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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힐링'의 원천 (막 7:24-37)

힐링의 원천

7:24-37, 창조절 둘째 주일, 201899

 

24.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31.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힐링(healing)이라는 단어가 요즘처럼 자주 여러 곳에 쓰이는 때가 없습니다. 역설적인 현상입니다. 옛날에 비해서 사는 형편이 크게 좋아졌는데도 현대인들이 힐링을 더 필요로 한다는 뜻이니까요. 이런 현상은 두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옛날에 비해서 지금 현대인들의 삶이 더 폭력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상대적인 박탁감도 심하고 생존경쟁의 압박감도 더 심해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관점은 옛날에는 생존에만 급급했으니 이제는 삶의 질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한국사회에 하나의 추세로 나타나는 힐링의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템플스테이는 가장 고상한 방법입니다. 역사가 오래된 절에 들어가서 일주일동안 세상의 모든 일을 접어두고 절 생활하는 겁니다. 수도원에도 그런 프로그램이 열립니다. 그런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이 가벼워졌다는 느낌을 받을 겁니다. 그게 힐링의 효과입니다. 교회의 씨씨엠 찬양집회도 힐링으로 간주됩니다. 나름으로 효과가 있습니다. 독서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유명 가수의 콘서트 장에서도 힐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행이나 스포츠도 이에 해당됩니다. 각종 엔터테인먼트도 기본적으로는 힐링의 요소가 강합니다. 어떤 이들은 맛집 순례를 통해서 힐링을 느끼기도 합니다. 특이한 방법의 하나는 멍 때리기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함으로써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방법은 지나친 쇼핑을 통한 힐링입니다. 옛날에는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겼지만 요즘은 홈쇼핑 역시 쇼핑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힐링이 현대인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기회가 생기면 그런 프로그램이나 행사에 참가해보십시오. 그러나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각종 힐링 콘서트에 꾸준히 참가했다고 해서 우리 영혼의 분열이 치료되는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힐링을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로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영혼이 분열되어 있으면 아무리 스트레스를 해소해도 삶이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학교 가는 게 정말 죽을 맛인 학생이 있다고 합시다. 그에게 힐링은 학교에 가지 않는 겁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이 학생의 내면적인 삶이 풍요로워지는 게 아닙니다. 또 다른 문제가 이 학생의 영혼을 힘들게 할 겁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힐링의 방법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영혼의 분열에서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영혼의 내적인 일치를 얻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힐링은 바로 이것, 즉 영혼의 내적 일치입니다. 이런 말이 어떤 이들에게는 공허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오늘 설교 본문인 막 7:24-37절에 나오는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설명할 테니 들어보십시오.

수로보니게 여자 이야기

예수님이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갈릴리 호수 북서쪽 오지입니다.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입니다. 강행군을 한 터라 아무도 모르게 어느 집에 들어가서 쉬는 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엎드렸습니다. 이 여자는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인으로서 수로보니게 족에 속합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에게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경우에도 이런 요청을 종종 받았습니다. 요청을 받았다고 해서 그걸 다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당신 딸이 있는 곳으로 함께 가자든지, 지금 바쁘니 나중에 가자든지, 이미 고침을 받은 줄 알라고 말씀하셨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해야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은 옳지 않소.’(27).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표현한 겁니다. 그래도 제삼자가 듣기에 민망한 말씀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자는 그 말을 듣고 발끈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반응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물론 옳습니다. 그러나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이런 말을 했으니 돌아가시오. 귀신이 당신 딸에게서 나갔소.’ 이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가 침상에 누워있기는 한데 귀신이 나가서 정신이 말짱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곤란한 일이 당시에 일어난 겁니다. 여러분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으십니까, 아닙니까.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병든 사람의 병을 고치기도 하고, 물위를 걷거나 물을 포도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지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직접 만나보지 못했지만 얼마든지 말씀 한마디로 딸의 귀신을 쫓아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양쪽 생각에 다 일리가 있습니다. 당시에 이 사건은 영상으로 촬영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구전된 이야기라서 실제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아무도 확증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전승한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현대인들이 알아듣도록 설명할 책임이 있습니다. 특히 설교자에게 그런 책임은 더 큽니다.

저는 딸의 귀신이 나간 것은 분명하지만, 즉 정신이 힐링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일이 수로보니게 여자가 집으로 돌아온 즉시 일어났다고 단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자가 집에 돌아와서 딸을 보았을 때는 여전히 침상에 누워있었습니다. 즉시 치료되었다면 침대에 그냥 누워있을 필요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일정한 세월이 흘러서 제 정신이 돌아온 것이라고 봐도 성경읽기에서 잘못은 아닙니다. 현대 정신과학이 발전하면서 정신이 온전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경계가 크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퇴행적인 세계관에 떨어진 사람은 귀신 들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이들은 상태가 조금만 좋아지면 일상생활을 할 수 있기도 하고, 조금만 나빠지면 그게 안 되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딸도 비슷한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수로보니게 여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녀는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이후로 딸을 향한 이 여자의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그녀는 딸을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딸은 시나브로 변하기 시작했고, 일정한 시점에 완전히 치료된 것입니다. 저의 눈에는 이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읽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읽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어쨌든지 여기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빛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에게도 비춘다는 사실입니다.

 

청각 장애인 치유

두 번째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에 이어서 막 7:31-37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과 데가볼리 지역을 통과해서 다시 갈릴리 호수 인근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거론된 지명은 모두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더 많이 사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님에게 와서 안수해주기를 바랬습니다. 수로보니게의 딸은 그냥 귀신 들린 것으로만 나오지만 여기는 구체적으로 청각장애로 특정됩니다. 이런 장애도 당시 사람들은 귀신 들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생명을 위축시키고 파괴하는 힘이 귀신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도 온갖 귀신에 사로잡혀서 사는 겁니다. 권력과 돈의 힘으로 다른 이들이나 자신의 삶을 파괴한다면, 그게 바로 귀신들린 거니까요.

예수님은 이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갔습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댔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의 침에 특별한 치료 효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면서 이 사람에게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바다는 열리라는 아람어입니다. 앞에 나온 귀신들린 딸의 치료와 크게 차이가 나는 힐링 퍼포먼스입니다. 성경기자는 그의 귀가 열리고 혀 맺힌 것이 풀려 말을 분명하게 했다고 당시 현상을 설명합니다. 이 사건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도 서로 다를 겁니다. , 정말 대단하다고,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장애를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문자대로 믿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오래 전에 본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기억났습니다. 정신병동이 배경인 영화입니다. 정신질환자로 들어온 주인공은 환자들을 괴롭히는 정신병동의 억압적인 질서에 대항합니다. 그는 강제 뇌수술을 받아서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바보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덩치 큰 인디언 출신 환자가 나옵니다. 그는 청각장애인으로 알려졌습니다. 그가 다른 말하는 걸 들은 사람이 없습니다. 침묵으로 병동의 청소만 합니다. 나중에 주인공과만 말문을 트게 됩니다. 이 사람은 주인공이 뇌수술을 받은 걸 보고 정신병동 문을 부수고 탈출합니다.

성경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이 어떤 연유로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모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그가 다시 듣게 되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 성경이 말합니다. 요즘은 청각장애라고 하더라도 훈련을 통해서 어느 정도 말을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청각장애, 또는 언어장애에 이르는 이유도 여러 가지입니다. 기가 막힌 일을 당해서 일시 말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고대시대에 흔한 열병으로 인해서 소리를 잃는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이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리로부터 단절될 수밖에 없는 어떤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소리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경험한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은 지금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육체적인 청각장애를 치유한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청각장애를 치유하는 것이 더 근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을 예수님은 종종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귀는 영적인 귀입니다. 육체적인 청력이 좋다고 해서 모두가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 두 사람이 밤중에 들판을 걷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어둠이 무서워서 빨리 집으로 돌아갈 생각만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그 들판과 하나가 됩니다. 이 사람은 바람 소리를 듣고, 벌레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성경에서 아무리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겁니다. 영적인 청각장애입니다. 들리지 않으니 그걸 자기 말로 표현할 줄도 모릅니다. 영적인 언어장애입니다. 그래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어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깊은 장애로 빠져듭니다. 중요하지 않는 풍문에만 귀가 예민해지고, 나이가 들면서 신세한탄만 많이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놀라운 경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번에 일어난 일을 소문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일은 많은 사람들이 알도록 선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기적 행위자로 오해받기를 원하지 않으신 겁니다. 그 일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경고에 개의치 않고 더 널리 전파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에 관해서 본문은 37절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고 합니다. 사람은 종종 놀라며 삽니다. 지진이 나거나 집이 붕괴되면 사람이 놀랍니다. 한밤중에 한적한 곳을 지나고 있을 때 개가 짖으면 놀랍니다. 이런 일에 놀라면 사람들의 삶은 위축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런 것이 아니라 삶을 새롭게 경험함으로써 놀랐습니다. 밋밋했던 세상이 입체적이고 역동적으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 이런 놀라는 경험을 하십니까? 여러분이 우주비행선을 타고 지구의 대기권 밖으로 나가서 지구를 바라본다고 합시다. 놀라운 경험일 겁니다. 남극이나 북극의 풍경도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이나 몽고 초원에서 밤하늘을 보는 경험도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익숙하게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만 있다면 이렇게 특별한 풍경만이 아니라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도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한두 달 동안 여러분은 가을 풀벌레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풀잎 끝에 달린 이슬방울도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큰돈과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우리 영혼의 놀라운 경험이 가능합니다. 거꾸로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런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없기도 합니다.

가장 큰 놀라움은 하나님 경험에서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사람들의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어느 청각장애인이 치유되는 사건을 보았습니다.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듣게 되었고, 못 보던 사람이 보게 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어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심정으로 이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소리를 듣게 되었고, 생명의 말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고 희망 사항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가 여전히 남의 이야기로 들릴 겁니다. 자신이 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건지가 이해되지 않는 겁니다. 거꾸로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아듣고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아무리 옆에서 설명해줘도 어떤 결정적인 순간(카이로스)이 오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죄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완성하려는 욕망을, 그래서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그걸 오히려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고 가르칩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살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죄의 힘에 묶여 삽니다. 그러니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말로는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단순히 종교적인 덕담 정도로 여깁니다. 그러니 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놀라운 메시지 앞에서 놀라지 못하는 겁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나 여러분 모두 지금 유일회적인 삶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는 힐링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값싼, 혹은 뜨거운 위로가 힐링이 아닙니다. 티브이가 제공하는 여흥과 맛집 순례로 삶의 재미는 느낄지 몰라도 영혼의 힐링은 안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참된 힐링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7:24-37
https://youtu.be/fzBboGLzKTI
http://afreecatv.com/nferm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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