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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쓸려 난 사람들 (눅 24:13–35 / 삼상 22:1–2)

2026년 3월 1일 예배 영상 https://www.youtube.com/live/0XiooCRtTjA?si=S2zxnSDD89oTxc9T

▣ 들어가는 말

-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 온 것들

“수라”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느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하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삭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백석의 ‘수라(修羅)’라는 시입니다. 제목은 불교 용어인데, ‘끝없는 싸움과 고통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욕망과 분노에 빠져 끊임없이 다투는 존재들을 가리키지요. 백석은 바로 이 단어를 우리가 매일 겪는 고난과 갈등, 그 안에서 몸부림치는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백석이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입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개인적인 고통을 넘어 민족 전체가 겪는 아픔이 담겨 있지요. ‘수라’도 그런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개인의 힘든 삶을 넘어서, 모두가 함께 겪고 있는 고난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이 시는 삶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체념하거나 울부짖기보다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느껴지지요. 그래서 읽는 이들에게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결국 이 시는 우리에게 수라와 같이 삶에서 고통을 피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며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시를 읽고 있으면 한 인간의 마음이 조금씩 변해 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처음에는 무심함이었고, 그다음에는 아림이었고, 마침내는 연민입니다. 사순절은 어쩌면 이런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밀어냈던 것들, 문밖으로 쓸어냈던 사람들, 차디찬 밤 속으로 보내 버렸던 기억들이 다시 돌아오는 시간. 그리고 성경 속에는 언제나 문밖으로 밀려난 사람들과 함께 걷는 이야기가 등장하지요.

 

▣ 아둘람 굴

- 쫓겨난 사람들의 공동체

사무엘상에는 다윗이 왕이 되기 전, 도망자로 살아가던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아둘람 굴에 숨어 있습니다. 그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지요. 환란 당한 자들, 빚진 자들, 마음이 원통한 자들입니다.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 세상의 문밖으로 쓸려 난 사람들이지요.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까요. 우리는 흔히 다윗을 위대한 왕으로 기억하지만, 하나님은 궁전이 아니라 굴속에서 그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둘람 굴은 실패의 장소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심긴 자리이지요. 세상은 언제나 중심에 가까이 있는 순으로 사람을 분별하지만, 하나님은 주변에서 역사를 시작합니다. 궁전이 아니라 굴속에서, 강한 자들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들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태어납니다. 다윗의 공동체는 정치적 조직이기 전에, 존재론적 공동체입니다. 서로의 고통과 아픔, 결핍을 채우며 혼자 설 수 없지만, 함께 기대어 서는 존재들이지요.

다윗이 머물렀던 아둘람 굴은 단순한 도피처가 아닙니다. 사무엘상은 그곳으로 모여든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 이 표현은 개인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 밀려난 계층을 가리킵니다. 왕권의 불안정과 경제적 압박 속에서 삶의 기반을 잃은 사람들, 제도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이지요. 성경은 왜 이런 사람들을 굳이 기록할까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우리같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수라같은 세상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며 상처받은 사람들이 주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아닐까요.

“아둘람”은 어원적 의미에 관해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지만, 대게 “피난처, 은신처” “낮아짐, 어두운 공간”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빛과 영광이 아니라 어둠과 고난 속에서 다윗의 왕권이 시작된다는 상징이지요. 카잔차키스는 인간을 “끊임없이 추방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중심에서 밀려나며,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히브리어로 ‘굴’은 단순한 동굴이 아니라 몸을 낮춰 들어가야 하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이 낮아짐의 공간에서 다윗은 군주가 아니라 동행자가 되지요. 성경에서 광야와 굴은 실패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환상을 내려놓는 공간입니다. 명령하는 왕이 아니라, 함께 어둠을 견디고, 그 속에 머무르는 사람이지요. 진정한 왕권, 지도력은 권력과 영광, 승리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밀려나고, 소외되고, 추방된 사람들과 함께 숨 쉬는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아둘람 굴은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진정한 공동체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세상은 굴을 패배의 장소, 세상에서 밀려난 온갖 추한 것들이 가득한 곳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그곳을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지로 만듭니다.

백석의 시 속 작은 거미처럼, 세상은 쉽게 생명을 쓸어냅니다. 사람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쓸모와 가치를 따져 분별하고 차별하고 밀어냅니다. “내 원체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미스터선샤인』 김희성의 대사 중) 하나님이 지은 세계 속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있을까요.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쓸모를 나누고, 유익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나누며, 미와 추를 나누는 것 아닐까요. 어쩌면 아둘람 굴 이야기는 우리의 그런 생각을 깨뜨리려는 것 아닐까요. 세계에서 구석으로 밀려난 이들, 쓸려 난 존재에서 새로운 세계의 씨앗을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순절은 완전한 사람들의 시간이 아니라, 아둘람 굴 같은 시간입니다. 밀려난 것들, 무용한 것들의 가치, 아름다움을 보는 것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됩니다.

 

▣ 엠마오로 가는 길

- 무너진 기대와 길 위의 사람들

누가복음 24장에 등장하는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합니다. 그들은 실패한 역사, 좌절된 꿈을 받아들이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다.”(눅 24:21) 그들의 말속에는 상실과 패배감, 쓸쓸함이 담겨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그들에게 다가와 함께 걷지만, 정작 그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영광의 왕이 아니라, 낯선 동행자의 모습으로 다가오지요.

누가복음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만을 남깁니다. 글로바. 이름이 밝혀진 인물은 보통 공동체가 기억하는 실제 인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글로바는 단순한 익명의 한 인물이 아니라 초기 교회 공동체가 모두 알고 있는 신앙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요한복음의 기록입니다. 한글 발음은 같지만, 헬라어 단어로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쨌든 초대교회 전승에서는 엠마오 두 제자 중 한 사람과 요한복음의 이 인물을 연결하려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들을 누구보다 또렷하게 설명할 수 있고,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소문처럼 떠돌던 부활의 이야기까지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함께 걷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합니다. 예수의 못 자국난 손을 보지 못합니다. 그의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앎에 대한 자기 판단, 해석, 고정관념입니다.

어쩌면 백석의 『수라』 속 화자가 차디찬 밤에 작은 생명을 문밖으로 쓸어낸 것처럼, 글로바도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미 가까이 와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익숙한 생각과 판단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시 속에서 화자는 어느 순간 가슴이 짜릿해지며 손을 내밉니다. 그러나 작은 생명은 그 손을 두려워해 달아나 버리지요. 은총과 두려움 사이의 그 짧은 거리. 엠마오의 길에도 같은 거리가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의 손은 이미 곁에 있지만, 글로바의 눈은 아직 그 손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순절이 바로 이런 시간 아닐까요. 하나님은 멀리 계셔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그 손을 낯설어하는 시간. 그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이지요. 문밖으로 밀려난 존재들을 다시 바라보며,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 온 길을 다시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차디찬 밤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낯선 동행자의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글로바는 예수를 잊은 사람이 아니라, 아직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믿음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눈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믿음이지요.

그래서 엠마오 이야기는 기적의 이야기이기보다 시선의 이야기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사실보다, 글로바의 눈이 천천히 열려 간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신앙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를 다른 눈으로 다시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글로바와 함께 걷던 또 한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은 왜 밝히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독자에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글로바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 떡을 떼실 때

- 기억은 사건보다 깊다!

엠마오 이야기의 중심은 화려한 기적이 아닙니다. 함께 떡을 떼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떡을 떼실 때, 두 제자의 눈이 열립니다. 신앙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게 아니라, 잊고 있던 관계를 다시 기억하는 사건입니다. 새로운 눈은 새로운 관계에서 열립니다.

백석의 시에서 화자는 거미를 바라보며 마음이 변합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쓸어 버렸지만, 점점 그 존재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됩니다. 마음이 아려 옵니다. 관계를 기억하는 순간, 행동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아무 생각 없이 쓸어내지 못합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보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관계를 다시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사람들, 밀려난 존재들, 이름 없는 생명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시간입니다. 아둘람 굴의 사람들도 서로를 통해 공동체를 배웠고, 엠마오의 제자들도 떡을 떼는 기억 속에서 눈이 열렸습니다. 3.1절의 신앙인들도 거대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던 복음을 다시 기억한 것이지요. 인간의 존엄, 자유,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기억한 것입니다. 반복되는 기도와 기억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진 것이지요.

거미 한 마리가 방바닥에 내려옵니다. 시의 화자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문밖으로 쓸어 버립니다. 차디찬 밤입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지나갑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가슴이 짜릿해지고, 아리고, 마침내 손을 내밀게 됩니다. 이 시를 읽으며 우리는 묻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언제 변하기 시작하는가. 거대한 사건 때문일까요? 아니면 아주 작은 존재와의 반복된 만남 때문일까요. 사순절은 거대한 결단의 시간이 아니라, 감각이 깨어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밀어냈던 것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성경 속 하나님은 언제나 문밖으로 밀려난 존재들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e face speaks to me and thereby invites me to a relation.” 얼굴은 나에게 말을 걸며, 나를 관계로 초대한다는 말입니다.

 

▣ 다시 돌아가는 길

- 방향이 바뀌는 순간

예수를 알아본 두 제자는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차디찬 밤입니다. 로마 제국은 여전히 존재하고, 십자가의 현실도 변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이제 그 밤은 이전과 다릅니다. 그들의 방향이 바뀝니다. 함께 걸어 주신 분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위해 떡을 떼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변화는 상황의 변화보다 방향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다윗과 함께했던 아둘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3.1절의 신앙인들도 거대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침묵 대신 양심을, 두려움 대신 희망을 선택했습니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떳떳하게 외쳐라!” “대한 독립 만세” 그들은 무엇을 보았던 걸까요. 무엇을 기억했던 걸까요. 사순절은 우리가 걷는 걸음을 살피는 시간입니다. 속도를 높이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걷고 있는지를 묻는 시간입니다.

 

▣ 나가는 말

– 문밖에서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

백석의 시는 차디찬 밤, 문밖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그 문밖은 단순한 추방의 자리가 아니라,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는 자리입니다. 쓸려나 버린 작은 존재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달라지듯, 사순절은 우리의 시선이 바뀌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중심이 아니라 문밖에서 시작됩니다. 아둘람 굴에서, 엠마오의 길 위에서, 우리가 외면했던 자리에서 하나님은 조용히 역사를 여십니다. 사순절은 올라가는 시간이 아니라 내려가 보는 시간, 밀려난 존재들 곁에 서 보는 시간입니다. 두 제자는 말합니다. “길에서 말씀하실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들의 마음을 다시 타오르게 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동행이었습니다.

3·1절이 외침의 역사라면, 엠마오는 동행의 역사입니다. 신앙은 때로 빵 한 조각을 나누는 자리에서, 길 위의 조용한 대화 속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길이 엠마오처럼 느껴질지라도, 이미 그 길 위에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사순절의 이 길 위에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신 그분을 다시 기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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