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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사 40:1-5, 약 2:14-17, 눅 3:3-9, 16-17)

2024년 12월 8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9rE_JdjlozA?si=j-MqaERazEiPo343

I

세계의 모든 교회들이 성탄절인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 4주간을 Advent라고 하는 대림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뜻을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교회의 절기란 관점에서 대림절이 시작된 지난 주일이 교회력으로서는 새해인 셈입니다. 대림절기는 물론 대림절 넷째주가 지난 주간에 있는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린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불길하고 불행한 일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기다린다고 하는것은 바라는것이 이루어지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간절한 바람이나 희망이 없이 기다리며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가 잘 성장하여 유익한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고, 자녀들은 자신의 꿈이 성취될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기다리고 있을테고 고3학생들은 자신이 가고싶은 학교로부터 입학통보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든 청년들이나 싱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짝을 기다리고 있기도 하며 실업자들은 취업할 날을 그리고 사업가들은 경기가 좋아지길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의사로부터 “좋아지고 있습니.다“ 혹는 ”다 나았습니다”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게엄령을 선포하였던 반헌법적 대통령이 물러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또한 남과 북이 꼭 하나가 되지 않더라도 서로 돕고 서로 왕래하면서 평화롭게 사는 날을 무엇보다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자비한 이스라엘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본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의 사람들이나 2년 이상 전쟁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사람들도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나타나는 기후위기와 자연재앙이 사라지고 온 세상 모두가 화목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평화의 세상을 우리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기다림으로 살아가는 기다림의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기다리는 삶은 불안하고 초조하며 때로는 긴장된 삶이 따라옵니다. 기다리는 삶은 때론 지루하고 때론 낙심하고 실망할 때도 있기에 기다림은 존재의 용기, 삶의 용기가 필요한 곳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다림은 기쁨으로 이어지는 중간지대입니다. 기다림 자체가 기쁨일 수는 없지만 기다림 자체를 기쁨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삶의 지혜요 성숙한 신앙의 한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II

오늘 대림절 둘째 주일에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아노은 세례요한, 주의 길을 준비한 세례요한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흔히들 세례요한을 일컬어서 성서에 나타나는 마지막 예언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정확하게 말하면 남 유다나라 사람들은 주전 580년경바벨론나라의 침략으로 명망당하여 포로로 잡혀갔었습니다. 그 바벨론 나라가 페르샤에 의해 멸망당하자 페르샤는 530년경 바벨론 포로로 잡혀왔던 유다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든 해방을 맞이한 그들은 자신의 고국 유다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무너져 버린 성전을 건축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들의 옛모습을 청산하고 자신의 삶과 자신들이 처해 있던 사회들을 개혁하기 시작합니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난 주전 4백년경 또다시 강대국 시리아의 침입을 받아 유다나라가 폐망하여 시리아의 속국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기를 북돋우어 주며 위로와 희망을 선포해 주던 예언자들이 4백년동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4백년 동안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의 말씀이 끊어졌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겐 빛이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깜깜한 암흑의 세상이요, 모든 희망이 살아져버린 절망의 순간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에 비해서 세례요한의 출현의 때를 보다 상세하게 역사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바벨론. 페르시아. 시리아의 속국으로 있었던 유다나라가 또다시 로마에 폐망하여 그들의 통치하에 있던 유대지역의 정치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세례요한이야말로 구약의 예언자 전통에 서있는 사람이란 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서학자들은 세례요한을 일컬어서 성서에 나타난 마지막 예언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로마왕의 이름, 디베리우스가 나타나기도 하며, 로마의 총독으로 유대에 파견된 빌라도가 나오며 그리고 로마로 부터 임명받아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다스리던 헤롯 왕 곧 헤롯 안티파스의 이름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와 현직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사위인 가야바의 이름도 나옵니다. 이들은 로마와 헤롯으로 부터 적당한 지원을 받아 가면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던,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이었는데 그들의 이름을 누가는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 이러한 사람들의 이름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은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때,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러 나온 그때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암흑과 어두움이 넘쳤던 시기여서 윤리가 땅에 떨어져버린 타락한 사회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에 세례요한의 출현은 민족의 희망을 알려주는 서곡이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민족의 암울했던 역사의 한복판에 등장하였는데 그는 빈들에서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띠를 두르고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검소하게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민족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대한 기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이었는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왔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요단강가로 나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이 될 수 있음을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려 삶의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말씀을 듣고자 나아왔을 때,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에 임해 왔기에 삶의 방향을 돌이켜 회개하라는 회개운동을 펼쳐나갑니다. 그리고 철저히 뉘우치고 회개했다는 그 증거로 세례를 받아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III

우리는 이러한 예언자, 세례요한의 모습을 네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메시아의 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세례요한의 첫째 모습은 삶의 목적도 삶의 방향도 없이 비윤리적이요 반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당시의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거침없이 비판을 퍼붓고 있습니다. 또한 세례요한은 동생의 아내를 취하여 자신의 아내로 삼아버린, 헤롯 안티파스 왕의 반신앙적이요 비윤리적인 행동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날려보내고 있습니다. 마치 게엄령을 선포했던 반한법적이요 위법적인 대통령에게 오늘 우리가 비판을 날려보내는 것과 꼭 같습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헤롯안티파스를 향해서 간사하기 그지없는 여우라고도 말씀하신 것을 보면 헤롯 안티파스의 냄새나는 모습을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어느 누구라 하더라도 잘못된 삶을 살아가거나 반 신앙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거나, 삶의 방향이 잘못 설정된 사람들, 아무런 가치관도 없이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가차없이 비판을 날려보냅니다. 또한 세례요한은 어떤 정치세력이나 종교지도자들이라 하더라도 그 권력을 남용하여, 가난하고 힘없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억누르며 외면할 땐, 칼날같이 날카롭게 불같이 강력하게 그들의 불의를 지적하며 참 진리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뜨거운 열정의 예언자요 불의를 바로잡고자 한 정의의 예언자 였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개인과 사회가 정치권력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있으면 여지없이 지적하면서 바르게 서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예언자 세례요한 만이 할 수 있었던 외침이요, 신앙이요 삶이었습니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례요한의 둘째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메시아로 믿어 자신에게 몰려와서 회개의 세례를 받고자 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세례요한이 강조했던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거대하고 거창한 회개도 아니고 추상적으로 말로 하는 회개가 아니라 작고 소박하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 10절을 보면 무리들이 세례요한을 향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세례요한은 세례에 합당한 열매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옷 두벌있는 자는 옷 없는자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며 부과된 세금 외에는 받지 말것이며 남의 것을 빼앗거나 강탈하지 않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역설합니다. 야고보서 사도는 이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 것과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에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빠져 있고 삶의 방향도 목적도 없이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 삶의 모습이 삐뚤어져 있어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공공의 유익에 엄청난 손해를 끼치면서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을 통해서 보여지는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세 번째의 모습은 구약의 이사야의 예언 중에서 나타나는 말씀으로서(40장 3절 이하), “광야에서 외치는 자여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고자 했던 세례요한은 이사야 예언자의 에언처럼, 자신을 소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대비시키고 있는 그의 겸손한 모습이었다는 점입니다. “소리”는 아무런 뜻이 없다면 “말씀”은 깊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소리”는 이무런 내용이 없지만 “말씀”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소리”가 모이면 시끄러울 뿐이지만 “말씀”이 모이면 감동과 감화가 되며 삶의 용기와 힘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세례요한은 마태복음 3장 11절에서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신을 든다”는 말은 “종이 주인의 신발을 신겨주고 벗겨주는 일”을 뜻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할 때, 그러한 종의 일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낮추고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세례요한은 큰 바위의 얼굴처럼 당시 유다나라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큰 바위의 얼굴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성탄을 기리는 대림절 둘째주일에 무엇보다도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인격과 함께 겸손함의 신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을 보면 세례요한의 네번째 모습을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시작하기 전, 많은 사람들이 빈들에 나티닌 예언자 세례요한은 따랐습니다. 그 중에 대부분의 무리들은 혹시나 세례요한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세례요한을 따랐습니다. 이때 세례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냄을 받은자”라고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폐하여야 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님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날 세례요한은 두 사람의 제자들과 함께 섰다가 지나가는 예수를 보고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소개해주자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랐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였는데 그는 다음날 형인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저도 20년 이상 교수로서 가르쳐 온 사람이기에 자신의 제자들을 다른 사람의 제자가 되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지혜로운 선생은 자기보다 더 나은 선생에게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이 하시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함께 참여하게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참 선생이요 마지막 예언자다운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은 자신의 삶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본회퍼한 신학자는 우리들의 삶의 한복판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는 삶을 가리켜서 “Christ the Center” 곧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을 의미하며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를 매순간 되새겨나가야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중심에 있는 참 기독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례요한은 자신의 삶의 중심에 메시아 그리스도를 설레임으로, 마음다짐으로 마음다함으로 기다리고 기다렸던 사람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최우선적으로 섬겼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있기에 간절히 기다리는 기다림이 있고, 누구와 함께 있기에 마음 설레임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있기에 마음다짐이 있고 누구와 함께 있기에 섬김다함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우리의 마음 중심에 있기에 우리가 샘터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며 누가 우리 마음의 중심에 있기에 마음다짐이 있으며, 누가 우리 마음의 중심에 있기에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나아와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을 통해 함께 신앙의 꿈을 꾸면서 섬김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마음 중심에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참 신앙의 모습과 삶의 가치를 말해 줍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무엇을 이룩해 나가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람됨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탄의 중심은 교회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대림절기에 갖추어야 할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삶을 오직 남을 위해 사셨던 예수의 정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 뜻을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절기에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들이야말로 이번 성탄을 더욱 의미있게 해줄 것입니다.

2024년의 성탄의 절기는 우리의 일평생 삶 가운데 가장 뜻있고 가장 의미가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나누어 가지는 성탄이 되게 해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성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성탄, 하나님의 나라가 가득 담겨있는 성탄을 기다리고 기다려 봅시다. 아니 우리가 그러한 성탄이 되게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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