 바리새파의 율법을 지키라고 닦달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파 운동이 유대-기독교의 눈에 좋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을 위선자로 몰아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승과 형제
오해는 마십시오. 지금 마태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꾸며서 ‘픽션’을 쓰고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가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심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앞에서 본문 1-7절은 간접적으로 연결된다면 8-12절은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1-7절은 마태복음을 비롯한 초기 유대-기독교가 처한 상황과 연결된다면 8-12절은 예수님의 공적 삶과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두 가지 이야기를 하나로 묶은 이유는 그것이 결국 비슷한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앞의 본문 마지막 구절인 7절은 사람들이 스승이라고 불러주기를 바라는 바리새인들의 속셈을 거론했으며, 뒤 본문은 7절에서 스승 소리를 듣지 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스승’이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은 것입니다.
제가 조금 복잡하게 설명했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성서 텍스트에 초기 기독교의 고유하고 구체적인 신앙이 녹아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스승인 체 하는 바리새인들의 신앙 행태가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과 완전히 위배된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여기서 인간의 삶에서 가장 큰 권위를 행사하는 세 집단을 지적했습니다. 첫째는 스승, 둘째는 아버지, 셋째는 지도자입니다. 우리는 주로 이런 권위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런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도 거기에 종속되어 있기는 매 한 가지입니다. 그 밑에 있는 사람이나 그 위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 그걸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거기에 종속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했습니다.
첫째, 스승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한 분은 물론 하나님입니다. 사람에게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형제 관계라고 했습니다. 둘째, 세상의 어느 누구를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하나님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스승인 체 하지 말라는 말은 이해가 되지만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말라는 것은 심한 것처럼 들립니다. 셋째,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이렇게 스승, 아버지, 지도자를 모두 거부하거나 무시한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될까요? 학교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어이, 김 형!” 하고 부른다면 학교 질서가 완전히 허물어지고, 배우며 가르치는 학습자체도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집에서 자녀들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가정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어이, 이 씨” 하고 부른다면 한 국가의 체제도 허물어지고 말겠지요. 예수님은 왜 이렇게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자처럼 발언하신 걸까요?
예수님이 가정과 사회의 모든 기존 질서를 부정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인 사회 구조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바실레이아 투 데우’, 즉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런 차원에서 행동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스승, 아버지, 지도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도 역시 이런 차원에서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것 없이 무조건 스승, 아버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제도 자체를 예수님이 부정하는 것처럼 말하면 예수님의 생각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우리의 모든 삶, 그 삶을 구성하는 세상 질서, 윤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질서와 관계는 아주 구체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못한 건데 어떻게 세상의 질서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할 수 있느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게 바로 기독교인들이 삶에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독교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지른 불의는 바로 이런 오해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조금 생생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2003년 4월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대량살상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이유로 이라크를 무력으로 침략했습니다. 프랑스, 독일은 반대했고, 유엔 사무총장도 유감을 표시했습니다. 이라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 정부는 이라크를 샅샅이 뒤졌지만 대량살상무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가장 큰 이유가 거짓이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부시는 전쟁을 시작하면서 백악관에서 보수적인 복음주의 목사님들을 모시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미군만 해도 수천 명이 죽었고, 가난한 이라크 국민들은 수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적인 양심과 영적 감수성을 예민하게 유지하기만 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크게 어긋나는 일은 저지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간접적으로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스승인 체 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형제로 생각합니다. 아버지인 체 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형제로 여깁니다. 지도자인 체 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형제로 여깁니다. 물론 실제의 삶에서는 스승의 역할도 해야 하고, 아버지의 역할과 지도자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영적인 차원에서는 그런 자리에 올라서지 않습니다. 참된 스승, 참된 아버지, 참된 지도자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그가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되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보십시오. 내가 더 배우고, 육체적으로 힘도 강하고, 돈도 많이 버니까, 기도도 많이 하니까 당연히 그에 걸맞은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생각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시나요? 그렇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학생,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직원들을 모두 형제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이게 말은 쉬운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늘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운용되는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엄두를 낼 수가 없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아랫사람들에게 진정한 형제관계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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