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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거룩함 앞에 선 인간” (사 6 : 1 – 8)

2025년 3월 30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vaqMxdwtZs0?si=LsZAY1vu3FfHVR_b

▣ 들어가는 말

- 신의 명령 : 거룩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성경은 우리를 향해 거룩함이 신의 명령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룩’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우리가 느끼는 부담감과 거북함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이라는 어떤 경지(?)는 우리가 다다르기에는 너무나 요원해 보이기 때문이지요. ‘거룩함’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지요. 우리뿐 아니라 그 누구도 쉽게 다다를 수 없는 상태가 아니던가요. 이 세속적 세계를 사는 인간이 거룩할 수 있을까요. 거룩함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향해 ‘거룩하라’ 명령하고 있으니 … 난감하지 않을 수 없지요. ‘거룩’이라는 것이 단순한 개념이 아니고, 신앙인에게 있어 필수적인 요건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거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눅 5:8)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를 빌려 타시고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지요. 시키는 대로 했더니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됩니다. 어부로서 베드로의 경험과 생각, 상식… 자신의 사고체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경험을 합니다.

그가 경험한 사건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자신의 가치관 사고체계로서는 담아낼 수 없는 ‘그 무엇’을 경험합니다. 대체 그것이 무엇이었기에, 그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게 할 수 있을까요. 이상합니다. 눈 앞에 펼쳐진 놀라운 기적, 상상할 수 없었던 상황, 그물이 찢어질 만큼의 펄떡이는 물고기 떼를 보고, 그 이익에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그저 많은 이익을 거둔 차원의 성격이 아니지요.

기쁨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감정, 자신의 전 존재를 압도해오는 두려움과 떨림, 자신의 실존, 내면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실체를 드러내 주는 공포와 전율, 그 거대한 감정(?), 압도적인 사건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 설명할 수 없는 경험 앞에서 그는 저절로 무릎을 꿇습니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존재(예수)의 크기와 깊이와 높이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초월성과 무한한 힘과 거룩함을 직감적으로 느낍니다.

“인간이 거룩함을 경험한다는 것”은 단순한 교리나 개념을 넘어서, 존재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마주하는 사건입니다. 이건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삶 전체를 흔드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 거룩함, 그 의미에 관하여…

- 거룩함, 그 말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다.

본문 속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환상을 봅니다. 그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주를 보고, 천사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이사야 6:3) 선지자 이사야가 성전에서 환상 중에 하나님을 본 장면입니다. 천사들(스랍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거룩하다” 세 번 반복하는 건, 하나님의 거룩함이 절대적이고 다른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도 가장 강조된 표현인데, 성경 전체에서 이렇게 세 번 반복해서 묘사하는 경우는 이곳 외에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이 세계의 그 어떤 것과도 다른 완전히 구별된 존재, 즉 거룩한 분이지요.

오늘날 ‘거룩’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낯설고, 심지어 비현실적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도덕적 완벽함? 종교적인 고결함? 혹은 너무 고루한 개념처럼 느껴질 수도 있죠.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은 그런 단어가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좌 환상 속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거룩함을 경험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거룩함은 단순한 도덕성의 고양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 전체를 흔드는 신비이자, 인간을 무릎 꿇게 만드는 초월성입니다. 따라서 ‘거룩’이라는 단어는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거룩’을 경험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만남, 신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한낱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를 마주하는 순간, 즉 거룩함은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라는 강렬한 인식과 함께 오는 것이지요. 그 순간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작고, 얼마나 추한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그리고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들의 하나님 경험에 대한 묘사는 언제나 두려움, 떨림, 엎드림 등의 반응으로 표현되지요. 이런 경험을 실제로 할 때, 우리는 바로 거룩함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어떤 ‘착한 신’을 만나는 게 아닙니다. 이사야가 마주한 하나님은 설명 불가능한 초월, 무시무시하고 웅장한 압도함, 존재 전체,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빛의 세계입니다.

 

- 거룩,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신학자 루돌프 오토는 그의 저서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거룩함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거룩함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며, 두렵고 떨리는 존재의 힘이며,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혹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자마자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거룩함은 우리 안의 위선과 허위, 불안과 죄책을 한꺼번에 직면하게 만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부정함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지요. 하지만 동시에, 진정으로 그 앞에서 살고 싶다는 갈망도 일어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자각을 하게 됩니다. 거룩함은 빛처럼, 인간의 내면을 비춰서 숨겨진 죄, 상처, 동기, 연약함, 한계들을 드러나게 하지요.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나는 하나님 없이는 설 수 없는 존재구나’라는 진실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이 거룩함의 경험은 괴롭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해방적인 경험이기도 합니다.

 

- 거룩함을 경험하다

거룩함을 경험한 인간은 달라집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부정함을 고백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정죄하지 않고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곧바로 묻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거룩함 앞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거룩함은 인간을 꺾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변화의 시작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꺾이고 무너져 내립니다. 한없이 초라하고 추한 자신의 존재를 깨닫습니다. 그러기에 신 앞에 선 인간은 무엇보다 먼저, ‘죄인’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거룩함의 놀라운 매력, 신비에 끌립니다. 새로운 생명의 힘을 얻습니다.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납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지만,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거룩함을 경험한 후 완전히 변화하지요. 이후로 거룩함(성화)을 강조하면서, 신자가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실천적으로 가르칩니다.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2-3). 인간이 경험한 하나님은 “거룩함”이기에,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 역시 “거룩함”입니다. 인간도 거룩해야 하고, 거룩할 수 있다는 선언이기도 할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인간이 거룩할 수 있다니.

오토의 말처럼, 그분과 만남은, 거룩함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자, ‘떨리게 만드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끌리는 매혹’이기도 하지요. 거룩함은 이런 이중적 감정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동시에 그분께 더 가까이 가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거룩함의 역설적인 힘입니다. 이사야도 바로 그런 경험을 한 것입니다. “화로다, 나는 망했다!” 하고 외치지만, 제단의 핀 숯불이 다가올 때, 그는 도망치지 않고 그 불을 받습니다. 거룩함 앞에 선 인간은 도망치면서도 끌리는 존재,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 거룩함은 나와 어떤 관계인가

- 나와 너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식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와 그것”(I–It)의 관계와 “나와 너”(I–Thou)의 관계입니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상대를 대상화하는 관계로 내가 상대를 이용하거나 설명하거나 분류할 수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일상적 관계, 정보, 사물, 심지어 사람들과의 관계도 종종 이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반면, 나와 너의 관계는 상대를 대상화하지 않고, 인격 그 자체로 대면하는 관계로, 설명하거나 분석할 수 없는 존재 대 존재의 만남입니다. 지금-여기에서 서로가 온전히 마주하는 상태이지요. 내가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며, 그 사람의 고통과 존재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부버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너”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하나님을 ‘그것’으로 여깁니다. 즉,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하는 기능적인 존재, 설명하거나 교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개념적 대상, 때로는 내가 판단하고 의심할 수 있는 객체로 여기는 것이지요. 하지만 부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은 오직 ‘너’로 만날 수 있는 분이다.” 즉, 하나님은 ‘응답을 요구하는 인격적 존재’입니다. 그분은 내가 마주해야 할 존재, 나의 전 존재로 응답해야 하는 살아 있는 ‘너’인 것입니다.

 

- 하나님을 ‘너’로 만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기도하거나 예배드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너’로 만난다는 것은 ‘거룩한 응시’입니다. 그것은 내가 그분을 바라볼 뿐 아니라, 그분이 나를 바라보고 계심을 의식하는 순간입니다. 마치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섰던 것처럼, 내가 그분 앞에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를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한 이사야처럼, 지식이 아닌 인격의 연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쌓는 게 아니라, 그분과 살아 있는 연결을 맺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주제’가 아니라 ‘상대’입니다. 관찰과 연구, 담론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 마주 보는 것,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그분 앞에 서는 것이지요.

반대로, 하나님을 ‘그것’으로 대하게 된다면 신앙이 형식이 되고, 하나님은 내가 통제 가능한 존재가 되며, 관계가 아닌 기능과 이익 중심의 종교가 되고 맙니다. 그 결과 기도는 거래가 되고, 예배는 평가의 대상이 되며, 믿음은 조건부 신뢰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지요.

거룩함은 삶의 새로운 시선입니다. “거룩하게 살라”는 말은 더 ‘착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라는 초대입니다. 관계를 함부로 소비하지 않고, 시간과 언어, 선택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모든 삶의 자리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시선으로 사는 것, 그것이 거룩함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을 마주한 사람이고,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직면한 사람입니다.

 

 

▣ 나가는 말

- 어떻게 거룩함을 경험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거룩함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거룩한 경험을 갈망하고 거룩함을 경험한 사람이 아닐까요. 분명 성경이 가르치는 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거룩’의 경험이야말로 삶의 근거요, 바탕일 텐데, 그런 경험을 나는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울러 비신앙인들에게 이 ‘거룩 경험’을 나누어 주어야 하고,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거룩 경험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것인가요. 지구 반대편의 장엄한 자연을 마주했을 때, 아이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망망대해 위에 홀로 서 있을 때,

한밤중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에서, 죽음 앞에 서거나 삶의 본질에 대해 고뇌하는 순간, 바위틈에서 자라나오는 이름 모를 작은 꽃,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해지는 저녁놀 등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라 부르지만,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임재’, 거룩함의 흔적이라 부르는 것 아닐까요. 그 순간 우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어요. 그저 압도됐어요.”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건 단순한 감동이 아니라, “나보다 더 큰 어떤 존재 앞에 서 있다”라는 실존적 자각일지도 모릅니다. 기독교는 바로 그 존재를 하나님, 그것도 거룩하신 하나님이라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실상은 ‘거룩’이라는 ‘신비’라고 하는 놀라운 숨결이 언제나 우리 곁을 지나치고 있는데, 우리는 하찮은 것으로 지나쳐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거룩함은 특정 장소, 감정, 분위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을 향해 바라보고, 우리를 향한 신의 시선을 인식할 때, 그곳 그 순간은 언제나 거룩한 것 아닐까요. 그것이 신과 동행하는 것 아닐까요.

 

- 오늘 나는 하나님을 '너'로 만나고 있는가?

그분을 응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사용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내게 말을 거신다고 느끼시나요. 우리는 매일 ‘나–그것’으로 하나님을 다룰 유혹을 받지만 거룩함은 ‘나–너’의 자리에서만 열립니다. 거기서 진짜 만남, 진짜의 삶이 시작되는 것 아닐까요. 거룩함은 우리를 작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 넓은 세계로 이끌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분석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나를 바라보고 계신 인격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떨림과 함께,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시는 ‘너’입니다.

 

- ‘거룩’이야말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죄를 정결하게 하신 후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이사야는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거룩함을 경험한 사람은 변화합니다. 예전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삶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성화’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거룩함은 부르심이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건이 됩니다. 거룩함은 무섭고 두려운 감정이지만, 동시에 우리 존재의 중심이 움직이는 순간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정직해지고, 새로워지고, 삶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 1:16)

 

 

 

 

“거룩하신 하나님,

당신의 거룩하신 빛으로 비추소서.

깊은 어둠을 드러내시고 몰아내소서.

무너진 우리를 온전히 다시 세워 빛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어느날...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절망의 한숨으로 온 가슴을 채우던 날...

매일 오던 성전에 누워...

모든 희망을 버리고 그저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십자가가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거대하고 놀라운 광경이 나타난다...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온 몸이 덜덜 떨리고...

바닥이 흔들리고.. 거대한 바위에 눌린 듯...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공포와 전율...

 

그렇게 나는 ... ‘거룩’을 경험한다.

그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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